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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이어도와 中 선란(深藍)의 수상한 동선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 이청준(1939~2008)이 1974년에 발표한 소설 ‘이어도’의 첫머리다. 이어도는 제주도 뱃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피안의 섬 이름이다. 뱃사람들이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어도로 갔다”고 말해왔다. 소설 이어도에서 작가 이청준은 가상의 남양일보 기자 천남석이 이어도 실체를 밝히기 위한 해군들의 수색 작전 취재를 나갔다가 실종된 사건을 규명해 나가는 과정을 소설로 만들었다. 이어도는 그러나 정확히 말해 섬은 아니다. 해수면 아래 4.6m 정도에 있는 수중 암초다. 국제 해도(海圖)에는 ‘Socotra rock(소코트라 암초)’으로 표시돼 있다. ‘Socotra(‘용의 피’라는 뜻) rock’은 1910년 영국 상선 워터위치(Waterwitch)가 발견해서 해도에 등재했다. 제주도 뱃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서 이 암초에 걸려 조난해서 돌아올 수 없게 되면 “이어도로 갔다”고 한 연유가 밝혀진 것이다. 이어도의 위치는 북위 32도 7분 22.63초, 동경 125도 10분 56.81초. 제주도 마라도 서남쪽 149㎞, 중국 상하이(上海) 앞바다 저우산(舟山)열도 동쪽 끝 둥다오(童島)에서 북동쪽으로 247㎞ 떨어진 곳에 있다. 일본 규슈(九州) 남쪽 도리시마(鳥島)에서는 서쪽으로 287㎞ 떨어져 있다. 이어도에 관한 공식기록으로는 1945년에 설립된 한국산악회 홈페이지에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8월에 피난 수도 부산에 모인 회원들이 (국토조사 목적으로) 제주도 남쪽 해상에 있는 전설의 섬 파랑도를 답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우리 정부는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령으로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발표, 독도와 이어도가 대한민국의 영해 안으로 들어왔다. 1984년에는 제주대학교가 ‘이어도 실재론’ 현장 조사에 나서서 소코트라 암초를 발견해서 ‘파랑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과거 화산이었던 해저에 태극기와 제주대 교기를 꽂아두었다. 우리 정부는 1987년 8월 해운항만청이 이어도를 탐사하고 해수면에 야간선박 항해를 돕기 위한 부표를 설치했다. 부표의 크기는 지름 2.8m, 높이 9m, 무게 8톤이었다. 2003년 6월 해양수산부는 이 위치에 바다 위 39m 높이의 철골 구조물과 헬기 착륙장이 있는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했다. 1992년 8월의 한·중 수교 이후 중국 외교부는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 사이에는 해상 영토분쟁이 없다”고 밝혀왔다. 이유는 “쑤옌자오(蘇岩礁 · Socotra rock을 음역한 것, 이어도의 중국명)는 섬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중국 정부는 필리핀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대만으로 둘러싸인, 이른바 남중국해(서필리핀해)의 스프래틀리(Spratly Islands · 중국명 난사 南沙 군도), 파라셀(Paracel Islands · 시사 西沙군도), 프라타스(Pratas Islands · 둥사 東沙군도)의 70여 개 섬을 놓고 영유권 분쟁을 벌여왔다. 이 분쟁에는 이 지역이 동아시아로 통하는 석유 수송로라는 점에서 미국이 개입해서 공해상 자유통항권을 내세워 중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중국은 이 해역 일대가 당나라 때부터 설정된 남해 구단선(九段線) 안에 포함된다는 역사 기록을 내세워 대부분의 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섬이 아닌 산호초에도 시멘트를 부어 넣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고 헬기 착륙장과 전투기와 폭격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와 미사일 기지를 건설해서 이 지역 국가들은 물론 미국과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더구나 이 지역은 풍부한 해저 천연가스 매장 지역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화약고로 꼽히는 해역이다. 중국 정부는 우리 정부가 1987년 이어도에 부표를 설치하고, 2003년에 헬기장이 포함된 해양과학기지를 설치한 사실을 알면서도 일관되게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간에는 해상영토 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우리 정부가 이어도에 해양과학기지를 위한 헬기장을 설치한 사실을 항의하면 자신들이 남중국해 곳곳의 산호초에 시멘트 구조물을 만들고 군용기 활주로와 미사일 기지를 건설한 사실에 대한 역 비난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를 향해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었다. 2006년 4월 5일 중국 국무원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중국 공산당 지휘부가 거주하는 중난하이(中南海) 자광각(紫光閣)으로 베이징(北京) 주재 한국 특파원들을 초청해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영토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원 총리는 “두 나라는 수천년간의 우호 교류사를 갖고 있으며, 이 점이 양국 관계 발전의 유리한 조건”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해 9월 14일 당시 외교부 대변인 친강(秦剛)은 정례 기자회견을 통해 “쑤옌자오(이어도)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이 겹치는 해역에 위치해 있으므로 한국 측이 이 해역에 대해 일방적 활동을 하는 것은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으며, 한국 측의 일방적 활동에 대해 우리는 반대한다”고 지적했다. 두 나라는 그 뒤 지속적인 협의를 거쳐서 이 해역을 ‘잠정조치수역(PMZ)’으로 규정하고, 양국 가운데 한 나라가 이 수역에서 일방적 활동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잠정조치수역에 대해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21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한·중외교장관 회담에서 카운터 파트인 왕이(王毅) 외교부장 겸 중국공산당 정치국원에게 “서해에서 중국의 활동으로 인해 우리의 정당하고 합법적 해양 권익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조선일보 22일자 보도에 따르면 조 장관은 지난달 26일 ‘선란(深藍) 1호’와 ‘2호’로 알려진 중국의 서해 철골 구조물 인근 해역을 점검하려는 한국 선박을 중국 인원들이 가로막고 위협해 2시간 대치한 상황과 관련해서도 우려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4.6미터 해수면 밑의 국익 조선일보는 중국이 지난해 4~5월 선란 1 · 2호기를 설치해서 ‘서해 알박기’를 시도한 사실이 포착된 데 이어 최근 3호 구조물 제작도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주장하고, 이 구조물들이 지름 70m, 높이 71m 이상의 철골 구조물로, “중국은 이 구조물이 해상 양식장이라고 주장한다”고 지난 22일 보도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지난 2022년 3월에도 잠정조치수역에 무단으로 석유 시추 구조물을 설치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측이 선란 1호와 2호가 해상 양식장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중국 관영 미디어들이 보도했다. 3년여 전인 2022년 7월 6일 중국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에서 발행되는 칭다오 완바오(靑島晩報)는 “선란1호가 국내 최초로 양식에 성공한 국산 연어가 칭다오 사람들의 식탁에 올라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고 보도했다. 칭다오 완바오 보도에 따르면, 선란1호는 2018년 7월 산둥성 정부의 ‘해상 양식 창고’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세계 최대이자 최초의 잠수식 연어양식장으로, 지름 60m에 무게 1400t이며 5만㎥의 바닷물을 이용, 1만여 마리의 연어 양식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선란1호는 2021년 6월에는 15만 마리의 연어 양식에 성공했다고 칭다오 완바오는 전했다. 2024년 5월 9일 중국 공산당 이론지 광명(光明)일보의 온라인 뉴스에 따르면, 이날 선란1호와 비슷한 크기의 선란2호가 제작되어 선란1호보다 바닷물의 부피가 2배에 가까운 9만㎥에서 심해 연어 양식에 성공했다고 사진과 함께 보도됐다. 선란1호의 경우 해안에서 120해리(약 222㎞) 떨어진 심해에서 연어 양식을 한 것으로 중국 관영매체들은 보도했다. 선란 1-2호가 가설된 해역이 해안에서 222㎞ 떨어진 곳, 이어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해역이라는 점에서 ‘연어 양식 시설’이라는 중국 외교당국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선란 1-2호를 한국과의 해양 영유권 분쟁에서 ‘알박기’용 철골 구조물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알박기용인지 연어 양식 시설인지 칭다오 주재 우리 총영사관을 통한 현지 확인 과정 결과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트럼프 2기가 시작된 현재의 한-미-중 관계는 상황 변화를 잘 살펴가며 정책을 검증하고 채택해야 할 때다. 이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해상영토 분쟁을 치열하게 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 외교부나 언론들도 중국 관련 항의와 보도에서 턱없는 중국 비난을 해서 외교적 피해를 자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 때 중국에 대한 최강경파인 마이클 필스버리를 최고의 중국 전문가로 평가해서, 필스버리의 <백년의 마라톤(Hundred years’ marathon)>의 주제인 ‘미국은 중국에 100년 동안 속아왔고 또 속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대통령이었다. 우리 외교당국은 대미, 대중 정책에 대해 폭풍의 언덕 위에 선 것처럼 심사숙고해야 할 때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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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22면) 트럼프의 우크라이나 압박…선악의 이분법 사고 버려야
1950년 6월 25일, 그날은 비가 내리다가 맑게 갠 날이었다.(이중근 편저 '6·25 전쟁 1129일') 새벽 4시 북한군 전군에 남침암호 '폭풍'이 하달됐다. 북한군 1, 2, 3, 4, 5, 6, 12사단과 105전차 여단 등이 38도선 11개 지점에서 일제히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그로부터 1129일 만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 민인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 판문점에서 서명됐다. 협정에는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 육군 대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 3명이 나중에 최종 서명했다. 1953년 7월 29일자 조선일보는 최병우 특파원발로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 한국인의 운명은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제목은 '기이한 전쟁, 기이한 휴전'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성명서에서 "남북통일을 실현하지 못한 채 휴전이 되었으나 유엔과 미국의 협조 아래, 특히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한국 통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혔다. 1129일간의 한국전쟁으로 한국군은 전사 13만8000여 명, 부상 45만여 명, 실종자 포함 60만9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미군은 전사 3만6516명, 부상 10만3248명, 실종자 8177명의 피해를 입었다. 북한군은 사망 13만6000여 명, 부상 20만8000여 명, 실종과 포로 포함 97만3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고, 중국군은 사망 13만6000여 명, 부상 20만8000여 명, 실종과 포로 포함 97만3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우리 민간인은 사망 24만5000여 명, 학살 13만여 명, 부상 23만명, 피랍 8만5000여 명, 행방불명 30만3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지난 24일로 만 3년을 맞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1097일간 사망 5만7000명, 부상 25만여 명의 피해를 입었고, 러시아군은 사망 11만5000여 명, 부상 50만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한국 전쟁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비하면 2~3배가량의 인명 피해를 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등 미 수뇌부와 '북진통일'을 놓고 의견 조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전 뉴데일리 대표 인보길, '위대한 3년') 청일전쟁은 1894년 7월 25일 인천 앞바다에 있는 풍도 근해에서 일본 해군과 청 수군이 해전을 벌임으로써 개전됐다. 