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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7 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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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원철 스님 munsuam@hanmail.net
  • ‘가로세로’는 횡설수설(橫說竪說) 종횡무진(縱橫無盡)의
    횡수(橫竪가로세로)와 종횡(縱橫세로가로)을 한글로 번역한 것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인문학이 함께 하는 바위정원을 꿈꾸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4월 초순 무렵 6만평 규모를 자랑하는 양평 메덩골 정원을 찾았다. 진짜 한국정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전문 해설사와 한나절을 함께 하는 동안 화두 아닌 화두가 되면서 그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메덩골 정원은 우리가 근현대 백여년동안 남에게 내놓을만한 한국정원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는 설립자의 자기반성에서 출발했다. 근래에 새로 조성한 개인정원들은 중국정원 일본정원 혹은 서양식 정원을 오너의 취향에 따라 적당하게 혼합한, 정체성이 모호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견해에 우리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꽃피는 산길, 남도 길이라고 이름붙인 곳을 지나서 돌정원 구역에 이르자 뭔가 색다른 느낌이 닿아 왔다. 그래~바로 이거야! 한국정원은 ‘바위정원’에서 독자성을 찾을 수 있겠다는 나름의 중간결론을 내렸다. 일단 재료가 풍부하다. 왜냐하면 국토의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한 산은 거의 암반 혹은 바위능선을 자랑한다. 이름난 기도처는 모두 바위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기(氣)가 센 공간이다. 요즘 대세인 ‘관악산 기 받기’ 등산이 MZ세대에 유행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메덩골 재예당(載藝堂 예술을 담는 공간) 마당에는 ‘원주암’이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자리잡았다. 한옥의 편액은 경기도 여주지역에서 3대를 이어오는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사농(絲農) 정기중 선생의 글씨다. 사농은 여주 외사리 농부라고 스스로를 낮춘 호(號)라고 한다. 원주암은 정원의 주연격인 바위인지라 메덩골 중심부에 자리잡았다. 이끼와 함께 비바람에도 수십년을 견뎌낸 나즈막한 그리고 가느다란 가지의 소나무까지 그대로 살린 채 먼 곳에서 바위를 통째로 조심조심 옮겨왔다. 물론 초대형 트레일러와 크레인까지 동원했다. 이런 배치의 영감을 얻은 곳은 전남 구례 지리산 천은사 마당에 있는 큰 바위라고 했다. 또 합천 해인사 백련암 원통전(圓通殿 관세음보살 법당)마당의 불면석(佛面石 사각형 모양에 가까운 자연석)을 마주하면서 확신을 더하게 되었다. 덧붙인다면 불면석 앞은 본래 절벽이었다. 필요에 의해 축대를 쌓았고 경내를 넓히다보니 현재 마당 가운데 자리잡은 정원석이 되었다. 또다른 한옥 파청헌(把靑軒)의 명칭은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1330~?)선생의 시 ‘파주대청산(把酒對靑山 술잔을 들고서 푸른 산을 마주한다)’에서 인용했다. 낭만적인 이름의 출전을 확인하기 위해 마루기둥에 달린 주련을 설명할 때는 귀를 쫑곳 세우고 집중했다. 운곡선생은 고려말 조선초 시기에 초야에 묻혀살던 선비였다. 어린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글을 가르친 인연으로 조선 개국 후 벼슬길에 나오기를 몇 번 요청 받았으나 사양하고서 생의 마지막까지 은둔으로 일관하며 수행과 학문에 힘썼고 문집〈운곡시사(耘谷詩史)〉를 남겼다. 묘역이 강원도 원주에 있다고 하니 오가는 길에 기회가 되면 들러봐야겠다. 파청헌 출구의 담장 끝은 자연산 바위로 마감했다.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한 조합이다. 담양 소쇄원 가장자리를 두른 담장 일부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통돌다리 위에 얹었다. 덕분에 허공에 띄워 놓은듯한 담장 아래로 계곡물이 흐른다. 소쇄원 담장을 계곡이 아니라 마당으로 옮겨 놓는다면 파청헌 담장처럼 바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통돌다리는 자연히 역할이 없어진다. 다시 용도를 찾아야 한다. 담장 마감재로 재배치한다면 담쌓는 수고까지 일정부분 덜어낼 수 있겠다. 바위가 많은 나라인지라 산 속에 있는 절집도 담장공사를 하다가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그대로 둔 채 담장 일부로 사용하는 일은 흔한 공법이다. 다니다보니 통돌다리도 몇 군데서 만났다. 종로구 서촌 수성동 계곡의 압권은 기린교(麒麟橋)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통돌로 만들었다. 경북 봉화 닭실마을의 청암정(靑巖亭) 진입로에서도 통돌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이는 통돌을 다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긴 치수의 화강암도 흔하다는 뜻이다. 물론 현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렇게 긴 다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지지대없이 통돌로써 다리를 만들었다고 하는 희소성 때문에 시선을 끌기 마련이다. 메덩골 정원 골짜기 혹은 연못 적당한 자리에 통돌다리도 한 두개 정도 더 만들면 비단 위에 꽃을 더하는 일이라 하겠다. 바위정원의 압권은 선곡(旋谷)서원 앞 넓은마당이다. 선곡(旋谷)은 ‘메덩골’이라는 우리말을 한문으로 바꾼 말이다. 꽃잎이 4개인 메꽃이 바람이 불면 팔랑개비처럼 돌아가는(旋 돌 선)이미지를 문자화했다. 메꽃이 많은 골짜기는 그대로 동네이름이 되었다. 이 자리에 새로 만든 바위정원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선생을 따르던 병산(屛山)서원 제자들의 수학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선생은 전쟁 때 이순신 장군을 발탁하는 등 임진란 극복의 일등공신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징비록〉을 저술하여 전쟁의 전 과정을 반성적으로 살폈다. 한동안 당파적인 이유로 금서로 지정될 만큼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제1열 가운데 가장 묵직한 큰바위는 서애선생이다. 주변에는 눈빛 현형한 제자들이 허리를 곧추세운 당당한 모습으로 포진했다. 하지만 전부 열공하는 모범생만 있을 수는 없다. 당연이 스승의 눈을 피하려고 하는 농땡이도 있기 마련이다. 구석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며 놀고 있는 학동들은 작은 돌 서너개를 무리지어 형상화했다. 물가까지 도망가서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도 있기에 그들은 작은 돌 네다섯개로 표현했다. 어쨋거나 수많은 바위를 높낮이와 넓이 그리고 빛갈까지 염두에 두고서 조화롭게 배치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석장계(石匠界)의 명인 이시희 선생의 피땀어린 작품이다. 바위를 옮기는 노고를 생각하면서 비래방장(飛來方丈)이란 말을 떠올렸다. 고구려 보덕(普德)화상께서 백제로 망명할 때 당신의 거처인 방장실을 옮겨온 일화에서 비롯된 사자성어이다. 사찰벽화에는 사방 한 장(丈. 약 3m) 넓이의 바위를 타고 날아오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바위를 옮기는 일은 쉽지않다. 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옮기는 사람까지 모두 망명시켜야 할 만큼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재료인 돌이 풍부하다고 해서 정원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인문학이 함께 하는 바위정원을 꿈꾸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소설 삼국지-역사와 문학이라는 경계선을 뛰어넘다

