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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9 S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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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원철 스님 munsuam@hanmail.net
  • ‘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필경재(必敬齋)-항상 주변사람을 배려하며 사는 집

    광평대군은 세종대왕의 다섯 번 째 아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자들에 대한 기사 가운데 그 내용이 가장 길며 매우 긍정적인 내용으로 빼곡하다. 하지만 그는 20살에 요절했다. 그의 아들도 30살에 사망했다. 왕자로써 누려야 할 복을 후손에게 넘긴 탓인지 이후 그들의 자손은 대대손손 번창했고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가로써 가문은 날로 융성했다. 당시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두 왕자의 비(妃)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수행했던 견성사(見性寺)는 뒷날 강남 봉은사(奉恩寺)의 전신이 되었다. 아마도 대를 이은 두 왕비의 기도 힘도 가문의 창성에 커다란 몫을 했을 것이다. 강남구 수서동에 있는 ‘전국 비구니 회관’ 도로명 주소가 ‘광평로’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본래 무덤자리는 여기가 아니였다.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정릉 자리였다. 왕자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왕까지 이길 수는 없다. 왕릉터로 지정되면서 왕자묘는 당연히 옮겨가야 했다. 하지만 이장한 자리가 원래 터보다도 훨씬 더 나은 명당이었다. 왜냐하면 혼자만의 안택이 아니라 후손들까지 함께 할 수 있는 크고 넓고 복된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필경재(必敬齋)-항상 주변사람을 배려하며 사는 집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실눈을 뜨고서 한강과 임진강을 조망하다