전쟁은 1년이 채 안 된 1895년 4월 17일 일본 해군이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 류궁다오(劉公島)에 있는 청 북양함대 기지를 급습함으로써 종결됐다. 강화조약은 대청제국 북양통상대신 리훙장(李鴻章)과 일본 내각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종결됐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핵심은 모두 11개 조항으로, 첫째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할 것, 둘째 대만(臺灣)과 펑후(澎湖)열도를 할양할 것, 셋째 전쟁기간의 전비를 보상할 것, 대청제국 내 7개 도시와의 통상을 허용할 것 등이었다. 이 가운데 조선은 모르는 가운데 조선의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은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하고, 조선이 청에 해오던 조공 등의 전례를 폐지한다'는 조항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역사적으로 중국 대륙의 아시아 지배체제의 일부였던 조선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었다. 일본은 다음 단계로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해서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고, 1910년 마침내 조선을 병합하게 된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가을까지 한반도 근해와 만주, 랴오둥(遼東) 반도 일대에서 벌어진 러일 전쟁의 승자도 일본이었다. 1905년 9월 5일 미국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스(Portsmouth)항에서 체결된 일본과 러시아 제국의 강화조약의 핵심도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보였다. 포츠머스 조약의 제2조는 '러시아 제국은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인 이익을 배타적으로(paramount) 확보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조선이 1910년 일본에 병합되기까지 그런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서 조선을 중국 대륙의 영향권에서 분리시킨 뒤 러일전쟁의 승리로 정치·군사·경제적으로 배타적인 이권을 확보했고, 그런 다음 병합을 한 것이었다. 나라의 운명을 정작 우리 백성들은 모르는 가운데 외부에서 결정하려던 또 한 가지 나쁜 기억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명(明)에서 파견된 선웨이징(沈維敬)이라는 사기꾼이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만나 조선 5도를 일본에 떼어주고 휴전하는 협상을 하다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다. 우리가 근세사에 겪은 일들에 비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광물의 50%를 넘기라고 요구한 것은 제국주의자의 본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년 전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에 베이징(北京)을 방문해서 대만이 중국의 일부임을 보장해주는 대신 우크라이나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중국은 푸틴의 말에 따라 전 세계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고 표현하는데 중국관영 매체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이라는 표현을 썼다. 놀랍게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휴전시키겠다고 나선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푸틴과 정전협상을 시도하는 것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제국주의자 근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외교문제 전문지 포린 어페어즈는 최신호에서 "트럼프가 원하는 세상은 생산성이 전부다. ··· 미국은 유럽을 포기할 것인가, 미국의 유럽 포기가 유럽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윌슨 센터의 역사학자 마이클 킴마게(Kimmage)는 '트럼프가 원하는 세상'이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냉전이 끝나고 20년이 흐른 2010년 국제사회에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 그것은 러시아 푸틴이 시작한 것으로, 강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러시아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푸틴의 다음은 중국 시진핑(習近平)이 더 큰 스케일로 더욱 강력한 중국을 건설하겠다고 나섰고, 시진핑의 뒤는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가 '힌두 민족주의'로 뒤를 이었으며, 모디에 이어 터키의 에르도한이 거의 전제에 가까운 체제를 구축했다. 이런 세상에서 트럼프가 추구하는 것은 미국의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됐다. 킴마게에 따르면 트럼프가 대통령에 재선된 뒤 그린란드를 확보하겠다느니, 캐나다를 52번째 주로 만들겠다느니, 파나마 운하를 중국이 운용하는 것을 버려두지 않겠다느니 하는 행동들이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 킴마게의 기고에 따르면 트럼프가 유럽마저도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바이든식의 가치동맹 따위는 이미 버릴 결심을 했으며, 1930년대와 1950년대 미국의 반공산주의 우익세상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고 킴마게는 진단했다. 미국과 트럼프가 그렇게 변하는 세상에서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압박해서 광물 50%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을 단순히 선(善)과 악(惡)의 기준으로 분류할 일은 아닌 듯하다. 이제 트럼프의 미국이 가는 길 앞에는 생산성이 유일한 기준이며, 일론 머스크를 효율부(DOGE) 장관으로 발탁한 일을 결코 소홀하게 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또한 국제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선과 악을 기준으로 나누지 말고 효율성과 생산성을 기준으로 보는 변화를 시작해야 할 듯싶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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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하얼빈역 그날의 총성 …116년 후 한국 민주주의
“한국의 민주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Can South Korea’s democracy survive)?” 미국의 국제정치 전문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즈 1월 27일자 최신호는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미국 사립 존 캐벗(Cabot) 대학 존 딜러리(Delury) 교수의 글을 실었다. 연세대에서도 강의한 일이 있는 딜러리 교수의 글에 포린 어페어즈는 “이 나라에는 단순한 위기관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개혁(Bottom-up Reform)이 필요하다”는 부제를 달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한국이 겪고 있는 정치·경제적 위기를 해결하려면 단순한 위기관리를 넘어선,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다는, 우리 국민들에게는 다소 고까운 부제를 달았다. 딜러리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이 12월 3일 한밤의 쇼킹한 TV 연설을 통해 선포한 비상계엄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윤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한국을 군사통치 아래에 놓겠다는 선언이었다”고 보았다. 윤은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키고,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정지시키려 했으며, 군부 지도자들에게 야당인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국회를 문 닫게 하라고 지시했다고 썼다. 그리고 경찰과 특전사를 보내 국회의원들의 의사당 진입을 막았다고 했다. 딜러리 교수는 윤 대통령이 이 비상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나치의 헌법학자였던 칼 슈미트(Carl Schmitt · 1888~1985)의 ‘예외 상태(state of exception)’ 이론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한밤의 비상계엄 선포 포고문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저는 이 비상계엄을 통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자유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켜낼 것”이라는 이유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딜러리 교수는 전했다. 윤 대통령은 실제로 한밤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국민의 자유와 안전, 그리고 국가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며 미래 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하고, “계엄 선포로 인해 자유 대한민국 헌법 가치를 믿고 따라주신 선량한 국민 여러분께 다소의 불편이 있겠지만 이러한 불편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딜러리 교수에 따르면 윤의 이 같은 논리 전개가 바로 칼 슈미트의 ‘예외상태’이론, 예외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권이며, 예외의 정상화를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이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는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딜러리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더 큰 권력을 확보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중요하며, 이에 관해서는 서울대 국제대학원 에릭 모브랜드(Mobrand) 교수가 쓴 <위로부터의 한국 민주주의(Top-Down Democracy in South Korea)>가 참고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에릭 모브랜드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한국의 엘리트들은 정치적 위기가 지나가면 민초(grassroot)들의 영향력을 제한해왔는데, 이제는 선거 과정이나 정당 시스템에 광범위한 민초들의 참여가 가능하도록 하는 개혁이 필요하며, 법률규정은 줄여야 한다고 딜러리 교수는 권고했다. 딜러리 교수가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을 통해 이런 권고를 한 데 대해 우리 정치인이나 학자들은 “누가 그걸 모르나”라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잘 돌아보면 국회의원을 뽑는 정당의 공천 시스템에만 해도 민초들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정당 대표가 주도하고 정당 지도자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선거구민 몇 천, 또는 몇 만명, 선거구민들의 서명을 받으면 공천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10월 29일 마지막으로 개정한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前文)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임시 의정원을 창설하고 의정원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낸 신석우(1895~1953) 선생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고 제안해서 조직의 이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정해졌고, 이에 따라 1948년 수립된 정부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상하이 임정 수립 당시 프랑스 조계(租界)에 위치해서, 일본과 중국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던 마당(馬當)로 뒷골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물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두 나라 정부의 협조 아래 잘 보존돼왔다. 지금은 중국공산당 제1차 당대회 개최 기념 건물이 가까이 있고, 중국 젊은이들에게 인기 높은 신톈디(新天地) 패션타운이 가까이에 있는, 지하철역 역세권에 위치해있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도 벌써 100년하고도 5년이 지났다. 