    이십여년 만에 다시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 무후사(武侯祠)를 찾았다. 그 사이에 지하철 무후사역(站)이 새로 생겼고 촉(蜀)나라 옛 거리를 재현했다는 금리(錦里)구역마저 경내지로 편입될 만큼 주변은 크게 확장·정비된 상태였다. 입구에는 표지석을 새로 만들고 붉은 글씨로 ‘삼국성지(三國聖地)’라고 크게 써놓았다. 그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려는 관광객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 대열에 우리 일행도 합류했다. 아시다시피《삼국지》는 역사책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삼국지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책이다. 나관중(1330~1440)선생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면서 기가 막히게 버무리는 창작력을 발휘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소설적 허구가 역사적 사실까지 덮어버릴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픽션이 오히려 팩트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조건 편들기를 일삼는 일부 삼국지 마니아들은 설사 픽션이라고 해도 팩트를 바탕으로 할 때는 ‘팩션’이라고 적극 옹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상력의 결과로 인하여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수백년동안 천문학적 숫자로 증가한 독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작년(2025)여름 중경(重慶)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장강(長江)주변을 답사할 때 백제성(白帝城)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유비가 이릉(夷陵)전투에서 패배하여 그 충격으로 임종한 곳이라고 가이드는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배가 지나가듯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승산없는 전쟁이라고 판단한 제갈공명은 출병을 뜯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도원결의로 형제가 된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겠다는 독단적 감정으로 출전한 결과였다. 이미 엎지러진 물이지만 참모의 충언을 무시했던 과오를 엄청 후회했다. 이후 뒷일은 모두 공명에게 일임했다. 어쨋거나 역사적으로도 소설적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장소이지만 정박시설을 갖추지 못한 탓인지 처음부터 아예 답사 일정에는 빠져 있었다. ‘삼국성지’에는 유비의 무덤인 혜릉(惠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무후사’로 불린다. 무후는 제갈공명의 시호다. 도대체 이 구역에서 누가 진짜 주인인지 알 수 없도록 누군가 주물러 놓았다. 하긴 유비의 묘자리도 제갈공명이 잡았다고 하니 이미 두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뒷사람들은 동일한 공간에 임금과 신하를 함께 모시면서 영당(影堂)만 달리하여 제사를 지냈다. 전례가 없는 군신합사(君臣合祀)의 사당을 만든 것도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 김에 더욱 범위를 넓혀 삼국지에 등장하는 어지간한 인물들은 전부 모았다. 가이 ‘삼국성지’라 불릴만 하다. 당연히 장비 관우의 형상도 전각(殿閣) 한 켠에 자리잡았다. 직설적 저돌적인 장비 스타일은 사찰의 수호신 사천왕(四天王)의 판박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비슷했다. 패션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모양과 표정까지도 그대로 답습했다. 단순했던 장비의 삶과는 달리 관우는 후대에도 계속 이미지가 업그레이드 되는 과정을 밟았다. 소설적 상상력도 한 몫 했지만 그것은 지혜로운 관우의 품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관우가 전사한 뒤에 머리가 없는 혼령의 상태로 보정(普淨)선사를 찾아가 자기머리를 돌려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스님은 “그렇다면 자네가 죽인 사람들의 머리는 어떻게 돌려줄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 한 마디에 관우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신(神)의 반열에 오르면서 전쟁터에선 군신(軍神)으로 추앙되었고 물류(物流)가 있는 곳에선 재신(財神)으로 모셨다. 무덤의 호칭도 왕의 무덤인 릉(陵)보다도 높은 등급인 ‘림(林)’자를 붙여 관림(關林)이라고 불렀다. 공자의 무덤만 공림(孔林)이라고 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가이 관우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다. 호칭 역시 ‘관공(關公)’으로 일원화할 정도였다. 유비와 공명이라는 두 인물 때문에 많은 사자성어가 생겼다. 은둔하고 있는 공명의 누추한 초막을 유비가 세 번 찾았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는 오늘날 인재를 발탁할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언이 되었다. 사당에 걸린 ‘명량천고(明良千古)’ 현판은 ‘명군양신(明君良臣) 유전천고(流傳千古)’라는 여덟 글자를 네 글자로 줄인 것이다. 눈 밝은 임금과 좋은 신하가 만나면 그 업적과 명성을 영원히 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유비와 공명의 관계를 제대로 묘사한 언어라 하겠다. 또다른 현판은 ‘명수우주(名垂宇宙)’였다. 이름을 온천하에 떨친다는 제갈공명에 대한 찬탄이다. 제갈대명수우주(諸葛大名垂宇宙)에서 앞의 세 글자를 생략한 것이다. 원문은 두보(杜甫)의 시(詩)에서 빌려왔다. 2026년 2월 마지막 날임에도 불구하고 사당 경내에는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남쪽으로 비행기를 몇시간 타고 내려 온 덕분에 미리 봄맞이를 한 셈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흐린 날씨다. 거기에 더하여 전체적으로 무겁고 가라앉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당이다. 꽃은 이 구역을 화사한 분위기로 반전시키면서 참배객을 오래 머물도록 만들었다. 봄꽃은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는 까닭이다. 이내 푸른 대나무와 붉은 벽이 양쪽으로 길다랗게 이어지며 대비감을 보여주는 길이 나타났다. 유비의 묘로 가는 길은 임금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갖추고자 정비했다. 길은 단아했지만 동산만한 봉분 위에서 나무들은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 삼국성지 방문을 기념하면서 얼마 전에 출판된《정사 삼국지》8권을 주문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일단 책꽃이에 진열했다. 만만찮은 부피 임에도 불구하고 선인들은 한 번이 아니라 반드시 세 번 정도 반복해 읽어야 할 명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단호한 어조로 정리한 속담도 오늘까지 전해진다. “삼국지를 한 번도 읽지 않았다는 사람은 친구삼지 말라. 삼국지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 역시 가까이 하지 말라.” 인문학 역사학에 무지한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나친 권모술수를 도모하는 이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중도적 처세술이라 하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소설 삼국지-역사와 문학이라는 경계선을 뛰어넘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희랑대사와 태조왕건이 천년 후에 만날 뻔 했는데

    중국 산서성 대동(大同)지방에는 기둥 몇 개에 의지하여 절벽에 매달리다시피 달려있는 사찰로 유명한 현공사(懸空寺 懸: 매달릴 현)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바위 끝자락에 기둥을 세우고 공중에 매단 것 같은 건축기술을 금강산 보덕굴에서 만날 수 있다. 가야산 희랑대도 옛 모습은 절벽에 세운 기둥 몇 개에 의지한 건물이었다. 해인사 희랑대(希朗臺)는 생긴 터가 게(蟹 바닷게 해)모양이라고 했다. 즉 한 명만 살 수 있는 좁은 공간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게는 두 마리만 모이면 집게 발을 세우고서 싸우기 때문이다. 희랑대는 이름 그대로 희랑대사께서 혼자 살았다. 어느 날 큰절인 해인사의 많은 대중들이 모기 때문에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달음에 내려가서 모든 모기를 집합시킨 후 희랑대로 데리고 왔다. 그 뒤부터 큰절에는 모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대중들은 물릴 걱정없이 여름을 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 희랑대사 혼자서 그 많은 모기에게 피를 나눠줬기 때문이다. 그 흔적이 현재 남아있는 희랑대사의 앉아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좌상(坐像)의 가슴 가운데 남아있는 구멍이라고 한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뒷담화겠지만 나름 설득력을 가진다. 희랑대에는 십여년 전 해인사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는 진품과 동일한 모습으로 정성스럽게 다시 만든 좌상을 인법당에 모셨다. 희랑(希朗 889~956)대사는 천년 전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명성에 걸맞게 비교적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해인사고적기》에는 “왕건과 희랑이 처음 만났다.”