    경기도 김포는 또다른 의미에서 반도였다. 한강이 동쪽구역으로 흘러 북쪽구역을 감고서 돌다가 서해바다로 빠져 나간다. 강화섬과 김포 땅 사이에는 강 같은 바다가 서쪽구역으로 쭉 이어진다. 바다폭과 강폭이 별로 차이가 없다. 아니 강이 바다보다 훨씬 더 폭이 넓다. 그래서 그 강은 단순히 한강(큰강)이란 이름으로는 부족했다. 북쪽에서 흘러오는 임진강과 남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이 합수하고 개성을 지난 예성강도 강화섬 들머리에서 물의 양을 더 보태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의 지류까지 합해지면서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강(祖江 祖:할아버지 조)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강의 민물이 아니라 서해바다의 짠물에다 방점을 찍으면 조강(潮江 潮:밀물썰물 조)이 될 터이다. 조강포에는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100여호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특산물인 황대어(黃大漁)가 유명했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중국사신들까지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육이오 이후 철책선이 지나가면서 주민들은 이주하게 되었고 타지의 일반인은 그 강을 바라볼 수 조차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그렇게 조강이란 이름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차츰차츰 사라져 갔다. 조강전망대는 관람절차가 한 단계 더 있는 불편함 때문에 다소 한적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는 달리 설을 앞둔 연휴 첫날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붐볐다. 입장을 위해 예약은 물론 결재까지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 방문입장권 교환을 위해 긴 줄까지 서야했다. 넓은 강을 조망하기 위한 수업료라 생각하고 마음을 바꿔 먹으니 이내 내 차례가 돌아왔다. 입구에서 셔틀버스에 올라 인원 수를 체크하는 청년군인들의 검문모습까지도 색다른 문화상품(?)으로 닿아왔다.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다 입구에는 ‘스벅로그’ 안내판이 가장 먼저 반겨준다. 잊혀져 가던 조강을 다시 대중의 기억 속으로 소환한 것은 ‘스타벅스’ 공로가 적지않다.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에서 넓다란 조강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마실 수 있는 커피 한 잔이 주는 문화의 힘은 컸다. 작년(2024년) 늦가을 ‘김포애기봉생태공원점’의 개점은 호사가들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대기시간도 엄청 길었지만 모두 그 정도의 수고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드디어 조강전망대에 도착했다. 멀리 임진강과 한강이 합수하는 지역을 안내판을 통해 그 위치를 가늠하고서야 동북쪽 방향으로 가늘게 실눈을 뜨고서 지그시 응시했다. 몇달 전에 들렀던 파주 오두산 전망대 부근이었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 예성강까지 보려고 한다면 강화도 북쪽 해안가 전망대까지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이렇게 호수같이 잔잔한 강물인데 옛선비들은 물살이 굉장히 거세고 파도까지 치는 강물로 묘사했다.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과 강물 위에 조각배를 띄우고서 건너가야 하는 사람간의 차이라고나 할까. 정두경(鄭斗卿1597~1673)선생은 ‘주과장단(舟過長湍 배를 타고 장단지역을 지나다. 장단콩이 특히 유명한 곳)’이란 글 속에서 “조수가 조강으로 밀려오는 모습이 마치 산과 같은 파도가 바위를 치면서 올라 온다”고 했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다보니 밀물 때는 강물과 바닷물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풍광이었다. 하지만 밀물을 제대로 이용하는 능숙한 뱃사공도 있기 마련이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6~1682)선생은 ‘무술주행기(戊戌舟行記 무술년에 배를 타고 가며 남긴 여행기)’에서 “황포돗배는 조강포에서 만조를 기다렸다가 단숨에 밀물을 타고 한양(현재 서울)까지 내달렸다”고 했다. 밀물로 인한 파도 때문에 고생한 이가 있는가 하면 밀물을 이용하여 물류시간을 줄이는 찬스에 강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조강의 두 얼굴이라 하겠다. 임진강 한강을 동시에 살핀 후 고개를 돌리니 뒤편 광장에는 ‘평화의 종’이 몇 가지 중첩된 사연을 안고서 매달려 있다. un(유엔)이란 글자를 형상화한 웅장한 철 구조물이 종루를 대신했다. 아널드 슈워츠만 선생에게 재능기부를 받은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88서울올림픽 디자인 자문위원을 지낸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종을 제작한 이는 주철장(鑄鐵匠) 국가무형유산 기능 보유자(112호) 원광식(元光植)선생이다. 몇 군데 광고모델로 나올만큼 ‘혼을 담은 집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쇳물이 눈에 튀어 한 쪽 눈을 잃고도 가업으로 이어오는 종 만들기에 평생을 바친 어른이다. 평화의 종은 동양의 종 장인과 서양 디자이너 합작품인 셈이다. 종 재료에는 더많은 사연이 함께 녹아 있다. DMZ 녹슨 철조망과 유해 발굴현장에서 나온 탄피 그리고 철거된 애기봉 점등 철탑의 파편 등이 함께 들어간 합금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겨울 낮은 짧다. 저녁 해를 뒤로 하고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한강을 옆에 끼고 달리며 그동안 다녔던 민통선 안의 유적답사 일정을 되돌아보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안보관광’이란 이름으로 민간인 통제선은 역사성을 지닌 관광지 중심으로 일부 개방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연천 장남면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릉도 들를 수 있었고, 철원 월정리 역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 외치며 포격에 부서져 잔해만 남은 기차도 만날 수 있었다. 연천 왕징면에 있는 조선의 명필이요 대학자인 허목 선생 묘역도 찾았다. 예약이 필수인지라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덕분에 오히려 관광 뒤에 오는 만족도가 훨씬 높았다. 또 종로 조계사에서 거리가 가깝고 교통체증으로 인한 부담도 없이 가볍게 다녀올 수 있으며 여느 관광지와는 달리 한적함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나의 여행취향과 잘 맞아떨어졌다. 김포의 조강전망대도 그랬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실눈을 뜨고서 한강과 임진강을 조망하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다사다난'이라는 인사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국사 사후에 때 왕은 원주에 소재한 국가관리 창고에서 장례식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토록 했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는 이 지역은 예로부터 물길교통이 편리하여 인근 지역에서 세금으로 거둔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지금도 흥원창(興元創)이란 창고 터가 남아있다. 이제 그 자리는 두 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로써 저녁노을의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우리 답사팀 일행도 노을이 지는 시간에 맞추어 그 자리를 함께 했다. 그렇게 다사다난 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통과의례를 치루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다사다난이라는 인사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물, 빛, 바람이 머문 '붓다의 언덕'

    본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비와 바람을 막고 햇빛을 차단하기 위한 용도로 지어졌다. 또 보온과 안전을 위하여 문의 크기는 최소화 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단열기술이 발달하면서 창문의 크기는 넓어졌고 자연채광을 통해 실내를 환하게 만드는 것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바깥의 바람 그리고 눈·비와 단절되면서 완전히 자연과 격리된 공간에 대한 심리적 불만층도 늘어갔다. 뺨에는 바람이 스쳐가고 마당에는 눈이 쌓이고 처마에는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그리워하는 자연주의자들을 위한 집들도 등장했다. 안도 다다오는 공공건물에 빛과 바람과 눈비를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 건축계의 선구자로 불리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물, 빛, 바람이 머문 붓다의 언덕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오십천 솔섬에는 비석이 우뚝하네