그런 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이탈리아에 있는 서양 교수 딜러리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데 대해서 우리로서는 마음이 불편하다. 상하이 임정은 수립 13년 만인 1932년 4월 29일 임정 소속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시내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기념행사에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과 가와바다 데이지 상하이 거류민단 단장을 죽게 하고, 일본 육군 제9사단 사단장 우에다 켄키치 중장과 주중 일본공사 시게마쓰 마모루에게 다리를 절단하는 부상을 입혔다. 이 의거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항저우(杭州)를 거쳐 쓰촨(四川)성 충칭(重慶)까지 옮겨다니는 고생을 했지만, 당시 상하이에서 지하활동 중이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덩샤오핑(鄧小平)과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상하이 임정의 활동을 알리게 돼 임정의 이전과 충칭 정착에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임정이 수립되기 1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1879~1910)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러시아와 회담을 하기 위해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총살하는 의거에 성공했다. 이토는 일본 메이지(明治) 유신 유공자로, 초대 내각총리를 지냈으며 1895년 청일전쟁 승리를 마무리하는 시모노세키 조약과, 1905년 러·일 전쟁 종전조약 서명 당사자였다. 일본제국 헌법과 일본정치의 내각제 확립에 큰 역할을 한 이토는 이후 제5대, 제7대, 제10대 내각 총리를 지냈고, 초대 조선총독부 통감을 역임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이토가 일본의 조선 병합 주동자였고, 초대 조선총독부 통감을 지내며 조선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고, 조선인들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안 의사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 안 의사는 체포된 후 직업을 묻자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905년 이토는 조선 왕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주동자 역할을 맡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대한의군의 제1 제거목표가 됐다. 당시를 묘사한 영화 하얼빈에서 이토는 “내가 조선통감을 하는 동안 조선 경제를 얼마나 발전시켰는데 그걸 모르는 조선인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조선의 왕이나 지도층들은 실제로 조선인들에게 아무것도 베푼 게 없는데 조선 의병들은 나를 제거하려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 이토의 말은 고증된 것이 아닐 수도 있으나, 우리 민중들의 이토에 대한 생각을 대변하는 말일 수는 있을 것이다. 지난 25일 서울시내 한 개봉관에서 개봉된 영화 하얼빈에는 출연진이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기획이 있었다. 여기에 나온 한 출연진은 “안중근 의사가 어떻게 해서 되찾은 나라인데 요즘 우리 정치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을 해서 관객들의 호응을 받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2월 12일 자신이 계엄을 선포한 이유를 설명하는 3차 담화를 하면서 “지금 거대 야당은 국가 안보와 사회 안전까지 위협하고 있다…예를 들어 중국인 3명이 드론을 띄워 부산항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을 촬영하려다 적발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 스마트폰과 노트북에서는 최소 2년 이상 한국 군사시설들을 촬영한 사진들이 발견됐지만 외국인 간첩들을 간첩죄로 처벌할 길이 없다”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마오닝(毛寧)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국 측이 내정문제를 중국 관련 요인과 연관지어 이른바 ‘중국 간첩’이라는 누명을 꾸며내고, 정상적 경제 무역협력에 먹칠하는 데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비판했다. 윤 대통령이 밝힌 중국 관련 내용이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한 국가의 대권을 쥐고 있던 대통령이 자신의 계엄을 정당화 하기 위해 외교적으로 민감한 내용까지 무책임하게 공개해서 상대방 외교부 대변인이 항의를 제기한 것은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대권을 쥐고 있던 대통령 자신이 해결 못한 일을 야당의 책임으로 떠넘기려고 언급을 한 것은 우리의 국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독립투사들,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총살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살신(殺身)정신에 비추어보면 윤 대통령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하다. 계엄을 선포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체면을 내던지고 몸부림치는, 참으로 부끄러운 대통령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윤 대통령에게는 영화 하얼빈 한 출연진의 말 “우리나라가 어떻게 국권을 되찾아 지켜온 나라인데…”라는 말을 직접 들려주고 싶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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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트럼프-시진핑 시즌2 …갈등과 협력의 초한지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가 시진핑을 (1월 20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자신의 취임식에 참석해달라고 초청했다는데 나는 트럼프의 아이디어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 뉴욕타임스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난 24일자 1면에 실린 오피니온 칼럼에서 트럼프를 칭찬했다. 트럼프에 대해 좀처럼 긍정적인 보도를 하지 않는 미국의 정통 보수 신문의 대표적 칼럼니스트가 트럼프를 칭찬한 점이 흥미로워서 읽어보았다. 제목은 ‘Lessons from my China trip(중국 여행에서 얻은 교훈)’. 프리드먼은 자신이 최근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CBS 방송이 지난 12일 보도한 트럼프의 시진핑 초청에 대해 잘한 일이라고 생각됐다고 썼다. 프리드먼은 최근 자신이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현재의 미국과 중국 관계가 마치 두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가 빨대(straw)를 통해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가 시진핑을 취임식에 초청한 것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여행 기간 동안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에서 ‘전 중국 땅에 미국인은 나 혼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자신은 지난 30년 동안 중국을 왕래했지만 ‘전 중국에 미국인은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썼다. 베이징의 호텔 로비에서, 상하이의 기차역에서 미국인이 하는 영어 발음은 들을 수가 없었다. 여행하면서 만난 중국인들은 “내 아들딸들이 미국 가서 공부하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중국인 부모들은 자녀들이 미국에 공부하러 가면 미 FBI가 미행을 할 것이고, 중국으로 귀국하면 중국 정부가 미행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중국 대학의 교수들은 “미국 학생들도 더 이상 중국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전하고, 중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귀국하면 미국 직장에서 의심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프리드먼은 전했다. 그는, 주중 미 대사관 통계에 따르면 27만명이 넘던 중국 내 미국인 유학생 숫자가 현재는 1100명에 불과하며, 이 숫자가 10년 전만 해도 1만5000명은 됐다고 했다. 프리드먼이 중국 여행을 통해서 깨닫게 된, 거의 바닥으로 가라앉아있는 미·중 관계는, 1917년 1월 20일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4년과 2021년 1월에 취임한 바이든 행정부 4년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대중 정책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 중국 전문가는 마이클 필스버리였다. 미 허드슨연구소의 필스버리는 저서 <백년의 마라톤(Hundred-Year Marathon)>에서 “미국은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시진핑(習近平)에 걸쳐서, 그리고 1949년까지 100년 동안, 과거에도 속았고, 앞으로도 속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이 미국을 대체해서 글로벌 슈퍼파워가 되기 위한 비밀전략’이라는 부제가 붙은 <백년의 마라톤>은 제1장에서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삼십육계를 소개한다. “제1조는 만천과해(瞞天過海)로,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는 기만전술”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이 책을 쓴 필스버리를 “미국 최고의 중국 전문가”라고 평가하면서 중국과 관세전쟁과 환율전쟁을 벌였다. 트럼프 후임자인 바이든은 트럼프의 대중 정책을 이어받고 확장했다. 보복 관세부과는 물론이고, 미국과 중국의 산업 간 연관성을 끊는 디커플링(decoupling·탈 동조화) 전략을 추진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지난 11월 7일 트럼프의 두 번째 당선이 확정되자 시진핑은 축전을 보냈다. 시진핑의 축전은 축하와 위협의 뜻이 함께 포함된 것이었다. “역사가 알려주는 것처럼 중국과 미국은 서로 화합하면 양쪽 다 이익을 볼 것이고, 서로 싸우면 둘 다 상처를 입을 것(合則兩利 鬪則俱傷)”이라고 협박성 경고의 의미를 담아서 보냈다. 그러면서 “중국과 미국 쌍방은 상호존중과 평화공존, 상호 윈윈(win-win)의 원칙에 합의하자”고 제시했다. 시진핑은 지난 12월 11일 워싱턴에서 열린 USCBC(미중무역위원회) 2024년도 만찬 모임에 축사를 보내 트럼프 2기 미·중 관계의 기조를 다시 강조했다. 시진핑은 중국과 무역을 하는 미국 국내 270개 기업이 참여하는 이 미중무역위원회에 보낸 축사에서 “화합하면 양쪽 다 이익을 볼 것이고, 서로 싸우면 둘 다 상처를 입을 것”임을 다시 확인했다. “중국과 미국 관계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양국 관계의 하나이며, 양국 인민들의 이익과 인류의 앞날 운명이 달려있다. 두 나라가 화합하면 둘 다 이익을 볼 것이고, 서로 싸우면 둘 다 상처를 입을 것이니, 앞으로 양국 관계는 대항이 아닌 대화, 제로섬 게임이 아닌 호혜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중국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왕이(王毅) 정치국원 겸 국무위원은 지난 17일 지난 1년의 중국 외교를 되돌아보고, 앞으로를 전망하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서 왕이는 “중국의 대미 정책은 트럼프 취임 이후에 특별한 변화가 없을 것이며,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덕담을 했다. 