고 했으며〈균여전〉에는 “희랑대사가 왕건을 도왔다”고 하여 두 인물이 고려를 건국할 때 정치적 종교적 역할을 일정부분 분담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조선중기 유척기(1691~1767)선비는《지수재집》‘유가야기(遊加耶記)’에서 “고려왕실이 949년 5월 희랑대사에게 시호와 교지를 내렸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던 것은 화엄경의 대가라는 무형의 사상적 자산도 적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유형의 ‘희랑대사 건칠(乾漆 옻칠)좌상’ 때문일 것이다. 10세기 초반 조성한 높이 82cm의 승려상인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입체 인물상이다. 그 희귀성과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아 1989년 보물 999호 지정되었다가 2020년 국보 333호로 승격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999호 333호도 예사롭지 않는 숫자라 하겠다. 참고로 2021년 11월19일부터 국보 보물에 대한 숫자기록은 외부적으로는 표기하지 않는다. 실학자 이덕무(1741~1793)선생은 《청장관전서》‘가야산기(記)’에서 대사의 좌상을 친견한 소감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얼굴과 손을 까맣게 칠했고(옻칠 상태라는 의미) 힘줄과 뼈가 울퉁불퉁 나왔다(조각기술이 세밀하다는 뜻). ··· 가슴 가운데 구멍이 있다.” 그 구멍 때문에 흉혈국인(胸穴國人 胸가슴 흉. 穴구멍 혈)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폭 0.5cm 깊이 3.5cm 구멍은 종교적으로는 신통력을 상징한다. 광명의 빛이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역 출신으로 중국불교의 기초를 세운 불도징(232~348) 역시 흉혈의 소유자였다. “밤에 독서할 때 가슴의 구멍을 막아두었던 솜을 빼면 방안이 환하게 밝아진다.”고 한 것에서 그 사실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왕건(877~943)임금과 희랑대사의 만남은 두고 두고 이야기거리를 제공했다. 1992년 10월 고려 태조릉인 현릉(顯陵) 북쪽에서 왕건의 청동상이 발굴되었다. 원래 왕실 상징물로 개성의 원찰 봉은사(奉恩寺)에 초상화와 청동상을 봉안했다. 하지만 조선을 건국하면서 새 왕조는 보존 혹은 폐기를 두고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없앨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둔다면 조선왕조의 정체성 확립에 방해가 될 것이며, 없애버린다면 민심이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는 ‘왕릉 근처에 묻었다’고 했다. 성군답게 보존도 폐기도 아닌 나름의 중도적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그 덕분에 2006년 남북교류특별전 때 왕건 청동상은 서울나들이까지 하게 되었다. 이후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대고려전’을 기획했다. 희랑 좌상도 천년 만에 서울로 외출했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왕건 청동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오지 못했다. 천년 만의 해후를 기대했지만 결국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대신 경기도 연천 숭의전(고려 임금들의 위패를 모신 곳) 사당에서 왕건 초상화와 희랑 좌상의 상봉 의례를 통하여 그 서운함을 달랬다. 설 연휴를 이용하여 희랑대사 탄신지를 찾았다. 경남 거창군 주상(主尙)면 성기리 희동 마을의 주(朱)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5세 때 인근 합천 해인사로 출가했다. 성기리(聖基里)는 성인마을이라는 뜻이며 희동(希洞)은 희랑대사의 동네라는 의미가 되겠다. 주상면 행정복지센터(면사무소) 앞에 ‘왕사(王師 태조왕건의 스승)의 고장 주상’이라는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도로명은 희랑길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가니 희동 입구에 안내판과 함께 ‘희랑대사 탄신 유지(遺址)’라고 쓴 비석이 반겨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기리 뒷산의 ‘주(朱)부처님’을 모신 사당인 성인당(聖人堂)에서 매년 2월9일 후손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향과 핏줄이 주는 지연(地緣)과 혈연의 무게감은 예나 지금이나 불가역(不可逆 바꿀 수 없는)적 인연이라 하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희랑대사와 태조왕건이 천년 후에 만날 뻔 했는데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황희정승의 마지막 은거지 반구정 정자에 오르다

    별로 잘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팔순이 넘어서야 세종임금께 겨우 퇴임을 허락받았다. 수십년을 살았던 한양을 떠나 연고지 파주로 가는 길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쉬엄쉬엄 가더라도 이틀이면 될 것이다. 말등에 올라앉아 가는 길을 산천유람 삼아 천천히 몸을 옮기다보니 지난 팔십년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제 나, 황희(黃喜 1363~1452)는 모두 들으라고 이렇게 독백(獨白)하노라. 고려 공민왕 때 개경(개성)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고려왕조가 문을 닫았다.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지조있는 구시대의 인물들과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빗장을 걸어 잠근 채 동구 밖을 나가지 않았다. 이를 보고서 남들은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미화했다. 하지만 새 왕조는 인재난에 시달렸다. 그래서 두문동으로 사람을 보냈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발탁되면서 하산해야 했다. 왕조는 바뀌어도 백성은 바뀌지 않았으니 그들을 위해 일할 젊은 인재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변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동료 정건천(程巾川)은 이를 애석히 여기면서 “그대는 청운(靑雲)에 올라 떠나가고 나는 청산(靑山)을 향해 돌아가네. 청운과 청산이 이에 갈라서니 눈물이 옷(碧羅衣)을 적시는구나”라는 이별사를 접할 때는 가슴이 찢어졌다. 하지만 은거할 사람은 은거할 몫이 있고 출사(出仕)할 사람은 출사할 몫이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고 위로 하면서 은둔지를 빠져 나왔다. 이왕 세상으로 나왔으니 최선의 삶을 살아야 했다. 태종 임금은 “하루 이틀 눈 앞에 없으면 바로 불렀고 하루라도 곁에서 떠나지를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과분한 신임을 받았다. 세종이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궁중에 설치한 내불당(內佛堂)문제로 신하들과 격한 갈등이 생겼을 때 이를 중재하다가 오히려 눈 밖에 날 뻔했지만 이후에도 임금께서 끝까지 아껴주신 큰 은혜는 어찌 가히 말로써 다할 수 있으랴. 1423년 영동지방에 큰 흉년으로 인하여 민심이 흉흉하다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한양에서 동쪽으로 가장 먼 거리인 삼척으로 발령이 났다. 관찰사로 파견되었을 때 최선을 다해 백성을 보살폈고 사재까지 털어 기근을 극복했다. 그 덕분에 지역주민들은 소공대(召公臺)라는 단(壇)을 만들고 공덕비까지 세워 주었다. 소공대비(召公臺碑)가 바로 그것이다. 내려다보이는 동해바다가 일품인 와현(瓦峴)고개는 내가 머리를 식힐 때마다 산책삼아 와서 쉬던 곳이다. 이후 지역주민들은 소공령(召公嶺)으로 바꿔 불렀다. 당치도 않은 말이지만 주나라 공신인 소공(召公)의 덕(德)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라는 과찬이 뒤따랐다. 제일 힘들었던 시기는 전라도 남원에서 5년(1418~1422)간 유배생활을 한 일이라 하겠다. 그때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아 누각인 광통루(廣通樓)를 건립했다. 현재 광한루(廣寒樓)의 전신으로 《춘향전》의 무대가 되었다. 이처럼 오지 근무와 유배생활을 통해 관료로서 내공을 더욱 단단하게 키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한양으로 복귀했다. 수십년 벼슬살이를 하다보니 태조에서 문종까지 다섯임금을 섬기면서 6조판서와 3정승 그리고 모든 요직을 두루 거쳤다. 임명장을 모아 여덟 폭 병풍을 만든다면 앞뒤를 꽉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조선정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어쨌거나 관운이 좋았던 덕분에 여말선초의 혼란기와 세종의 태평성대까지 관료로서 복무할 수 있었다. 세상사람들은 영원히 나를 ‘황희정승’이라고 불러 주었으니 이런 영광이 또 어디에 있으랴. 장거리 이동으로 인하여 마부와 시종마저 지칠 무렵 드디어 임진강이 보인다. 그동안 한강물을 먹었는데 이제부터 임진강물로 바꾸어 마셔야 한다. 노구인지라 혹여 물갈이로 인하여 생기는 속탈은 없기를 바랐다. 낙하진(洛河津) 포구에 있는 낙하정(洛河亭) 정자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젊은 시절 은둔지였던 개경의 두문동도 보인다. 