    본래 이 자리에는 회강정(洄江亭)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형조 참판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선생이 산수를 감상하기 위하여 정자를 지었다. 삼척팔경에 들어갈 만큼 눈맛을 자랑하는 곳이다. 비록 지금은 없어졌지만 회강이라는 이름 그대로 강물이 휘돌아 가는 바위 섬 위의 몇 그루 소나무 아래의 운치있는 정자는 상상만 해도 저절로 힐링이 되었다. 바위에는 ‘회강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그 날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1662년 허목(許穆 1595~1682) 삼척 군수가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에 의하면 ‘오십천은 백리를 흐르는데 굴곡이 심하여 오십번을 꺾고 나서야 동해바다에 이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 황하(黃河)는 만절필동(萬折必東 만 번을 굽이치며 동쪽으로 흐른다)이라는 삼척판 버전인 셈이다. 영동지방에서는 가장 긴 하천이다. 도계읍 구사리 백산마을 큰덕샘에는 ‘오십천 발원지’ 기념비도 있다.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지역은 풍수가들의 말에 의하면 산에서는 인물이 나고 물에서는 재물이 난다고 했던가. 이래저래 명당으로서 조건을 딱 갖춘 곳인지라 많은 이들이 욕심을 냈겠지만 솔섬은 이미 지역의 유력가문인 강릉 최씨 집안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솔섬 주변의 들판은 비가 많이 오면 늘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홍수방지를 위하여 주변에 방수림(防水林)을 조성했고 나무(山林)를 베지 못하게(禁) 특별관리를 했다. 그래서 금산평(禁山坪)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대비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능력으로 자연의 힘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다. 5~60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 위에 만들어진 몇 평 규모의 작은 정자는 어느 날 사라졌다. 짐작컨대 홍수 때 약해진 주변 지반이 무너지면서 함께 넘어진 것이 아니였을까. 그럼에도 솔섬 위까지 물이 넘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명당으로써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정자도 없어진 빈 터에 1864년 후손들은 최영원 선생의 묘자리를 만들었다. 2002년 여름 태풍 루사로 인하여 영동지방에 엄청난 양의 폭우를 뿌렸다. 전대미문의 홍수로 인하여 두타산 중턱에 있는 천은사도 계곡물이 넘치면서 1층의 대중용 식당인 공양간까지 물에 잠기는 난리를 치루었다. 당연히 하류의 솔섬에도 물이 범람했고 그 때 묘역 또한 안타깝게도 유실되었다. 안장 후에 150여년만의 만난 대홍수는 명당도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를 애통히 여긴 36대 후손들은 그 해 바로 추모비를 세웠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시대를 증명하는 지역사를 품은 터가 된 것이다. 묘지를 대신한 20여년의 역사를 가진 비석이 앞으로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길 축원했다. 오전에 길이 없어 들어가지 못했다고 통화한 최선도 삼척문화원장께 오후에는 만반의 준비 끝에 무사히 답사를 마쳤다고 말씀드렸다. 경북 구미지방에 출장을 나온지라 함께 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셨다. 지난 번 삼척을 찾았을 때도 하루종일 함께 하면서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설명해주신 자상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전 통화에서도 솔섬의 비석과 회강정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더불어 되돌아 온 길을 따라 풀을 헤치고 물을 밟으면서 목이 긴 장화에게도 또다시 고마움을 표했다. 모래 자갈길을 빠져나온 뒤에서야 평소에 신던 신발로 갈아 신었다. 어렵게 답사를 마친 뒤에 오는 뿌듯함을 안고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다. 비석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되었지만 또다른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 솔섬 답사였다. 이제까지의 경험치는 미래까지 담보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를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기후위기는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을 알리는 서막이라면 서막이라 하겠다. 지난 여름은 엄청 더웠다. 열대야로 잠못 이룬 밤이 계속 되었다. 더 비관적인 전망은 2024년 여름이 앞으로 더욱 심해질 더위의 전주곡이라는 장기예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오지않을 것 같은 가을이 왔다는 사실에 매우 안심하는 중생(衆生)세계의 청량한 아침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오십천 솔섬에는 비석이 우뚝하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마카오(Macau)가 있기 전에 마조각(媽祖閣)이 있었다