그는 최근의 중·미 관계에 대해서는 “중·미는 최근 두 차례의 전략적 협의와 5차례에 걸친 금융·경제 분야 협력 회의를 개최했고, 마약과 기후변화 등의 분야에서도 협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칭화(靑華)대 국제관계 연구원 원장 옌쉐퉁(閻學通)은 지난 12월 20일 발행된 미국의 외교전문 계간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트럼프 2.0 시대의 미·중 관계 전망에 대해 기고를 했다. “트럼프 2.0 시대에도 트럼프의 ‘미국 우선(America First)’ 정책의 위세가 대단하겠지만, 이에 대해 중국 지도자들은 전혀 겁먹지 않고(not scared) 있다.” “중국과 미국의 경쟁은 더욱 격렬해지겠지만 냉전 시대와 같은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옌쉐퉁 원장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강렬한 반공의식을 가진 매파 상원의원 마르코 루비오를 국무장관으로, 미 육군 소령 출신의 피트 헤그세스를 국방부 장관으로 내정하기는 했지만, 트럼프는 미·중간의 군사력 경쟁보다는 무역 경쟁에 주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옌쉐퉁은 “그러나 트럼프 당선자가 첫 번째 임기 때 중국을 ”미국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비난하고, “중·미간 거대한 무역적자 때문에 미국의 핵심 공업지대가 공동(空洞)화 됐다”고 주장했으며, “코로나 병원체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편 데 대해서는 중국 사람들이 아주 못마땅해 하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 중·미 간 교류에 장애 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특히 “중국이 펜타닐 마약으로 미국을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는 심각한 불만을 품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의 그런 주장들은 미국과 중국 국민 사이의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칼럼 ‘중국 여행에서 얻은 교훈’에서 트럼프가 주중 미국대사로 조지아주 상원의원 출신의 데이비드 퍼듀를 내정한 데 대해 “퍼듀 주중대사 내정자는 오늘의 중국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퍼듀는 지난 9월 워싱턴 이그재미너(Examiner)지 기고에서 “분명한 것은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목표가 국제사회의 패권을 쥐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전 세계를 마르크시즘의 세계로 바꿔놓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퍼듀의 그런 중국 인식은 바뀌어야 한다”면서 프리드먼은 “오늘의 중국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마르크시스트가 되기보다는 전기자동차 테슬라를 만든 일론 머스크처럼 되고 싶은 머스키스트(Muskist)가 더 많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현대 중국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겨 미국을 자본주의 국가에서 마르크시즘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이기려고 한다는 사실을 주중 미국대사 내정자는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칭화대 중국경제 사상과 실천 연구원 원장으로 하버드 대학 박사 출신의 리다오쿠이(李道葵) 교수는 “많은 중국 사람들은 트럼프를 중국 개혁개방 지도자 덩샤오핑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유는 덩샤오핑이 경제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점을 중국인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 것처럼 트럼프도 모든 것을 경제로 연결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이 그리 나쁜 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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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새로운 한중관계를 위한 역사 다시 읽기
1394년 9월 조선 태조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조공 사절단을 이끌고 명나라 수도 난징(南京)에 갔을 때 일이다. 이 이야기는 박원호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80)가 2002년에 펴낸 ‘명 초 조선관계사 연구’에 나온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이방원에게 뜬금없이 “앞으로 조공할 때 표문(表文)을 올리지 말라”고 했다. 표문이란 조선 왕이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보낼 때 그 이유를 적은 글이었다. 주원장이 이방원에게 앞으로 표문을 올리지 말라고 한 이유는 나중에 알아보니 이방원 일행이 올린 표문 속에 “괴이한 글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이방원 일행은 주원장에게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는 데에는 표를 바침으로써 작은 정성이나마 전달할 수 있는데 어찌 표를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다음 해인 1395년 10월 다시 조선에서 조공 사절이 가서 표문을 주원장에게 올렸다. 주원장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죄하러 온 사신이 돌아가자마자 짐을 모욕하는 글이 또다시 올라오니 너희를 징벌할 수밖에 없다. 표문은 너희들이 쓴 것이 아니라 정도전(鄭道傳)이 썼을 터이니 정도전을 난징으로 오라고 하라.” 주원장은 조선 사절들을 감옥에 집어넣고 그중 한 명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정도전을 데리고 오라고 억지를 부렸다. 조선 태조는 명나라에 “표문을 쓴 것은 정도전이 아니며 정도전은 현재 병이 깊다”고 알리면서 끝내 주원장의 요구를 따르지 않았다. 이 표전사건은 사건 발생 4년 만인 1398년 주원장이 조선 사절 3명을 처형한 뒤에야 가라앉았다. 조선과 명 초에 두 나라 사이에 가장 큰 문제였던 표전사건은 나중에 조선이 명 황제 주원장 주변에서 일어난 ‘문자의 옥(獄)’이라는 스캔들을 몰랐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이 밝혀졌다. 주원장은 명 앞의 왕조인 원(元)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 때 탁발승으로 유랑걸식하며 지내다가 명나라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런 주원장은 황제에 오른 뒤 탁발승의 대머리를 상징하는 광(光), 독(禿)이라는 글자와 중을 가리키는 승(僧)은 물론 발음이 비슷한 생(生)이라는 글자, 홍건적 시절을 암시하는 적(賊)이라는 글자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조선 왕실이 그런 ‘문자의 옥’ 스캔들에 대한 정보에 어두워서 일어난 사건이 표전사건이었다고 박원호 교수의 ‘명 초 조선관계사 연구’는 밝혀 놓았다. 1392년 건국한 조선 왕조는 건국 후 503년 동안 명맥을 이어오다 1895년 청과 일본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국망(國亡)의 길로 들어섰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북양(北洋) 통상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서명한 종전(終戰) 조약의 제1조는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독립국임을 인정하며, 조공 등 전례는 폐지한다’고 되어 있었다. 조선은 다시 10년 뒤인 1905년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체결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한다. 포츠머스 조약의 제2조는 ‘러시아 제국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정치·군사·경제적인 이익을 소유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조선은 다시 5년 뒤인 1910년 전쟁 한번 벌이지 않고 일본제국에 병합됐다. 그로부터 82년이 흐른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사이에 체결한 ‘한·중 수교 공동성명’은 과거 조선과 명·청 간 조공관계와 비(非)대칭적인 관계를 넘어선 대등한 주권 국가 간 외교관계 수립을 분명히 한 조약이었다. 조약의 제2조는 ‘대한민국 정부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유엔헌장의 원칙들과 주권 및 영토보전의 상호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과 호혜, 그리고 평화공존의 원칙에 입각하여 항구적인 선린우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것에 합의한다’고 선포했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 왕조들 사이에 천하 중심과 주변국 관계, 명과 청을 거치면서 확립된 조공 관계를 역사적으로 처음 완전히 털어낸, 주권 국가와 주권 국가 간 대등한 조약이었다. 조약의 제3조는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되어 있었다. 제4조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도 확인했다.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과 중국 대륙의 역대 왕조들 간 관계는 중국 역사를 지배한 유교 철학에서 나온 화이론(華夷論)과 천하(天下) 체계에 따른 중심과 주변의 관계였다. 중국은 천하의 중심인 중화(中華)이고, 한반도의 왕조들은 변두리에 사는 오랑캐(夷)라는 구조였다. 그러나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재구성된 국제질서 아래에서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과 1949년 10월 1일 정부가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는 30년 전쟁 종전 이후 유럽 국가 간 관계를 정립한 1648년 베스트팔렌(Westphalen) 조약에 따른 주권 국가와 주권 국가의 독립적인 관계였다. 유엔 회원국들 사이의 현대적인 국가관계의 기본원칙은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주권 국가와 주권 국가의 관계는 국토의 면적과 인구의 많고 적음, 국력의 강약과 관계없이 대등한 관계라는 원칙이 적용된다.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한·중 수교 공동성명도 베스트팔렌 조약의 원칙에 따른 현대적인 국제관계다. 천하의 중심과 변두리 사이의 화이론은 이미 과거의 것이다. 대통령실 웹페이지에 따르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5일 페루 리마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만나 자신의 한국 방문 계획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시 주석은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국을 방문할 수 없었지만 코로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윤 대통령의 방한 초청에 기쁘게 응할 것이라고 하고, 상호 편리한 시기에 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대통령실이 전하는 시진핑의 말을 분석해 보면 ‘내년 경주에서 개최될 예정인 APEC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니 그전에 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주면 좋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32년간 1대 1에 가까운 정상(頂上) 방문 관계를 유지해 왔다. 1992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1994년 3월 김영삼 대통령 방중,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 방중, 2003년 7월 노무현 대통령, 2008년 5월 이명박 대통령,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 순서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1995년 11월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방한했고, 2008년 8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부산 APEC 참가차 방한했으며, 2014년 7월에는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방한했다. 두 나라 정상들은 대체로 임기 내에 한 차례 상대국을 방문했고, 베이징올림픽이나 핵안보 정상회의 등 상대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국제회의 참가차 방문했다. 상대국 정상과의 회담은 주로 APEC이 열리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부주석이던 2009년 12월에도 서울을 방문해서 정운찬 총리와 회담을 한 기록을 남겼다. 두 나라 외교당국 기록에 따르면 한·중 간 정상 방문은 해당 대통령이나 국가주석 임기 내에 한 차례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시진핑 주석은 부주석 시절에 서울을 한 차례 방문했고, 박근혜 대통령 시기에 국가주석으로서 서울로 정상방문을 한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시진핑 주석은 내년 가을 경주 APEC 때 방한하게 되면 세 번째로 방한하는 셈이 된다. 윤 대통령이 내년 경주 APEC 이전에 방중하느냐 이후에 방중하느냐의 문제는 시진핑 주석 방한 기록으로 볼 때 엄격히 따질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페루 APEC 참석길에 들른 브라질에서 현지 신문과 서면으로 인터뷰하면서 "한국에 있어 미국과 중국 양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고 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말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며 특히 중국만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해야 정확할 것이다. 과거 명과 조공 관계를 맺고 있던 시절에 조선이 명 황제 주원장에게 갑질을 당한 표전사건을 생각하면 미국을 버리고, 중국만을 선택할 일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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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시진핑 정치 권력은 '피크' …통치 능력은 '의문'