이제 여기에서 갈매기와 벗하며 은거하겠다는 의미로 반구정(伴鷗亭)으로 바꾼 현판을 달았다. 뒷날 조선의 제일 문장가요 명필로 이름을 떨치던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6~1682) 후학이 나를 대신하여 〈반구정기(伴鷗亭記) 〉를 통해 주변까지 잘 묘사해 주었다. “반구정은 파주 읍내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강 하류에 있는데 썰물이 되어 개펄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白鷗)들이 강가로 날아든다. 잡초가 우거진 넓은 벌판이 있고 모래톱에는 강물이 넘실거려 9월이면 기러기(陽鳥)가 찾아온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20리이다.” 팔순 중반에 퇴직한 뒤 90살에 세상인연이 다할 때까지 반구정 인근에서 유유자적하며 머물렀다. 생각해보니 참 오래도 살았다. 그럼에도 은거터에 대한 집착은 사후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업(業)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질겼다. 무덤에 누워서도 늘 반구정을 향해 눈과 귀가 저절로 쫑긋하게 세워진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제자와 후손들이 힘을 합해 낡은 반구정을 헐고 새로 크게 짓는다고 했다. 조금 아래쪽에 넓고 평평한 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 쪽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평수를 넓히고 더 좋은 자리로 옮겨 주는 것이 고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내가 골랐던 터에 대한 미련은 남을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본래 자리에 다시 앙지대(仰止臺)를 건립했다. 앙지는 《시경(詩經)》〈소아(小雅)〉편에 나오는 “고산앙지(高山仰止) 경행행지(景行行止) 높은 산을 우러러 보고 큰 길을 따라 걸으니 그 덕행을 본받는다”에 근거했다. 안심에 더하여 흐뭇한 마음까지 겹쳐진다. 반구정 한 채 밖에 없던 언덕에 앙지대 정자가 새로 만들어지면서 졸지에 두 채의 집이 생겼다. 어쨌거나 청백리가 사후에 설사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손가락질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참으로 다행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황희정승의 마지막 은거지 반구정 정자에 오르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상하이 주가각(朱家角)에선 각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물길을 따라 형성된 동네를 수향(水鄕)마을이라고 부른다. 그 물에는 바다 강 호수는 당연히 포함된다. 거기에 인공적인 수로(水路)까지 더해졌다. 그리고 자연물길 뿐만 아니라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운하 그리고 주변의 정박시설, 창고, 다리, 상업적 공간 및 살림집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갖가지 생필품을 물길따라 운반하던 시절의 생활유산이라 하겠다. 이제 철도와 도로망의 완비됨으로 인하여 물류라는 본래역할은 미미해졌다. 대신 여행상품 목록에 올라가면서 경관을 자랑하는 수로와 노 젓는 작은 배는 관광객들의 차지가 되었다. 십여 년 전 한창 더울 때 중국 상해(上海상하이)를 찾았다. 한국보다 더 혹독한 여름날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찌는듯한 더위를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궁여지책으로 물가를 찾기로 했다. 오진(烏鎭 우전) 수향마을이었다. 더위는 수변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습도까지 더해지면서 체감온도는 더욱 급상승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했으니 차라리 생각을 바꾸는게 낫겠다. 이열치열(以熱治熱)도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덥다는 생각조차 포기할 무렵 나룻배가 수로를 벗어나더니 호수로 진입했다. 그 때 강바람을 만나면서 비로소 이마의 땀이 식는다. 수향마을과 첫 만남은 이랬다. 올해(2025년) 12월 겨울에 상하이를 찾았다. 다행이도 서울보다 덜 추웠다. 무거운 누비옷을 입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반나절 정도 수향마을 주가각(朱家角 주자쟈오)을 찾는 기회를 가졌다. 넓은 호수를 곁에 두고서 큰 수로와 작은 수로가 교차하고, 골목길의 바닥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녔는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관광철도 아니고 연휴기간을 피한 덕분에 여유롭게 상가 주변을 기웃거리며 다닐 수 있었다. 동네이름으로 미루어 보건데 주(朱)씨 일가의 집성촌이었던 모양이다. 각(角)은 바다나 호수로 뾰족하게 내민 땅(岬 곶 갑)이라는 뜻이다. 전체 안내지도를 살펴보니 호수와 수로로 둘러쌓인 까닭에 동네 전체가 저절로 삼각형 땅모양으로 각이 잡혀 있었다. 군대용어였던 ‘각 잡는다’는 말은 본래 생활용품(옷 수건 등 포함)을 깔끔하게 정리한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절도(節度) 있는 행동’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그 말이 병영 담장을 벗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언어로 자리잡았다. 군대 열병식은 물론 K팝 가수의 집단군무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칼각’이다. 숏폼시대에 제대로 된 순간 포착은 ‘쇼츠각’이 된다. 뭔가 적절한 상황이나 시기가 되었을 때도 ‘~~해야 할 각이다’라고 하면서 ‘타이밍’ 혹은 ‘챤스’라는 의미가 강하게 투영된 Z세대의 일상용어로 정착되었다. 수향마을 주가각에서도 사진을 잘 찍으려면 제대로 각을 잡아야 한다. 각을 잡기 전에 미리 물길과 옛건물이 조화를 이루는 자리까지 찾아두어야 한다. 목 좋은 자리에선 피사체들의 잔소리에 따라 셔터 누르는 위치를 옮겨가며 각을 잡아야만 한다. 성질 급한 이의 셀카 역시 제대로 된 장면을 얻으려면 위치도 타이밍도 역시 각이 중요하다. 물가의 야외 테라스까지 갖춘 커피숍에 앉으니 제대로 각이 나오는지라 단체 인증샷을 찍었다. 드라마 촬영 장소로 몇 번의 선택을 받았다는 방생교(放生橋)에서 오래 머물렀다. 많은 관광객들이 난간 곁에서 혹은 진입 계단에서 또는 물가에서 제대로 된 한 컷을 위해 각을 잡고 있었다. 둥근 돌 아치형 교각이 몇 개 이어진 70m 정도의 길이를 가진 다리다. 폭도 6m나 된다. 인근에선 가장 큰 다리라고 한다. 게다가 몇백년의 시간이라는 무게까지 쌓였다. 어디에서 무엇을 찍어도 그림 엽서 정도는 될 만한 공간이다. 한껏 차려입은 청춘남녀가 각을 제대로 잡는다면 화보(畫報)까지 가능할 터이다. 하지만 물가에서 생활은 현실이다. 먹고 살기 위해선 갖가지 수산물도 채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날을 골라 잡힌 생선을 강물로 되돌려 보내는 방생의식도 필요하다. 공덕을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최적의 장소에 스님네들이 다리를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방생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다리 근처에서는 절대로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는 주민들의 규약은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풍습으로 굳어졌다. 강 저편에 탑처럼 생긴 3층누각이 돋보이는 절 건물이 보인다. 600년 역사의 원진(圓津)선원이다. 나루터(津)를 편안하게(圓)한다는 뜻처럼 물을 생활터전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이 감수해야 할 위험은 관세음보살이 지켜주었다. 도교의 성황묘(城隍廟)에는 마조신(媽祖神)을 모셨을 것이다. 모두 해상과 수상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공간이다. 운하의 시작은 무려 1500여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隋)나라 문제(文帝) 양제(煬帝) 두 임금은 황하와 양자강을 잇는 운하의 기초를 놓았다. 대대로 왕조를 이어가며 척박한 북쪽지방과 풍요로운 남쪽지방을 이어주는 운하는 물류의 필요성이 점점 커짐에 따라 확장과 연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토사의 퇴적과 계절에 따른 수량의 심한 기복으로 인하여 수시준설과 수시관리라는 과업을 안겨주었다. 물을 잘 다스리는 치수능력은 왕과 지방 관리의 정치적 역량으로 평가 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베이징(北京)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1800km 경항(京杭)대운하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큰 운하 곁에는 작은 운하도 필요하기 마련이다. 강남의 지역주민들은 수로를 만들어 마을과 마을을 잇고 집과 집을 연결했다. 그리고 수로 주변에는 나무를 심고 작은 다리를 건설하고 누각을 만들면서 주변풍광을 함께 가꾸었다. 그 시절 작은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가서 달빛을 감상하며 시를 지었던 선인들의 여유로움을 뒤로 한 채 일찍 떨어지는 겨울 해를 바라보며 갈 길을 서둘렀다. 도두여낙일(渡頭餘落日) 노리상고연(壚里上孤煙) 나루터엔 한 줄기 남은 석양 비끼고 마을에선 한 가닥 연기 피어오르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상하이 주가각(朱家角)에선 각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하늘공원 억새밭에서 가을맞이를 하다