    마카오 중국반환 25주년 기념법회에 참석했다. 오문(澳門)불교협회 초청에 의한 것이다. 방문선물은 중국정서를 잘 아는 통역가 선생께서 미리 준비한 김 4박스였다. 다시금 한국 김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비행기로 3시간30분남짓이면 갈 수 있는 멀지 않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태풍이 오는 길목을 용케도 피해 무사히 예정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출발 며칠 전에 서점에 들러 관광안내 책자를 구입했다. 잘 알지 못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홍콩에 관한 내용이고 마카오는 덤으로 얹혀있을 만큼의 적은 분량으로 구성된 얇은 책이다. 안내책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sns시대에는 오히려 검색이 호기심과 많은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마카오는 15세기 명나라 때 개항했으며 주로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무역을 한 거점지역이다. 이후 상인들은 정식으로 세금을 내면서 공식적으로 체류하는 절차를 밟았다. 아편전쟁 후 1887년 포르투갈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했다. 인구 60여만명에 서울 은평구 정도의 면적이라고 한다. 이웃에 있는 홍콩은 700만명이라는 과밀도의 인구를 가졌다. 향항(香港)은 반환 할 때 국제뉴스로 떠들썩했고 그 이후에도 양국(중국·영국)의 경제체제 차이로 인한 불협화음은 물론 거주민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하여 외신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린데 비하여 마카오는 상대적으로 무탈한 곳이였다. 마카오(Macau)란 이름의 근거부터 찾았다. 지명의 발상지는 ‘마조각(媽祖閣)’이다. 중국어 ‘마쭈거’가 ‘마카오’(포르투갈어)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공식한자표기인 오문(奧門 아오먼. 의미:항구의 문)은 한 때 마교(馬交 마가우. 광동어)로 표기하기도 했다. 현재는 오문(奧門)이라고 쓰고 ‘마카오’라고 읽는 것으로 공식화된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801년 가을 제주도에 표류한 외국인의 국적을 ‘막가외(莫可外)’라고 적었다. 이 역시 ‘마카오’와 발음이 유사하다. 마조(媽祖)는 뱃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바다의 여신이다. 마카오(Macau)라는 지명의 발상지인 마조각(媽祖閣)이 있는 아마사원(媽閣廟)은 유교 불교 도교 민간신앙이 합쳐진 ‘만신전(萬神殿 판테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육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이다. 마조각을 중심으로 하여 차츰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지역민은 마카오의 근원이자 마카오의 시작인 마조각을 이렇게 찬탄했다. “선유마조묘(先有媽祖廟) 후유오문성(後有奧門城) 처음에는 마조묘(媽祖廟)가 있었고 그런 다음에 오문성(奧門城)이 생겼다.” 광동성 광주(廣州 광저우)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광효사(光孝寺)에도 “미유양성 선유광효(未有羊城 先有光孝) 광저우가 있기 전에 광효사가 있었다”는 말이 전한다. 양성(羊城)은 광저우의 또다른 이름이다. 《육조단경》에서 광효사는 법성사(法性寺)로 불렀다. 중국선종의 실질적 개산조(開山祖)인 혜능(惠能638~713)행자가 인종(印宗)법사를 만나면서 삭발한 곳이다. 그 머리카락을 사리(舍利)처럼 모셔둔 예발탑(瘞髮塔. 瘞:묻을 예)이 가장 유명하다. 마카오 반환법회에 참석한 광효사 주지 명생(明生 밍셩)대사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유일한 관광일정은 마카오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보제선원(普濟禪院) 관음당(觀音堂)을 참배한 일이다. 태풍 후 비 그친 오후 틈새를 이용하여 찾았다. 원(元)나라때 창건되었으니 마조각과 비슷한 600년 연륜을 가졌다. 시내 큰길가에 있는 도심형 사찰이었다. 몇 개의 불당(佛堂)을 지나가며 미로같은 복도를 계속 꺾으면서 몇번씩 걸어야 하는 건물구조였다. 중심건물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이 사찰의 다른 이름인 ‘관음당’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야외에는 높이20m 무게50톤 관음상을 모셨는데 이 역시 마카오 반환을 기념하는 작품이었다. 보제선원의 뜰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둥근 탁자와 의자 4개 앞에서 일행들은 멈추어 세웠다. 중국과 미국의 조약이 체결(1884년)된 역사적인 장소로 근대사의 아픔이 녹아있는 곳이였다. 하기야 육백년 동안 무슨 일이 없었겠는가? 원·명·청의 왕조가 교체되었으며 또 열강의 침탈까지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2박3일의 공식일정에 쫓겨 결국 찾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는 마조사원을 대신하여 관음당을 찾은 것으로 달랜 셈이다. 왜냐하면 불가의 관음보살은 도가의 마조 역할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역할도 비슷하고 외형도 닮았으며 주로 바닷가에서 쉬이 만날 수 있다. 주지 계성(戒晟 지에청)대사의 자상한 미소와 안내 덕분에 딱딱한 공식행사 속에서 그나마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카오불교총회장 소임을 맡아 이 행사를 주관한 위치인지라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감이 뚝뚝 묻어난다. 돌이켜보니 행사장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기억도 남아있지 않는 짧은 일정이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지루한 축사는 어떤 행사장이건 치뤄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그래도 기행문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한 컷 한 컷 담아놓은 장면들을 챙겨보며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렸다. 사진 속에서 오가는 길은 호텔버스를 이용한 시내관광이 되었음을 알았다. 섬과 다리가 이어지고 멀리 만(灣) 건너 고층빌딩이 모여있는 마천루가 그리는 스카이라인을 조망했던 기억도 더듬을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빗줄기도 제대로 찍혔다. 여행 뒤에 남는 것은 역시 사진 밖에 없다는 말에 다시금 공감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마카오(Macau)가 있기 전에 마조각(媽祖閣)이 있었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울산 태화강의 시작점은 중국 만주 오대산이었다