“시진핑의 권력은 이미 정점(頂点·Peak)에 도달했나?” 미국 정치학자 할 브랜즈(Hal Brands) 존스 홉킨스대 교수와 마이클 베클리(Michael Beckley) 터프츠대 교수가 2022년에 제시한 개념이 ‘Peak China(정점에 도달한 중국)’였다. 두 교수는 공동저서 <중국은 어떻게 실패하는가(Danger Zone : The Coming Conflict with China)>에서 '중국 경제의 성장세는 정점을 지나 하락세에 접어들었다'는 뜻으로 ‘Peak China’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2022년에 중국의 경제성장률과 출생률이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자 피크 차이나(Peak China)라는 개념이 제시된 것이었다. 미 스탠퍼드 대학 후버연구소가 발행하는 중국 전문 온라인 계간지 차이나 리더십 모니터 가을호에는 중국 경제에 관한 ‘Peak China’의 개념을 활용한 ‘Peak Xi Jinping’이라는 개념이 제시됐다. 중국 최고 권력자 시진핑(習近平)의 정치 권력이 이미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들어섰다는 논리를 ‘Peak Xi Jinping’은 담고 있다. 논문의 필자는 미 스탠퍼드 대학 중국 정치경제 전문가 구오광 우(Guoguang Wu · 吳國光)로, 우 교수는 1980년대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평론원으로 일하다가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미국으로 망명한 중국인이다. 우 교수는 2020년 10월 중국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에서 전례가 없는 3연임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시진핑이 정치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의 통치능력(Governance Capability)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전개하면서 ‘Peak Xi Jinp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우 구오광 교수에 따르면, 시진핑 3연임 이후 중국경제성장률은 2.24%(2020년) > 8.45(2021) > 2.99(2022) > 5.20(2023) > 4.70 (2024. 1 ~ 6월)로, 2020년 3.71% 감소, 2022년 5.46% 감소, 2024년 1.5% 감소를 기록했다. 시진핑 정부는 2021년 6.25% 증가, 2023년 2.21% 증가를 기록했으나, 경제성장률이 감소한 해가 증가한 해보다 많았다. 물론 사이에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 끼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시진핑의 통치능력에 대한 중국 인민들의 기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시진핑이 주관하는 반부패 드라이브로 인해 처벌당한 관리들의 숫자도, 각급 검찰과 기율검사 기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1600명에서 2022년 2300명으로 늘어났고, 2024년 올해의 경우 상반기에만 1만2400명이 처벌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랜 기간의 반부패 드라이브에도 적발 건수는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 시진핑 자신이 말하는 ‘세계 중심 국가’의 대열에는 올라서지 못하는 부패 만연 국가라는 기억에서 인민들이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우 구오광 교수는 진단했다. 2012년 당 총서기에 취임한 이후 2022년 10월 3연임에 이르기까지 시진핑은 엄청난 크기의 정치 권력 강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시진핑이 보여준 통치능력은 집중된 정치 권력의 크기만큼 유효하지 못했다고 우 교수는 진단했다. 시진핑이 보여준 정치 권력 강화와 통치능력 사이의 괴리는 왜 발생하는 걸까. 그 이유는 중국공산당 정치의 특질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 우 교수의 분석이었다. 현재의 중국공산당 정치구조로는 시진핑이 정치 권력을 강화할수록 통치능력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모순적 현상은 이른바 당의 지도자가 정치 권력을 집중시킬수록 통치능력의 4가지 측면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를 ‘네 가지 i’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 정치 권력이 강화될수록 바닥에서 당의 결정권자들에게 전달되는 정보(information)의 흐름이 줄어들고, 당의 정치 권력 보유자들이 나누어 가질 인센티브(incentive)가 줄어들며, 이 때문에 당 내부의 정책 집행(implementation)이 더 많이 방해를 받게 되며, 결과적으로 당원들이 정책을 주도적으로 실행하는 능력(initiative)도 낮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우 구오광 교수의 이런 역설적이면서도 모순적(paradoxical)인 진단은 시진핑 자신의 연설에서도 나타났다. 시진핑은 중국공산당의 이런 내재적 문제점을 ‘당 관료들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웨이관 부웨이(爲官不爲)’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연설을 통해 지적해왔다. 시진핑은 지난달 26일의 ‘당면한 경제형세 분석을 위한 중앙당 정치국 회의에서도 “당원 간부들은 고수준의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성과 창조성, 추동력을 발휘해야 하며 이른바 세 가지 무능력을 극복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시진핑이 극복을 촉구한 ’세 가지 무능력(三個區分開來)‘에는, 능력이 부족해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불능위(不能爲)‘와 일을 추진할 동력이 부족해서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 ‘불상위(不想爲)‘, 그리고 일을 담당할 용기가 부족한 ’불감위(不敢爲)‘가 있다면서, 시진핑은 이 세 가지 무능력의 극복을 촉구했다. 시진핑은 지난 7월 30일에도 당면한 경제형세 분석을 위한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서 “형식주의의 극복”을 촉구하면서 “형식주의와 관료주의는 우리 당의 고질병으로, 반드시 큰 힘을 모아 치료를 해야 하며, 당 중앙의 정책 결정 부서들은 ’최후의 1㎞‘를 간다는 정신으로 형식주의와 관료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시진핑은 이 정치국 회의 직후에는 중국공산당의 결정을 전 사회로 확산시키기 위한 ’당외(黨外)인사 좌담회‘를 갖는 자리에서,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뿐만 아니라, 시진핑 본인으로서도 처음으로 현 중국 경제에 문제가 있다는 고백을 했다. “당면한 우리나라 경제는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련의 곤란한 문제들에 부딪혔다. 물론 이 문제들은 발전과정이나 경제의 틀을 바꾸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들로, 노력을 통해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는 발전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문제와 도전에 대처해서 중국 경제의 광명론(光明論)을 노래 불러야 할 것이다.” 중국의 정치와 경제를 중국 내부에서 관찰 보도하는 ’미국의 소리(VOA)’와 영국 BBC TV, 일본 닛케이(日經) 등이 만든 유튜브들은 시진핑 체제의 통치능력이 중국 경제 문제 해결에서 제대로 해결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 쩡칭홍(曾慶紅) 전 정치국 상무위원과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를 비롯한 당의 원로들이 시진핑에 대해 비판적인 충고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유튜브들은 특히 지난 8월 초순 시작된 허베이(河北)성 해변 휴양지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시진핑이 참가한 회의가 열려 이 자리에서 시진핑이 당 원로들로부터 비판적인 충고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 원로들은 특히 시진핑의 정치 권력과 통치력이 사회주의 시장경제 이론을 바탕으로 한 지난 40년간의 중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감쇄시키는 점에 대해 집중 언급했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와 정치를 관찰하는 대만 유튜브들은 “1953년생으로, 71세가 된 시진핑이 74세가 되는 오는 2027년 가을의 제21차 전당대회에서 4 연임의 당 총서기에 오르기에는 건강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전망을 하고 있다. 체중 과다로 인한 통풍을 앓고 있어 해외 정상방문을 할 때 비행기 트랩을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종종 건너뛰는 불편함을 보여주는가 하면, 국내 시찰을 할 때도 걸음걸이가 불편해서 한쪽 다리를 끄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라고 한다. 이 때문에 오는 2027년 당 대회 때는 어떤 형태로든 후계자 지정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이 후계자 지정에서 1959년생으로 오는 2027년 68세가 되는 리창(李强) 총리가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지목되고 있다고 대만 유튜브들은 전망했다. 리창 총리는 베트남 공산당의 초청으로 지난달 12일부터 사흘간 베트남과 라오스를 공식방문했으며, 중국공산당 내부사정에 밝은 베트남 공산당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시진핑 국가주석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와 같은 수준의 의전으로 리창 총리를 접대한 점에 대만 유튜브들은 주목했다. 대만 유튜브들은 리창 총리와 함께 1962년생으로 오는 2027년 65세가 되는 딩쉐샹(丁薛祥) 정치국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 국가주석판공실 주임도 시진핑의 후임으로 선출될 가능성을 제시하고도 있다. 이와 함께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과거 시진핑의 후계자로 지목해두었던 후춘화(胡春華)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 2027년 당 대회 이전에 복권되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복귀할 경우 시진핑의 3연임 정치는 폐지되고, 과거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회귀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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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현대판 실크로드와 중국인이 만드는 이탈리아 명품… "Made in Italy by Chinese"
“Made in Italy by Chinese.”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더욱 유명해진 ‘명품 핸드백’ 크리스찬 디올 가방을 이탈리아에서 중국인들이 만들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탈리아 밀라노 법원은 지난 6월 10일 판결문을 통해 프랑스 브랜드 디올 가방 가운데에는 이탈리아 내 하청업체에서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의 노동착취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고 고발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보도했다. 밀라노 법원은 34쪽의 판결문을 통해 “이탈리아 내 하청업체들이 중국인 불법체류자들을 고용해서 디올 매장에서 2600유로(약 380만원)에 팔리는 핸드백을 원가 53유로(약 8만원)에 제작해서 넘겼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핸드백과 구두, 패션 의상 등 많은 이탈리아 명품들이 밀라노와 프라토(Prato)의 제조공장에서 합법적으로 이탈리아에 체류하고 있는 많은 중국인들의 손에서 제작되고 있다. 이탈리아 중부 투스카니(Tuscany)주 최대 도시인 프라토는 19세기 들어 섬유산업 중심지로 자리 잡아 ‘이탈리안 맨체스터’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고대의 실크로드를 부활하겠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One Belt One Road)’ 프로젝트를 2014년 공식 선포한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프라토시 인구 통계에 따르면 2008년 9927명이던 중국인 합법 체류자 숫자는 13년 만인 2021년 12월 31일 기준 2만7829명으로 3배로 불어났다. 프라토시 전체 인구가 2024년 1월 1일 기준 19만8034명인 사실에 비추어보면 프라토시 중국인 거주자의 비율은 지난 10여 년 사이에 급격히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들 프라토시의 중국인 거주자들은 주로 파리 차이나타운에 거주하던 원저우(溫州) 출신 중국인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원저우 출신 중국인은 지난 6월 18일에는 프로토 시내 화교호텔에서 원저우시 원청(文成) 현 동향회를 열었고, 이 동향회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독일에 거주하는 화교, 화인(華人) 대표를 포함한 7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현지 중국 인터넷 매체가 전했다. 이 모임에는 패션 명품 업체 페라가모 총재 살바토레 페라가모와 프라토시 부시장 페데리카 팔랑가(Federica Palanga)도 참석했다. 현재 프로토 시내 7000여 개의 명품 생산 업체 가운데 5000여 개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핸드백과 구두, 패션 명품 의상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3100개 업체들은 중국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것으로 프라토 상공회의소에 등록되어 있다. 