    가까운 곳에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억새공원이 있다 하여 인근 절집에 머물고 있는 도반 몇 명과 ‘번개팅’으로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으로 나들이를 했다. 사실 말만 들었지 그동안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곳이다. 전체일정을 소화하는데 오후 반나절이면 족했다. 입구 주차장에서 하늘공원까지 전동차를 운영했다. 걸어서 올라가려는 사람들보다는 셔틀 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훨씬 많다. 매표창구에는 ‘맹꽁이 차’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하지만 전혀 맹꽁이 디자인은 아니였다. 관광지라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개방형 전기수레차에 ‘맹꽁이’라는 이름만 빌려왔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 환경친화적인 느낌을 준다. 타기만 해도 하늘공원 웅덩이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맹꽁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하늘공원’이라는 표지석 앞을 지나 한강변을 끼고있는 바깥 길을 따라 걸었다. 맑은 하늘이 푸른 강물과 맞닿은 자리를 지그시 응시하며 저녁노을까지 겹쳐친 풍광을 상상했다. 이내 고개를 돌리니 온통 억새밭이다. 5만평 남짓이라고 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만큼 광활한 억새밭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경이롭다. 물론 자연산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심고 가꾼 것이다. 숱한 사연을 가진 난지도 하늘공원의 조성과정을 조목조목 정리한 길다란 게시판 앞에 섰다. 일백여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함께 했다. 난지도(蘭芝島)라는 이름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난초(蘭草)와 지초(芝草)라는 귀한 꽃풀 이름을 명함으로 삼았다. 난초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지초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김수로왕이 아유타국의 허황옥을 부인으로 맞아할 때 지초로 만든 음료수를 대접했다고 한다. 지초는 도교에서 불로장생의 영약으로 신선들이 먹는 불로초로 알려져 있다. 그런 지초와 난초가 가득했던 아름다운 섬이였다. 지극히 아름다운 우정을 ‘지란지교(芝蘭之交)’라고 한 사자성어를 보더라도 지초와 난초가 지닌 품격을 짐작할 수 있겠다. 물론 난지도는 경치도 뛰어났다.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에서 서울 근교의 명승지로 등장할 정도였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금성산 앞에 있는 모래섬이란 뜻으로 ‘금성평사(錦城平沙)’라는 제목을 달았다.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1804~1866)는 한양의 상세판인 〈경조오부도(京兆五部圖)〉와 〈수선전도(首善全圖)〉에서 중화도(中華島)라고 표기했다. 꽃섬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에도 수십가구의 섬주민들이 밭에서 수수와 땅콩을 재배하며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1978년부터 15년간 서울시민의 쓰레기 매립지로 사용되면서 100m 높이의 거대한 쓰레기 산으로 바뀌었다. 이후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 다시 생태공원으로 조성하는 작업이 뒤따랐다. 이처럼 난지도는 꽃섬과 생활폐기물 처리장이라는 상반된 역사가 중첩된 곳이다. 그 위에 다시 억새공원을 조성되었으니 지금은 삼중적 이미지가 겹쳐진 곳이라 하겠다. 2025년 하늘공원의 억새축제는 벌써 24회를 맞이했다.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은 바뀌기 마련이지만 이처럼 극적인 변화를 겪은 터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노래제목 ‘짝사랑’)”라는 노래는 공중파의 장수 프로그램 ‘가요무대’에서 가끔 들을 수 있다. 으악새는 새 이름이 아니라 억새라고 친절한 설명까지 안내판에 적어 놓았다. 으악새 뿐만 아니라 갈대와 억새도 구별해야 한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물가에 핀 것은 갈대라고 하고 건조한 땅에서 자라는 것은 억새라고 분류한다. 하지만 달마(達磨)대사에게 필요한 것은 억새가 아니라 갈대였다. 꺾은 갈대 한 줌을 뗏목 삼아 양자강(揚子江)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 ‘삘’이 꽃혔던 선(禪)화가들은 수묵(水墨)으로 이 상황을 한지 위에 단숨에 그렸다. 현재 ‘달마절로도강도(達磨切蘆渡江圖)’ 몇 점이 동아시아의 유수한 박물관에서 명화로 대접을 받고 있다. 난지도 이야기는 끝이 없다. 갈대가 우거진 강가에 들오리가 날아드는 곳이라 압도(鴨島 오리섬)라고도 불렀다. 타임머신을 타고서 순간이동을 한다면 당나라 때 마조(馬祖709~788)선사가 제자 백장(百丈 ?~814)과 함께 거닐던 갈대밭 현장까지 갈 수도 있겠다. “방금 그 들오리(野鴨)는 어디로 날아갔느냐?”고 물었던 스승의 급작스런 질문에 어물거리며 제대로 답변을 못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코를 비틀었다. 뒷날 그 일화를 전해 들은 상방 익(上方 益)선사는 대답삼아 한 마디 거들었다. 유수(流水)는 유서동(有西東)이나 노화(蘆花)는 무배향(無背向)이라 흐르는 물은 동쪽 서쪽이 있으나 갈대꽃은 앞도 뒤도 없어라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하늘공원 억새밭에서 가을맞이를 하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가야산 문화권의 수많은 인물들이 포진한 도동서원

    억새꽃이 제철이다. 낙동강변을 따라 길게 군락을 이루고 가을바람과 저녁햇살이 교차하면서 더욱 아름다운 자태로 반짝이며 흔들리고 있다.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입구에는 규모가 엄청난 은행나무 몇 그루가 앞마당 한 켠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이 나무는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유교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서원 언덕에 있는 한 그루는 제 힘으로 서 있지만 평지의 두 그루는 서로 의지하면서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지라 가지보호를 위해 인공기둥 몇 개를 받쳐 놓았다. 그럼에도 그 가지에 달려있는 잎들은 여전히 기운차게 무성하다. 이상기온 탓인지 10월 하순인데도 끝여름처럼 푸릇푸릇하다. 누런 황금색 잎들이 가을바람에 쏟아지듯 흩날리는 풍광을 상상하면서 서원입구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이층누각 정면에는 ‘수월문(水月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낙동강물(水)에 비친 보름달(月)을 바라보면서 그 감흥을 이기지 못한 순간을 포착하여 문자화한 것일까? 그것은 누각마루에 서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절집에서도 수월은 익숙하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고 했다. 하늘의 달은 한 개이지만 일천 강물에 비친다. 그래서 모든 물의 달을 하늘의 한 달이 포섭한다(一切水月 一月攝)고 했다. 자연스럽게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이끼 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두 번 째 관문인 환주문(喚主門)이 나타난다. 주인공을 부르는 문이다.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주인공은 물론 나 자신을 가르킨다. 불교입문서인 야운(野雲)비구의 자경문 글머리에 “주인공아! 청아언(聽我言 내 말을 들어보라)하라”고 하면서 시작된다. 내가 나에게 묻는 문답형식의 글이다. 사당에 배향된 인물은 김굉필(金宏弼 1454~1504)선생(이하 등장인물 존칭 생략)이다. 현재 건물은 선생의 외증손자인 정구(鄭逑1543~1620)가 중건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심은 나무가 현재 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라고 전한다. 담장과 건물 등이 나라에서 1963년 보물급으로 지정했으며 2007년에는 서원 전역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홉 개 서원 묶음 가운데 하나다. 조선시대 서원의 원형과 정신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도동(道東)’라는 이름도 의미심장하다. 