    속이 후련해지면서 바로 홧병이 나았다. 하지만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후 바람만 불면 대숲에서 외친 소리가 그대로 축음기처럼 반복되는 것이였다. 십리대숲을 걷다가 그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놓은 그림 아닌 그림을 만났다.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은 시간이란 열차에 우리들을 태우고서 신라시대로 데려다 주는 마법사가 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울산 태화강의 시작점은 중국 만주 오대산이었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일연스님 …가파른 절벽 위에 뿔을 걸고 숨은 산양처럼 은둔하다

    현재 지역주민의 일연스님 사랑은 끝이 없다. 옮겨버린 원래 부도자리 빈터에는 역사성을 살려 다시 새로 만든 부도를 안치했다. 어머니 산소 앞에는 1997년 ‘낙랑군부인이씨지묘(樂浪君夫人李氏之墓)’ 글자를 새긴 상석을 마련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옛이야기를 구체적 형상으로 다시 살려낸 것이다. 2017년 모친무덤과 아들의 원래 부도터를 잇는 길이 포함된 ‘일연 테마로드’ 라는 순례길을 만들었다. 효도길 끝자락에는 ‘일연공원’까지 조성하여 삼국유사 편찬이라는 기념비적 업적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토록 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일연스님 …가파른 절벽 위에 뿔을 걸고 숨은 산양처럼 은둔하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양의 태릉에서 서라벌의 화랑을 만나는 시간여행

    역사란 해석학이라고 했다. 물론 해석의 권한은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과감한 해석을 시도했다. 서라벌에 뿌리를 두고 있는 1500년 역사의 화랑이란 이름과 한양에 근거를 두고서 500년 역사를 가진 태릉이란 이름은 각각 출발지가 달랐다. 하지만 백여년 전에 태릉역이 생기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후 두 이름이 연결되면서 화랑대역이 되었다. 철도는 사람과 물자를 이어주면서 정신까지 함께 이어주었다. 신라 화랑과 조선 승군 그리고 한국 육사가 ‘호국’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동일한 공간에서 만나도록 주선했다. 이 모든 것을 서로 연결시켜 준 플렛폼은 문정왕후의 태릉이라 하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양의 태릉에서 서라벌의 화랑을 만나는 시간여행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양주 회암사에서 만난 '겹쳐짐의 미학'

    회암사 옛터에서 여말선초 삼화상으로 불리는 고승을 동시에 만났다. 또 풍수지리 전문가로써 안목까지 발휘된 곳이다. 궁궐과 사찰이 겹쳐진 건축물 위에서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중첩된 시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관계된 공간임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옛인연들이 겹겹으로 쌓여있는 터에 다시 새로운 시절인연들이 하나하나 더해지고 있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양주 회암사에서 만난 겹쳐짐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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