프라토시의 중국인들은 2019년 총선에서 2명의 시의원을 당선시켜 정치적 배경도 마련 중인 것으로 진단된다. 프라토보다 먼저 1920년대부터 저장(浙江)성 원청현에서 출발한 이민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밀라노에는 2011년에 중국인 숫자가 2만명을 넘겨 이탈리아 최대의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명품 패션 브랜드와 가방 등 생산에 종사하는 밀라노 거주 중국인들은 ‘메이드 인 이탈리아 바이 차이니즈(Made in Italy by Chinese)’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이들 밀라노의 중국인은 밀라노의 중심가 비아 파올로 사피(Via Paolo Sarpi) 노변에 중국어 간판을 단 헤어 살롱과 패션 부티크, 실크와 가죽 스토어에 여행사와 약국, 안마소가 보이는 거리 모습을 형성해 놓았다. 중국 사람들이 ‘탕런제(唐人街)’로 부르는 차이나타운에는 중국 관영 영어신문 차이나 데일리 유럽판 편집실까지 자리 잡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일대일로’ 프로젝트 추진을 통해 이탈리아 진출을 강력히 추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탈리아가 과거 고대 실크로드의 서쪽 끝이었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실크는 중국 동쪽 장강(長江) 하구의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에서 생산되어 장안(長安·지금의 시안·西安)으로 옮겨져 실크로드를 타고 낙타에 실려 중앙아시아를 넘어 이탈리아 로마까지 판로가 개척돼 있었다. 고대부터 로마 황제와 귀족들이 입던 옷은 장강 하구에서 생산된 비단이었고 비단은 중국 역대 왕조들의 최고 수출품이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이탈리아 진출에 공을 들이는 또 다른 이유는 이탈리아가 유럽국가로 G7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탈리아와 교류함으로써 G7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간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주세페 콘테(Giuseppe Conte) 총리와 정상회담하면서 시진핑 주석은 “중국과 이탈리아는 고대 실크로드의 양쪽 끝에 위치해 있는 만큼 윈윈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일대일로 협력으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천경지의(天經地義·천지의 대의)에 따라 양국 관계를 건설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이탈리아와의 특수한 관계를 활용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방에 양국 교역 강화를 위한 항구를 건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주세페 콘테 총리는 “시진핑 주석의 이번 로마 방문은 중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는 역사적인 기회를 잘 확보하기 위해 중국의 'One belt One road'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회담 후 두 나라 정상은 일대일로 사업 공동 추진을 위한 양해 비망록을 작성했다. 두 나라 정상은 역사를 통해 중국이 유실한 중국 문화재 796건을 전시한 박람회에 참석했다. 시진핑 주석은 연설을 통해 “15세기에 이탈리아 모험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실크로드를 넘어 중국과 유럽 문명의 교류 통로를 연 것은 중국과 이탈리아 우호의 교량을 건설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4년 후인 2023년 12월 좌파 총리인 조지아 멜로니(Giorgia Melony)는 “이탈리아가 중국의 'One belt One road'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실수”라면서 일대일로 사업에서 탈퇴한다고 선포했다. 4년 전과는 달리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에 대한 외교와 경제, 군사 분야에서 봉쇄정책을 전개하는데 G7 국가로서 자신들만 유럽에서 역행하는 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는 미국이 영국을 통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도록 가하는 압력 때문에 탈퇴한 것으로 진단됐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중국에 등을 돌린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탈퇴를 선언했던 멜로니 총리는 7개월 만인 지난 7월 29일 시진핑 주석의 초청으로 베이징(北京)을 방문했다. 멜로니 총리는 중국과 이탈리아가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체결한 20주년 기념과 마르코 폴로 사망 700주년을 기념해서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과 마주 앉았다. 시진핑은 멜로니 총리에게 “중국과 이탈리아는 과거 실크로드의 양쪽 끝에 위치해서 동서 문명 교류와 인류사회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면서 “양국이 정세 변화가 심한 국제사회에서 실크로드 정신에 따라 협력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멜로니 총리는 “두 나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20주년과 마르코 폴로(1254~1324) 서거 700주년을 맞아 국제 정세가 심각하게 변화하는 가운데 고 문명국 간에 협력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말하고 “전기차 분야와 AI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시진핑과 멜로니는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 수립 20주년을 맞아 2027년까지 두 나라가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행동계획’에 서명했다. 두 나라는 이 행동계획을 통해 금융과 과학기술, 기후변화 대처 등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지난 3월 이탈리아와 중국은 13세기 유럽에서 중국 대륙으로 처음 여행을 한 모험가 마르코 폴로 사망 70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를 공동 주최로 개최했다. 마르코 폴로는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으로 1272년부터 1292년까지 20년간 중국 각지를 여행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와 중국에 관한 각종 문물을 소개했다. 베니스에서는 지난 8월에도 마르코 폴로 기념 전시회가 열려 마르코 폴로가 직접 필사체로 쓴 ‘동방견문록’을 전시했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중국 여행기에서 쑤저우(蘇州)를 '동방의 베네치아'라고 불러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소개했다. 이처럼 ‘실크로드 정신’을 강조하며 서로 가까워지는 중국과 이탈리아는 프라토와 밀라노 등 이탈리아 명품 생산도시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민을 늘어나게 해서 'Made in Italy by Chinese', 중국인이 생산하는 이탈리아 명품 생산의 비중을 점점 높여 가는 추세를 보여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전기자동차와 드론, 백색가전, 양자 컴퓨터, 우주산업 등에 이어 지구촌의 패션 명품 시장까지 생산 점유율을 높여 갈 태세다. <로마·밀라노·베네치아=박승준 논설주간>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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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뜨는 싱가포르…저무는 홍콩
1997년 7월 1일 오후 1시 30분 홍콩 컨벤션 앤 엑시비션 센터(香港會議展覽中心),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전 세계를 향해 선포했다. “홍콩이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중국 인민들이 침략당한 1백년의 국치를 설욕하고, 홍콩과 조국 내지(內地) 공동 발전의 신기원을 연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27년, 홍콩은 ‘동방의 진주(東方之珠)’로서의 빛을 잃어가고 있고, 홍콩에서 남서쪽으로 2500㎞ 떨어진 싱가포르의 빛이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싱가포르는 홍콩, 한국, 대만과 함께 NICS(New Industrializing Countries)로서, 서양 사람들의 입에 ‘네 마리의 호랑이(Four Tigers)’라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중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큰 용이 될 것이라는 뜻에서 ‘네 마리의 작은 용(四小龍)’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서도 싱가포르와 홍콩은 함께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해서, 영어가 통용되는 데다가, 영국이 세워놓은 ‘법치(Rule of Law)’에 따른 상거래 보호가 잘 된다는 점에서 자유무역 중계지로서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세계은행(World Bank) 통계에 따르면, 중국이 영국으로부터 홍콩의 주권을 넘겨받은 직후인 2000년 홍콩의 GDP는 1716억7000만 달러(current $ 기준)였고, 싱가포르는 960억8000만 달러로 홍콩의 경제 규모가 싱가포르의 2배에 가까운 규모였다. 1인당 GDP도 홍콩이 2만5756달러로 싱가포르의 2만3852달러보다 약간 앞서있었다. 인구는 홍콩 666만5000명에 싱가포르는 402만7877명으로 홍콩이 다소 많았고, 외국인 직접 투자(FDI)도 홍콩이 GDP의 41.1%였던 데 비해 싱가포르는 GDP의 16.1%에 불과한 규모로, 여러 가지 면에서 홍콩이 싱가포르를 앞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20여 년이 흐른 2023년 현재 싱가포르가 모든 면에서 홍콩을 앞지르는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GDP는 홍콩 3820억5000만 달러에 싱가포르는 5014억3000만 달러, 1인당 GDP는 홍콩 5만696.6달러에 싱가포르는 8만8428달러로 격차가 벌어졌다. 외국인 직접투자(FDI) 규모도 홍콩이 41.1%에서 34.1%로 줄어든 반면. 싱가포르는 16.1%에서 29.8%로 비중이 커졌다. 현재 인구는 홍콩이 753만6100명, 싱가포르는 591만7648명으로 홍콩이 다소 많은 정도다. 그러나 이런 하드웨어적인 수치 말고 법제와 사법 시스템이 보장하는 경제자유도라는 기준에서 홍콩과 싱가포르 사이에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전 세계 지역과 국가들의 경제 자유도를 조사해 온 캐나다 몬트리올의 프레이저 연구소(Fraser Institute)의 조사 결과, 홍콩과 싱가포르가 60여 년간 유지해 오던 홍콩 우위의 질서가 지난해에 처음으로 역전됐다. 사법의 독립 정도, 법원의 독립성, 사법적 통일성, 정치적 자유도 등을 측정한 수치에서 프레이저 연구소는 지난해에 사상 처음으로 “싱가포르가 홍콩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자유경제지역(World’s freest economy)인 것으로 조사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경제적 자유도가 변하는 사이에 홍콩과 싱가포르에 설립된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 지역본부 사무소의 숫자도 변화했다. 지난 2월 발표된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싱가포르에는 4200개의 다국적 기업 아시아 지역본부가 설립돼 있고, 홍콩에는 싱가포르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336개의 다국적 기업 아시아 지역본부가 설립돼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싱가포르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와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자동차 제조사 롤스로이스와 제너럴 모터스가 아시아 지역본부를 설립해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인터넷 플랫폼 기업인 틱톡과 쉬인도 싱가포르에 아시아 지역본부를 설치했으며, 알리바바와 화웨이는 싱가포르 사업 규모를 확장 중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다국적 기업들은 싱가포르의 법인세율이 17%로, 홍콩의 법인세율 16.5%보다 다소 높지만, 특정 기업을 대상으로 13.5%까지 낮춰주는 탄력적인 법인세율 정책의 수혜자가 되는 것을 겨냥해서 싱가포르에 아시아 지역본부를 두고 있다고 지난 2월 22일 발표된 블룸버그 인텔리전스 보고서는 진단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개혁개방 정책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1997년 사망)과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가 1979년에 합의한 홍콩 반환 원칙에 따라 1997년 7월 1일에 실현된 홍콩의 주권 반환 당시 발효한 ‘홍콩기본법(Hong Kong Basic Law)’의 정신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일국양제(一國兩制·One Country Two Systems)’ 원칙에 따라 발효한 홍콩 기본법 제5조는 “홍콩특별행정구는 사회주의 제도와 정책을 시행하지 아니하며 원래의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최소 50년 동안 변동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돼 있었으나 이 합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주권 반환 후 50년의 절반도 안 지난 2020년 7월부터 시행된 ‘국가안전 유지법’과 2024년 3월에 홍콩입법회가 통과시킨 ‘국가안전수호 조례’는 홍콩의 자유경제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자유경제 체제 유지에 필수적인 ‘법의 지배(Rule of Law)’가 무력화됐다. 