퇴계 이황(1502~1571)께서 김굉필을 가르켜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 조선 주자학계의 으뜸가는 인물)’이라는 천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더 넓게 의미를 확장하면 도동(道東)는 송나라 주자학이 해동(海東 우리나라)으로 전해진 후 우리나라가 주자학의 종주국이 되었다는 자부심의 반영이기도 했다. 도동설(道東說)은 조선의 주자학계 뿐만 아니다. 선종의 동도설(東道說)은 이미 신라 말에 등장했다. 당나라 백장(749~814 마조의 제자)선사는 신라 구산선문의 개산조 도의(道義)에게 “강서(江西)지방 마조(馬祖709~788)의 법(法)이 이 모두 동국의 승려에게 넘어가는구나?”라고 칭찬하면서 수행의 깊이를 인정했다. 어쨋거나 주자학과 선종은 중국에서 꽃을 피우고 한반도에서 열매를 맺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낙동강변 지역이라 그런지 물 수(水)가 들어간 당우가 많다. 중앙의 수월문을 포함하여 서원 서쪽에는 관수정(觀水亭)이 있으며 동쪽에는 정수암(淨水庵)이 있다. 관수정은 김대진(金大振 1571~1644)이 지은 정자다. 김굉필의 5대손이며 임진란 때 곽재우(1552~1617)와 함께 의병장 활동을 했다. 서원의 권역에서 낙동강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논어》에는 ‘지자요수(知者樂水)’라 했다.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 《노자도덕경》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흐르는 물처럼 쉼없이 노력하며, 물처럼 장애물과 다투지 않으며, 또 맑은 물처럼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정수암은 물 맑은 샘을 가진 암자이다. 김굉필의 집안에서 대대로 조상께 정수(淨水)를 올리며 여묘(廬墓)살이를 하던 초막이 세월이 흐르면서 사찰로 바뀌었다. 묘역은 서원 동편에서 산길을 따라 460m 지점에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숨을 몰아쉬며 등산 아닌 등산을 했다. 등줄기에 땀이 주루룩 흐를 즈음 큰 봉분 두 개가 나타난다. 넷째아들 부부의 묘라고 했다. 다시 80m를 가르킨다. 셋째딸 무덤을 지나간다. 셋째딸은 어머니가 병환일 때 시댁 성주에서 수십차례 미음을 끓여 백여리를 걸어 왔다고 하는데 그 때까지 죽이 식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 때문에 이 자리에 묻히게 되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다시 직각으로 구부러지면서 손자 묘 위에 김굉필 묘 그리고 그 뒤편에 부인 박씨 묘 3기가 나란히 일렬로 자리잡고 있다. 김굉필 묘 앞에 있는 장명등인 쌍사자 석등은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총 6기의 기역(ㄱ)자형 가족묘역이다. 그리고 보니 김굉필은 인근의 명산인 가야산과 인연이 많다. 처가가 합천 가야산 입구 동네인 야로면이다. 19세 때 순천 박씨부인 집으로 장가를 든 후 동네 주변에 작은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란 글씨(현재 한훤당 종택은 현풍에 있다)를 달았다. 가까운 해인사 절에도 자주 왕래하면서 승려들과 이런저런 도담(道談)도 나누었을 것이다. 한훤(寒暄 차고 더움)은 외형은 차갑도록 엄격하지만 속마음은 항상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양변을 동시에 포함한 중도(中道)적인 이름이라 하겠다. 수월문 환주문도 불교적 관점으로 재해석이 가능한 편액이다. 서원 중창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가야산 뒷자락 고을인 성주 출신이다. 수륜면에 당신을 배향한 사당인 회연서원이 있다. 효심이 지극했다는 셋째딸의 시댁도 성주다. 스승인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종택은 가야산 앞줄기가 길게 뻗어내린 고령군 쌍림면에 있다. 그러고보니 도동서원은 가야산 문화권이 배출한 수많은 인물들이 사방에 포진한 형국인 셈이다. 답사를 마친 후 그러한 토지인연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해가 지는 가야산을 향해 갈 길을 재촉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가야산 문화권의 수많은 인물들이 포진한 도동서원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임금만 바뀌어도 여기저기서 마찰음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왕조가 교체된다면 그 파열음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호가 변경되는 와중에서 일부는 고려 편을 들었고 일부는 조선 편에 줄을 섰다. 하지만 어떤 줄을 잡느냐에 따라 외형적인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가문의 영광 혹은 멸문지화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최영과 이성계도 그랬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두 고려사람이다. 정치적 혼란기에 선택한 길은 승자와 패자로 확연히 나눠졌지만 서로에게 배려하는 마음까지 잃지는 않았다. 조선을 건국하고 몇 년 후에 태조 이성계(1335~1408)는 최영(1316~1388)장군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인간적으로 화해를 한 것이다. 최영장군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산에 자리잡았다. 서울시립승화원(벽제 화장장) 앞을 지난 뒤 도착한 주차장은 승용차 몇 대 정도 밖에 댈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주변이 개인 사유지인지라 진입부도 다소 궁색하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책길을 따라 500m 가량 천천히 걸었다. 일행 3명이 모두 초행길이다. 유명세에 비해 접근도는 떨어졌지만 그것이 오히려 찾는 이들에게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누리도록 해준다. 저멀리 산마루에서 사부작 사부작 가을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묘소 안내판과 표지석 그리고 돌계단이 나타났다. 봉분에 잔디가 자라지 않는지라 뒷사람들은 ‘적분(赤墳 황톳빛 무덤)’이라고 불렀다. 이긍익(1736~1806)의《연려실기술》기록에 의하면 청렴의 증거로 당신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아버지 최원직(崔元直 ?~1333)의 ‘견금여석(見金如石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가르침을 좌우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부자(父子)의 무덤이 아래 위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모두 고려양식인 사각형(方形) 고분이다. 아들의 봉분 규모가 더 크고 장식물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은 아버지보다 더 높은 벼슬을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 곁의 부친 행적을 기록한 비석은 최영이 직접 썼다. 그런데 현재 아들 무덤에는 잔디가 자라고 있었지만 정작 아버지 무덤은 풀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다. 아들 못지 않게 아버지께서도 더 청렴했기 때문일까. 청렴의 상징코드를 지켜주는 것도 좋겠지만 답사객의 입장에선 봉분이 짙은 푸른 빛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소재한 태조의 왕릉인 건원릉은 고향 함흥에서 운반한 흙과 갈대로 조성했다. 덕분에 잔디 정도가 아니라 항상 키 큰 갈대가 무성하다. 가을에는 갈꽃까지 바람에 날리는 감동적인 풍광을 연출한다. 최씨와 이씨의 무덤 풀은 이렇게 대비감까지 분명하다. 내려오는 길에 왕자의 묘소도 들렀다. 소현(1612~1645)세자의 아들인 경안군(1644~1665)과 손자인 임창군(1663~1724)이 주인공이다. 여기도 부자가 같은 구역에서 잠들어 있다. 아버지 묘와 아들 묘가 거리를 두고서 높낮이를 달리하여 자리잡았다. 병자호란 때 송파 삼전도에서 굴욕의 고두삼배를 한 인조임금이 매우 구박했던 전주이씨 소현세자파 핏줄의 시원지인 셈이다. 이성계도 아들 이방원에게 심한 꾸중을 그치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아버지에게 굴복했지만 이방원은 아버지를 넘어섰다. 드라마틱한 요소를 모두 갖춘 두 사건은 작가의 상상력까지 더해져 사극의 단골 소재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그런 구박과 갈등 속에서도 종교는 큰 의지처가 되었다. 전남 순천 송광사 관음전에는 경안군과 허씨부인의 수명장수를 발원하면서 조성한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2009년 그 기록이 확인되면서 세간에도 널리 알려졌다. 이성계는 말년에 정치적 주도권을 아들에게 빼앗겼다. 이방원이 싫어서 한양 도성을 떠나 많은 시간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머물렀다. 이성계의 무덤 근처에도 왕릉을 지키는 원찰인 개경사(開慶寺) 터가 남아 있다. 어쨋거나 1인자는 말할 것도 없고 2인자 역시 고독한 자리일 수 밖에 없다. 왕실종친의 구성원이기도 하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고뇌와 번뇌는 보통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쨋거나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는 최영장군이라 하겠다. 