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을 보내는 단상 : 분열과 갈등 속에 시작된 야만의 통상시대  

  • 트럼프 관세 광풍에 울며 겨자먹기식 협상

서진교
서진교

서진교 (GS&J 인스티튜트 원장)
 
2025년 달력도 이제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는 유난히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글로벌 통상의 관점에서 봐도 올해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지난 30여 년 국제 무역을 관통해 온 규범이 지배하는 ‘이성의 통상시대’가 끝나고 분열과 대립 속에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야만의 통상시대’가 새롭게 시작된 원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야만’이라는 용어를 쓸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도 초강대국의 일방적인 불공정한 행위가 기존의 무역 질서를 허물어버리는 상황에서 전 세계는 입을 다물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이성이나 합리는 전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러니 야만이란 표현이 결코 무리가 아니다.

야만의 통상시대를 연 것은 분명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광풍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당일인 1월 20일 ‘미국 우선 무역정책’을 발표하면서 관세 광풍을 예고했다. 그리곤 2월 1일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을 대상으로 펜타닐 관세 부과를 발표, 실제 행동에 옮김으로써 관세 부과가 허언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관세 광풍의 정점은 아마도 ‘미국 해방의 날’을 선포하면서 발표한 상호 관세일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2일 세계 대부분의 나라를 대상으로 최소 10% 이상의 관세 부과 계획을 발표하였다. 세계를 대상으로 초강대국인 미국이 관세의 칼을 휘두르겠다고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미국을 주요 수출시장으로 둔 국가들은 미국의 일방적인 상호 관세 압력 속에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미국과의 양자 관세 협상에 나섰다. 결국 미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상호 관세 발효일인 8월 1일을 전후로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하였다. 우리나라도 지난 7월 말 미국과 구두로 합의한 다음 10월 말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협상 결과를 공식 문서화함으로써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종결하였다. 협상 결과는 어땠을까? 나라별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미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미국 상품 사주기와 미국이 원하는 산업에 투자하기가 핵심이다. 기존 무역 질서의 시각으로 보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미국의 이와 같은 불공정에 강력히 항의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 미국과 제법 겨룰 수 있을 것으로 보였던 국가도 자국의 이해와 직접 관계되지 않는 이상 고개를 돌리며 말을 아낀다. 오히려 미국이 쓰는 불공정한 보조금을 슬쩍 가져와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한 방패로 사용하기도 한다. 한술 더 떠 미국과 같은 제도를 도입해 미국 이외 국가로부터 수입을 제한하는 데 활용하는 나라도 있다. 이쯤 되면 나타날 법한 미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끼리 뭉쳐 대항하는 연합전선은 기색조차 없다. 연합해서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말만 많지, 누구 하나 총대를 메는 나라가 없다. 그리고선 우리의 협상 결과가 그래도 다른 나라보다 낫다느니 하면서 이상한 논리로 자위적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라고 만든 것이 바로 세계무역기구(WTO)이다. 그러나 많은 회원국이 모여 제 아무리 많은 논의를 한들, 어느 한 나라 대놓고 미국을 비난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간혹 뒷담화로는 미국을 비난한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어느 나라가 그랬는지 찾으면 다들 자기는 아니라고 뒤로 내뺀다. 회원국 대부분은 미국이 자기 나라 상품을 사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며 묵언수행을 한다. WTO에도 다수결이라는 의사 결정 제도가 있어 다수결로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시도해 본 적조차 없다. 어떤 안건이건 미국이 반대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물론 WTO 안에서도 미국을 견제할 만한 힘을 가진 나라들이 더러 있다. EU나 중국, 인도 등이 그러한 국가(지역)이다. 그러나 그 힘을 미국 비난에 쓰기보다는 자국의 이익에 해가 되는 의사 결정을 막는 데 사용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WTO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는 규범에 기초한 통상분쟁 해결은 중단된 지 오래다. 상소심을 판단할 위원들이 한 명도 없는 상태가 벌써 5년이 넘었다.
 
그렇다면 세계 무역의 실제 흐름은 어땠을까? 올해 세계 무역의 분절화는 더욱 심해졌다. 특히 러-우 전쟁 이후 미국과 EU를 중심으로 한 민주-시장경제 블록(bloc)과 러시아-중국 중심의 사회-국가자본주의 블록이 대립하면서 이들 사이의 무역과 투자가 현저히 감소하였다. 소위 지정학적 공급망이 나타나 세계 무역은 더욱 분절화되는 한 해였다.
 
이것이 올 한해를 포함, 최근 2~3년 사이 국제통상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이렇듯 분열과 갈등 속에 힘을 앞세운 불공정한 강압 행위가 규범이 지배한 기존의 무역 질서를 혼란에 빠뜨렸으니 이성이 아닌 야만의 통상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표현은 과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무역과 화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도 없으며 울림도 없다. 이는 순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은 결과이다. 야만의 통상시대에는 그에 어울리는 통상정책이 필요하다. 남들이 각종 보조금과 보호조치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있으니 우리도 따라 불공정 행위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상대방의 불공정으로 인해 국내 기업이 받는 불이익만큼은 상쇄해 주거나 줄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만의 통상시대 원년이 지나가고 있다.

서진교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농업경제학과 △미국 메릴랜드대 자원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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