자유경제 체제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인 공정한 사법 적용 원칙이 무너지면서 홍콩에는 이른바 ‘퉁로완(銅鑼灣) 서점 사건’이 발생해서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게 됐다. 이 서점 관계자 5명이 지난 2015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실종됐다가 보름 또는 3개월 후에 중국으로 납치된 것으로 밝혀져 홍콩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서점이 출판 판매하려던 ‘시진핑과 여섯 명의 여인(Xi and Six Woman)’, ‘시진핑의 애인들(The Lovers of Xi Jinping)’은 결국 출판 판매되지 못했다. 이 퉁로완 서점은 홍콩에서 문을 닫고 현재는 대만 타이베이(臺北)로 이전해서 개업했다고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新聞)가 타이베이발로 전했다. 홍콩이 가장 자유로운 자유경제 지역의 지위를 상실한 것은 중국 내 정치 상황의 변화 때문이다. 2020년 10월 24일 중국 최초의 인터넷 플랫폼 기업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馬云)이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한 금융 심포지엄에 나가 “중국의 은행들은 전당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강도 높은 비판을 한 뒤 실종됐다. 이후 마윈은 실종 상태에 빠져있다가 2년 후 알리바바와 지주회사 앤트 그룹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2022년 10월 16일 개막된 제20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의 정치 규칙인 3연임 금지를 깨고 당 총서기 자리에 눌러앉는 정치적 사건을 만들어냈고, 시진핑의 3연임을 전후해서 중국 정치에는 ‘공동부유(共同富裕)’ 같은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정치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중국 내의 그런 분위기를 피해 많은 중국 부자들이 싱가포르로 탈출하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해 2월 27일 “2022년 말까지 싱가포르에는 약 1500개로 추정되는 중국 부자들의 개인사무소가 싱가포르에 문을 열었다”고 보도했다. 싱가포르는 AMCHAM(주한 미 상공회의소)이 지난 3월 국제적인 다국적 기업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아시아지역 본부 설치 선호도 조사에서 가장 선호도가 높은 도시인 것으로 조사됐다. 약 5000개의 다국적 기업들이 아시아 지역본부를 싱가포르에 설치하는 것으로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고, 홍콩은 1400개 정도의 다국적 기업들이 아시아 지역본부 설치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에 아시아 지역본부 설치를 희망하는 다국적 기업은 거의 없었다. 다국적 기업들이 아시아 지역본부 설치를 희망하면서 고려하는 사항은 지정학적 역동성, 공급망의 탄력성, 비즈니스와 생활 비용, 시장의 근접성, 조세 부담 등인 것으로 조사됐다. “홍콩에서 탈출한 중국의 부(富)가 향하는 곳이 대부분 싱가포르이지 한국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한국의 비즈니스 조건을 개선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AMCHAM은 충고한 것이다. 요즘 우리의 사법 시스템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점이나, 정치인과 관리들이 부패한 정도도 다국적 기업들이 아시아 지역본부 설치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고려 요소라는 점을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의 금융허브였던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된 1997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2000년 10월에 개봉한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영화가 있었다. 남자 주연은 룅치우와이(梁朝偉·Leung Chiu-Wai)에 여자 주연은 쵱만육(張曼玉·Cheung Man-Yuk)이었고, 두 배우 모두가 1960년대 초에 홍콩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성장한 홍콩사람이었다. 이 두 배우의 이름을 요즘 중국사람들은 ‘맨더린(Mandarin·北方官話)’이라는 중국 표준어 발음으로 ‘량차오웨이(Liang Chaowei)’와 ‘장만위(Zhang Manyu)’라고 부른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 홍콩에 거주했던 필자에게는 서양사람들이 ‘캔토니즈(Cantonese)’라고 부르던 광둥어(廣東語) 발음으로 두 남녀 주인공의 이름을 들어야 그 이미지가 제대로 떠오른다. “꽃 같은 시절”이라는 영화제목처럼 룅치우와이와 쵱만육 두 배우는 몸에 착 달라붙는 재킷과 치파오를 입고 홍콩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숨막힐듯한 홍콩의 40대 기혼남녀의 불륜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을 피해 싱가포르로 도망간다. 이 두 배우가 영화 속에서 만나던 호텔 방번호는 ‘2046’이었다. 1997년부터 일국양제(一國兩制)로 보존되는 50년의 마지막 해가 2046년이다. “Are you Chinese?”라고 물으면 “No, I’m Hong Kong people”이라고 대답하던 홍콩사람들이 빚어내던 화양연화 같은 홍콩의 기억은 아무래도 2046년이 채 되기도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판이다.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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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동북아 '신냉전' 시대 … 한·중·일 '3국 협력' 강화해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의 제4조는 이른바 ‘자동개입 조항’이었다. “쌍방중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 련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 북한 김정은과 러시아 푸틴이 체결한 이번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은 63년 전인 1961년 7월 6일 체결한 ‘조소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 조약’을 재현한 것이다. 이 조약은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북한의 김일성 내각 수상이 모스크바에서 서명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제1조에는 “체약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국가련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지체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온갖 수단으로써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961년에 체결한 조소 우호협조 상호원조 조약과 이번에 체결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의 차이점은, 이번에 체결한 조약에 ‘유엔헌장 제51조와 북한과 러시아의 국내법에 준하여’ 군사원조를 제공한다는 조항이 추가돼있다는 점뿐이다. 유엔헌장 제51조는 유엔 회원국인 국가에 무력 공격이 이뤄질 경우 이에 대해 집단 자위권을 포함한 자위권을 행사할 권리를 규정한 조항이다. 북한과 러시아가 포괄적 전략동반자 관계 체결을 발표하자 우리 외교부는 24일 미국 일본 정부와 공동으로 ‘러·북 협력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방문 계기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을 통해 강조된 러·북 파트너십의 발전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국제 비확산 체제를 준수하며, 우크라이나 국민이 러시아의 잔인한 침략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는 것을 지원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중대한 우려 사항”이라고 했다. 그러나, 북·러 전략동반자 조약 체결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반응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린젠(林劍) 외교부 대변인은 6월 20일 “우리는 관련 보도에 주목하고 있으나, 이 문제는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쌍방 협력에 관한 일이므로 논평하지 않겠다”고 발을 뺐다. 이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일관된 것이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은 각 당사자들의 공동이익에 부합하며, 각 당사자들은 이를 위해 건설적인 노력을 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린젠 대변인의 논평은 북·러의 동반자 조약 체결에 대해 중국은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반응이었다. 중국 인민대학 국제관계대학원 스인훙(時殷弘) 교수는 미 뉴욕타임스 6월 23일자 인터뷰에서 “러시아와 조선이 체결한 조약은, 중국 입장에서는 이 지역의 대립과 갈등을 심각하게 악화시키는 리스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와 북한의 조약 체결은 중국에게는 새로운 두통거리(Russia and North Korea pact is a new headache for China)’라는 제목의 해설에서 그렇게 전했다. 중국 정부가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북·러 조약에 대해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여준 것은 현재 중국이 서있는 외교적 입지 때문이다. 푸틴은 2년 전 2022년 2월 4일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베이징을 방문해서 시진핑과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무제한(無上限 · No limits)’ 협력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푸틴은 시진핑과 무제한 협력 공동성명을 발표한 뒤 불과 20일 만인 2월 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중국은 그때부터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외교적 압박과 경제적 제재를 받게 됐다. 이후 시진핑은 지난해 11월 1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만나 ‘군사적 소통’을 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미국과 유럽이 가하는 제재압력에 숨통을 열어놓았다. 그런데 7개월 만에 김정은이 푸틴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63년 전의 ‘조소 우호협조 상호원조 조약’을 재현하기로 하자 미국과 유럽이 가해오는 외교적, 경제적 제재압력을 완화해 보려던 시진핑은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더구나 지난 5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3개국 정상회담에 참가한 리창(李强)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함께 ‘동북아 평화협력을 위한 공동선언’을 재확인했다. 중국으로서는 미·중 간의 정치적, 경제적인 갈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한국, 일본과 협력을 다짐하는 정상 간 공동선언을 해놓은 흐름을 불과 한 달 뒤인 6월 19일 평양을 방문한 푸틴과 김정은 사이에 63년 전의 자동개입 조항을 포함하는 북·러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회복하는 성명이 발표된 사실이 내심 달갑지 않은 것이다. 중국에게는 미·중 관계와 중·러 관계도 중요하지만, 전 세계 GDP의 24%를 차지하고 총무역액의 20%를 담당하는 한·중·일 3개국 협력 관계도 못지않게 중요한 상황이다. 