황해도 개성 덕물산, 남해안 통영 부산, 충남 홍성 등에 사당이 세워졌다. 특히 추자도 사연은 각별하다. 군사들과 함께 제주도 가는 길에 잠시 그 섬에 정박했다. 섬 주민의 생활이 곤궁한 것을 보고서 가난을 해결케 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그물엮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은혜에 보답하고자 섬사람들이 힘을 모아 사당을 건립했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민간신앙으로 승화될 만큼 고려 조선 민중들의 지지도가 절대적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경기도 양주시 장흥읍에 있는 청향사 사당을 중심으로 최영장군당굿보존회(기능보유자 서경욱 만신. 황해도 무형유산 제5호)가 운영되고 있다.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변계랑(卞季良1369~1430)선생은 ‘최영장군을 추모하는 글(哭崔侍中)’을 남겼다. 그 역시 고려와 조선 두 시대를 동시에 살아내야 했던 인물이었다. 분위광국빈성성(奮威光國鬢星星) 나라위해 분투하다 백발이 성성하니 학어가동진식명(學語街童盡識名) 말 배운 아이들도 그 이름을 알고 있네. 일편장심응불사(一片壯心應不死)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고 살아서 천추영여태산횡(千秋永與太山橫) 태산과 더불어 영원히 우뚝하리라.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푸른 산 맑은 물은 보석보다 더 귀중하다

    몇 달 전부터 주변에 광고를 통해 장강(長江 중국 양쯔강)답사에 관심있는 이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했다. 하지만 마감까지 결국 두 명만 남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주일간 개인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녹록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출발을 앞두고 여행사에서 문자가 왔다. 출발날짜를 일주일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마지막까지 참여하겠다는 인원 가운데 일부가 또 빠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1팀과 2팀을 합친 것이였다. 생각보다 모객이 저조했던 까닭이다. 그렇게 인기있는 여행상품은 아닌 모양이다. 몇 년 전에도 신청했을 때 일정이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이유를 이번에 확인한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8월 초에 출발할 수 있었다. 장강여행의 출발지 중경(重慶 충칭)의 도시 브랜드 구호는 ‘아재중경(我在重慶 나는 중경에 있다)’이다. 공항에서 가장 먼저 만난 로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꼰대의 해석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아재들은 중경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ㅋㅋ)” 낮에는 묵직(重)했던 도시 분위기가 밤이 되니 완전히 달라진다. 야경은 화려(慶)했다. 도시이름을 중후(重厚)와 경희(慶喜 경사스럽게 여겨 기뻐하다)가 함께 한다는 의미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해석은 어차피 하는 사람의 몫이다. 또 ‘중경삼림’이라는 청춘영화 때문에 청년세대에게도 잘 알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홍콩의 중경빌딩이 배경이지만 그 건물이름도 중경에서 왔기 때문에 그게 그거다. 배 안에서 보는 다양한 모습의 야경은 시가지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삼천만명이 산다는 세계최대의 인구를 가진 도시답게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시간도 엄청 길었다. 물론 천천히 달리는 관광선 덕분이긴 하지만. 중경에서 출발하여 삼협 댐까지 도착하는 일정만 해도 3박4일이다. 배 안에서 숙식하는 덕분에 캐리어를 열고 닫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지라 동작이 꿈뜰 수 밖에 없는 중장년세대에게 안성맞춤 여행이다. 객실마다 베란다가 있어 빨래를 말리기도 좋다. 인근 지역 관광을 마친 후 여름 맹더위에 흠뻑 젖은 옷은 돌아와서 가벼운 손 세탁 후 널면 된다. 두 벌만 있으면 전일정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었다. 4~5백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는 큰 배는 정박지가 수심이 깊은 강 가운데에 둘 수 밖에 없다. 하선 뒤에는 몇 백m의 부교(浮橋)를 건넌 뒤 가파른 시멘트 계단을 일백개 이상을 밟아야만 관광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다. 장강 리버 크루즈를 가능하게 한 현대중국의 삼협(중국발음:샨샤)댐 건설은 강 하류 지역의 홍수방지가 주목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홍수를 다스리는 일은 정치의 시작이요 끝이다. 요순시대를 지나 왕위를 물려받은 우(禹)임금의 가장 큰 업적은 치수(治水)사업이었다. 홍수는 주민들에게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대혼동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우 임금의 홍수조절 무대는 황하(黃河)였다. 황하는 ‘누런 강’이다. 장강(長江)은 ‘긴 강’이다. 누런 물, 긴 물이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된 경우라 하겠다. 수(隨)나라 문제(文帝541~604)와 양제(煬帝569~618)는 홍수를 막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물류와 운송까지 염두에 둔 운하를 기획하고 만들다가 사십여년 만에 나라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규모 토목사업은 국고를 탕진했고 급기야 민심이반을 불렀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모든 왕조는 경항(京杭 북경과 항주를 연결)운하를 건설하고 수리하는 일에 하나같이 진심이었다. 치수가 곧 정치생명과 연결된 까닭이다. 장강 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강 주변에 있는 도시에도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또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 천만관객을 동원한 우리나라 영화 ‘신과 함께’의 원저자가 줄거리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귀성(鬼城)’을 찾았다. 또 이 지역 출신인 소설 삼국지의 관운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봉연삼국(烽烟三國)’은 무대와 좌석이 동시에 이동하면서 장면의 극전전환을 유도함은 물론 관중의 눈과 귀를 압도하는 대형공연이었다. 강 저편 멀리 있는 백제성(白帝城)도 보았다.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패한 뒤 제갈공명에게 뒷일을 맡기고 임종을 맞이한 곳이다. 원경으로 감상하면서 산 언저리에 새겨진 ‘백제성’이란 흰 글자 옆에 있는 건물 몇 채를 실눈으로 바라보면서 당시의 비장함과 함께하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선상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장강삼협(三峽 무협 구당협 서릉협)이다. 넓은 강과 높은 협곡이 조화를 이루면서 만들어낸 비경이 압권인 지역이다. 중국 10위안 화폐도안의 배경으로 나올만큼 유명한 관광지인지라 여행상품 명칭마저 ‘장강삼협 크루즈’라고 붙일 정도였다. 관광객들은 화폐를 손에 들고서 인증샷을 날리느라고 모두가 바쁘다. 우리라고 빠질 수는 없다. 10위안 지폐를 잠시 임대하여 한 컷 찰칵. 뿌연 물안개로 가려진 방향 저멀리 삼협댐이 보인다. 드디어 종점에 도착한 것이다. 댐에 딸려있는 운하를 통과하려면 작은 배로 갈아타야 한다. 매우 단단한 느낌의 시멘트 벽과 엄청나게 강해 보이는 철끈이 손에 닿을 듯 말듯한 틈새 사이로 배가 들어가는가 싶더니 곧 이어 100m 가량 엘리베이트를 탄 것처럼 하강하면서 댐 아랫강에 관광객을 내려 놓는 것으로써 여행일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관광버스 차창 밖으로 고대의 전설적 시인 굴원(屈原 BC343~278)의 연고지인 ‘굴원고리(屈原故里)환승처‘라는 안내판을 스치며 지나간 뒤 중경행 고속철을 탔다. 4시간이 소요된다. 한국행 비행기도 4시간이 걸렸다. 서울 종로에서 합천 가야산까지 4시간 걸려 운전하던 오랜 내공이 쌓인 덕분에 4시간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을 통해 확인한 것이 부수적으로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하겠다. 가장 큰 소득은 강물에 비친 명문장을 손 그물을 힘차게 던져 건져올린 일이라 하겠다. “녹수청산(綠水靑山) 취시금산은산(就是金山銀山) 맑은 물과 푸른 산, 그것이 바로 금은으로 만든 산이다.” 미래에는 맑은 물과 푸른 산이 금과 은보다 더 높은 가치와 혜택을 인간에게 제공할 것이라는 뜻이다. 장강여행에서 자연환경 보존의 중요성을 10자로 압축한 산 중턱에 써놓은 훈계성(?) 말씀을 달리는 선박 안에서 순간포착 후 핸드폰 갤러리에 저장한 것은 일주일의 여정 속에서 제일 잘한 일이라고 자화자찬 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푸른 산 맑은 물은 보석보다 더 귀중하다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제발 송현공원을 있는 그대로 두시라

    종로구 송현공원의 존재는 인근 주민과 직장인·자영업자들에게 자연이 주는 더없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공원이다. 수시로 산책하면서 들꽃이 뿜어내는 풀향기와 계절마다 바뀌는 꽃나무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른 바 공세권(공원혜택지역)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곳에서 살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공사로 인하여 난장판이 되어버린 ‘공세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습도 높은 더운 여름 날, 그 앞을 지나갈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쳐다보기만 해도 불쾌지수가 급속도로 상승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린송현 녹지광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하늘도 산도 열려있고 푸른 광장이 눈맛을 상쾌하게 했다. 공원이 만들어질 때부터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지켜보면서 애용하는 지역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정관료들의 자연친화적 안목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 건너편에는 빽빽한 빌딩들이 도열했고 뒤편에는 북촌의 기와집 단지와 이어지는 절묘한 자리에 인공구조물 없는 빈공간이 주는 ‘텅 빈 충만’은 비싼 터 값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보배같은 무형의 정신적 상쾌지수를 매일매일 선사했다. 어떤 때는 녹지공원에 어울리지도 않는 뜬금없는 미술작품들이 잠시 서 있다가 없어질 때도 있었다. “그럴려니!” 하고 지나갔다. 눈에 거슬리긴 해도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소품인지라 ‘말 못할 그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하면서 이해했다. 한 때는 어떤 정치인의 기념관이 들어온다고 애드벌륜을 띄우다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슬그머니 물러섰던 기억도 새롭다. 텅 빈 공간이 주는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뭔가를 채우려고 하는 개발만능시대의 사고방식은 이제 버릴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망령처럼 공무원 사회 주변을 떠돌고 있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 포클레인이 넓은 면적의 땅을 깊숙하게 파고 있었다. 한 곳도 아니고 두 곳이다. 며칠 지나더니 레미콘 차량이 와서 철근 사이로 콘크리트 타설을 해댄다. 굳기가 무섭게 10개도 넘는 둥근 배관같이 생긴 거대한 쇠기둥과 철제로 된 계단 그리고 대형 하수관 같은 것을 서로 연결한다고 크레인이 굉음을 내며 이미 황토뻘이 되어버린 마당을 다시 짓이기고 있다. 게다가 직사각형 액자처럼 커다란 목재 대문형 구조물 수십 개가 여기저기 줄지어 서 있다. 공원 가운데를 중심으로 빙 둘러 파란 비닐로 담장을 쳤다. 분명 임시로 만들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철거할 구조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원의 가장자리 주변부 혹은 구석자리에 배치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지만 산책하는 주민·직장인·자영업자들과 방문하는 관광객의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배려심은 두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넉 달을 공사한다고 막아놓겠다는 그 두둑한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대단한 강심장들이다. 주민주권시대에 오만한 행정력의 횡포를 맘껏 과시하고 있다. 서울시청 미래공간 기획실 명의로 ‘도시건축 비엔날레 주제전 작품설치’를 한다고 둘러 친 비닐벽에 써두었다. 공사기간 4개월 동안 불편함이 예상되니 양해를 바란다는 상투적인 면피용 문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엇을 감추려는지) 완공 후 조감도는 아예 게시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송현공원에 설치하게 되었는지도 역시 알 수 없다. 짐작컨대, 결정권자의 개취(개인취향)와 ㅇㅇ위원회의 요식행위와 실무자의 ‘쉬운 장소’ 찾기가 어우러진 합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사전에 인근 주민들과 공원 이용도가 높은 직장인·자영업자들의 의견 수렴절차는 어떤 식으로 밟았는지 묻고 싶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열린송현 녹지광장’이라는 공원명칭에 반하는 조치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십 개의 거대한 쇠기둥이 북한산과 인왕산을 가릴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가리고 있다. (보나마나 앞으로 번쩍번쩍한 구조물이 덧입혀질 것이다.) 열린 공원이 아니라 가려진 공원이 되었다. 녹지광장은 가운데를 무참하게 잠식당한 채 구멍난 도넛을 연상시키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남은 땅은 광장이라기보다는 아예 자투리 땅이라고 부르는 게 옳겠다. 작은 지방도시도 공터만 생기면 공원을 만드는 추세인데 특별시가 틈만 있으면 있는 공원도 야금야금 잠식하는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거대한 인공구조물이 도리어 위압적인 자세로 자연공원을 훼손하는 일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무거움으로 닿아온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상황이라고나 할까. 하나마나한 말이겠지만 시크하게 한 마디 보태야겠다. 도시건축으로 주제전을 하겠다면 차라리 시청 앞 광장에 설치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결정권자와 실무자가 수시로 사무실 창문을 통해 하루하루 진척도를 확인할 수 있고 매일 매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비타민C 노릇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산책하는 주민도 별로 없는 곳이니 민원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 공사기간과 전시기간 중 일어나는 민폐도 줄일 수 있는 대안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미 높다란 빌딩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주변과의 조화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겠다. 단언컨대 인공미는 절대로 자연미를 대체할 수 없다. 현재까지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앞으로 경복궁에서 인사동으로 가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고개를 돌리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발걸음마저 끊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육백년 역사의 전통적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거대한 구조물 관광을 ‘강요’하는 일이 될까봐 적이 걱정스럽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인사동 북촌주민들의 불만도 차곡차곡 누적될 것이다. 언젠가는 일인시위 또는 서명운동을 하다가 급기야 동네사람들까지 손팻말을 들고서 아래 위로 흔들면서 “제발 송현공원을 자연 그대로 둬라”며 화가 잔뜩 난 목소리를 외치는 날이 올 수도 있겠다. 그 즉시 넥타이 부대까지 가세할 것이다. 큰 기와집 높은 담장에는 시커먼 고딕체 큰 글씨로 쓴 ‘송현공원 보존위원회’가 발족될 날도 멀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송현공원 탄생부터 오늘까지 가까이에서 살게 되었다. 24시간을 함께 지내다보니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소나무 언덕’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에 어울릴법한 하늘과 산이 훤히 보이는 열린 송현공원 그리고 녹지광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걸리적거리는 것 없는 지평선 같은 시원한 풍광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길 바랄 뿐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제발 송현공원을 있는 그대로 두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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