더구나 한·중·일 3개국과 동남아 12개국이 참여하는 RCEP(Regional Comprehensive Partnership)에서 총 GDP의 83%, APEC(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참여국가들 총 GDP의 40%를 담당하는 한·중·일 3개국 협력은 중국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협력 관계라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점에서 현재 동북아의 역학 구조를 북·중·러와 한·미·일 사이의 신냉전이라고 단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할 것이다. 1990년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치체제가 붕괴하기 이전 이념을 바탕으로 한 냉전(Cold War) 체제와 현재의 이른바 ‘신냉전(New Cold War)’ 체제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바로 한·중·일 3개국 협력 체제의 비중이 과거보다 현저히 높아져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현재의 중·러 협력 관계에는 과거 냉전 시대의 이념적 공통점도 결여돼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중·러 협력관계에는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도미노 압력에 저항하는 시진핑과 푸틴 사이에 반(反)민주주의 전제주의라는 공통점은 있으나 과거 소련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극좌적 이데올로기 공유는 없는 상황이다. 시진핑은 1953년생으로 중국공산당이 “소련의 오늘은 중국공산당의 내일”이라면서 소련의 정치와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카피하던 시절에 태어나 성장한 배경을 갖고 있다. 푸틴은 KGB 출신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붕괴를 보면서 레닌과 스탈린에 의한 전제주의 통치를 비난하는 자세를 갖고 있다. 특히 레닌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문제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비난하는 자세를 취해왔다. 현재의 중·러 협력은 과거 냉전 시대에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하는 중·소 협력시대의 체제와는 기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우리로서는 미·중 갈등관계의 하부구조인 한·중관계라는 양자(兩者)관계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과거 냉전시대에는 없던 한·중·일 3개국 협력관계라는 3자 관계를 잘 활용하면 얼마든지 현재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한·중 관계의 개선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한·중 관계는 정치외교적으로는 갈등 관계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호 보완의 관계라는 점을 잘 활용해야 할 것이다. 한·중·일 3국협력은 현재 정상회의를 중심으로, 21개의 장관급 회의와 70개 이상의 각종 협의체가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갈등하는 미·중 관계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중 관계를 제로섬(Zero Sum) 관계로 보지 않으려는 시각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 최근 한·중·일·미·러 외교일지 > 2022년 2월 4일 시진핑·푸틴 베이징 선언 ‘무제한 협력’ 확인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2023년 8월 18일 한·미·일 캠프데이비드 정상회담 2023년 11월 15일 바이든 · 시진핑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군사적 소통’ 확인 2024년 5월 27일 한·중·일 3개국 정상회담. 동북아 평화 유지 합의 2024년 6월 19일 푸틴 · 김정은 평양 정상회담. 자동개입 조항 포함 전략적 동반자 관계 복원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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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지피지기] 32년 전 한국의 배신과 'TSMC와 AI' 대만의 도약
엔비디아(NVIDIA)를 대만 사람들은 후이다(輝達)라고 부른다. 음역을 한 것이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Jensen Huang)은 ‘황런쉰(黃仁勳)’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부른다. 황런쉰은 15일간의 대만 방문을 끝내고, 8일 밤 8시 31분 캐나다 봄바디 에어로 스페이스가 제작한 개인 전용기 편으로 타이베이(臺北) 쑹산(松山) 비행장을 떠났다. “올해 안으로 또 오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대만 미디어에 따르면, 대만을 방문한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 5월 29일 타이베이 북쪽의 오마카세 일식당에서 대만 과학기술업계 인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만찬은 3시간 동안 이어졌으며, 황 CEO 부부와 모리스 창(장중머우 · 張忠謀) TSMC 창업자 부부가 참석했다. 이들은 만찬을 마치고 황 CEO 제안으로 타이베이 8대 야시장 가운데 하나인 닝샤(寧夏) 야시장을 방문해 대만식 굴전 등 야식을 즐겼다. 오랜 미국 생활 끝에 귀국해서 TSMC를 창업한 모리스 창의 부인은 “90대인 남편의 야시장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대만 사람들이 타이지디엔(臺積電)이라고 부르는 TSMC는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독점 생산하고 있다. “…대만은 이미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들어섰습니다. 미래 세계를 전망해 보면, 반도체가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고, AI의 파도가 밀려올 것입니다. 현재 대만은 선진 반도체 생산공정을 장악해서 AI 혁명의 중심에 섰습니다. 대만은 전 세계 민주국가 산업 공급망의 중요한 고리로, 세계 경제의 발전과 인류 생활에 행복과 번영을 가져다주게 될 것입니다. …” 지난달 20일 대만 제16대 총통으로 취임한 라이칭더(賴淸德)는 취임사에서 대만을 ‘반도체와 AI의 나라’의 중심에 세우겠다고 대만 국민들에게 다짐했다. 라이칭더 총통은 4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4’에 참석해서는 "슈퍼컴퓨터를 대만에 설치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젠슨 황 엔비디아 CEO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라이 총통은 "AI는 대만 경제 발전의 추진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AI가 대만의 경제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32년 전인 1992년 8월 24일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했다. 1882년 조선과 청나라가 외교교섭을 시작한 지 110년 만이었다. 이 날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날 오후 4시 서울 명동 중화민국대사관 뜰에서 열린 청천백일기 하강식에 참석한 대만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했다. 청천백일기 하강식이 끝나고 김수기 대사가 연단에서 내려오자, 보도진이 소감을 물었다. 진수지(金樹基) 대사의 대답은 "We shall come back(우리는 돌아올 것)"이었다. 현재 우리는 대만과 대표부를 설치해 두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우리 외교가 미국과 일본으로 기울어지면서 중국 외교당국의 우리에 대한 언급과 지적은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다. 우리가 미국, 일본과 외교 행동을 함께하는 경우에도 미국, 일본과 함께 싸잡아 비난을 한 뒤 한국에 대해서는 별도의 비난을 추가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달 31일부터 지난 2일까지 한·미·일 3국이 외교부 차관과 국방차관들 사이의 2+2 회담을 한 뒤에는 더욱더 길고 날카로운 반응을 내놓았다. “한국과 미국, 일본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당사자도 아니면서 중국과 역내 국가들 사이의 해상 항해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이 손짓발짓(指手畵脚) 다 하면서 말해도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 (특히) 한국은 중국의 확고한 반대는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반복적으로 “미국, 일본과 함께 대만 문제에 대해 제멋대로(說三道四) 지껄이고 있다.” 이는 중·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두 나라 관계의 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면서 불편한 속내를 보여주었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여서 “우리는 한국이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고 행동을 신중하게 할 것(謹言愼行)을 촉구한다”고 불쾌해하면서 “실제 행동으로 중·한 관계의 대국(大局)을 잘 지킬 것을 촉구한다”면서 불편한 속내를 보여주었다. 지난해 2월에는 박진 당시 외교부 장관이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한반도와 지역 안전과 번영에 불가결한 요인”이라고 언급한 데 대해서는 마오닝(毛寧)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나서서 “대만 문제는 중국의 내정이므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지 말라(不容置喙)”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험한 말을 내던지기도 했다. 32년 전에 한·중수교를 하면서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서명한 ‘한중수교 공동성명’ 제3항은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여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되어있었고, 제5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반도가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고 되어있었다. 이 두 조항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상호 의무를 지는 조항으로 구성돼 있었다. 우리가 중국에 대해 중국이 유일 합법정부이고,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이는 대신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의무 조항으로 밝혀놓았다. 그러나 수교 후 32년이 흐르는 동안 중국은 우리에게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받아들이라고 항상 엄중하게 촉구하면서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지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의무는 특별히 신경쓰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북한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자세는 확고한 반면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는 대체로 망각한 듯이 처신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외교당국도 망각한 듯 한반도 평화통일을 지지하고 지원해야 하는 중국의 의무에 대해서는 중국 측에 별로 지적하지 않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대만은 2022년 현재 2300만 인구에 1인당 GDP 3만3000달러가 넘는 경제적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세계 1위의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TSMC를 보유하고 있고, 최근 들어서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AI 기업 NVDIA의 CEO 젠슨 황은 자신의 출생지인 대만의 반도체 파운드리 TSMC와 전면적인 협력을 할 의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 대만이 보여주는 변화는 현재 대표부 상호 설치 정도에 머물러 있는 한국과 대만 외교교류 수준을 업그레이드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 외교도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면서 양쪽 모두로부터 비난받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도 일본 외교처럼 중국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대만에 대해서도 분명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스 : 대만 신임 총통, 부총통 프로필> 제16대 총통 라이칭더(賴淸德)는 1959년 10월 6일생. 65세. 총통 겸 국가안전회의 주석. 부총통, 행정원장, 타이난(臺南)시 시장, 입법의원 역임. 타이베이 시립 건국고급중학 출신. 타이완대학 보건의학과 학사, 2003년 미 하버드대 공공위생학 석사, 2010년 타이난(臺南)시장에 당선, 국민대표 의원 겸 입법위원 역임. 부총통 샤오메이친(蕭美琴)은 1971년 8월 7일 일본 고베(神戶)에서 출생, 53세. 타이난(臺南)시에서 성장. 부모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가서 미 텍사스 몽클레어 고교 거쳐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 석사 취득. 주미 대만 대표, 국가안전위원회 자문위원. 민주진보당 국제사무부 주임, 4선 입법위원 역임 후, 출마 위해 외교부 사직 후 부총통 당선. 필진 주요 약력 ▷서울대 중문과 졸 ▷고려대 국제정치학 박사 ▷조선일보 초대 베이징 특파원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현 최종현학술원 자문위원 ▷아주경제신문 논설고문 ▷호서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