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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7250억 달러 AI 인프라 전쟁… 한국은 노사내전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장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을 두고 ‘과도한 기대가 만든 거품’이라는 이른바 'AI 버블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실적과 투자 흐름을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시장에서는 'AI 버블'보다 오히려 'AI 인플레'라는 말이 더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미국 주요 빅테크들은 올해 1분기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기록했고, 동시에 천문학적 규모의 AI 인프라 투자 계획을 공개했다. 메타 플랫폼즈는 올해 1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33% 증가한 563억 달러를 기록했고, 올해 자본지출(CAPEX) 계획도 기존 1150억~1350억 달러에서 최대 1450억 달러까지 상향 조정했다. 이 회사는 메모리 가격 상승과 데이터센터 비용 급증이 그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AI 데이터센터 투자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이 회사는 올해 AI 인프라 투자 규모가 약 19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면서 "올해 AI 처리능력을 80% 이상 확대하고 향후 2년 내 데이터센터 규모를 사실상 두 배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단일 분기 투자액만 320억~400억 달러 수준에 이른다. 알파벳도 올해 투자 가이던스를 1800억~1900억 달러 수준으로 높였고, 구글 클라우드 부문 매출은 전년 대비 63% 급증했다. 시장에서는 미국 4대 빅테크의 올해 AI 관련 CAPEX 총액이 최대 72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기업 투자 규모가 아니다. AI 경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은 AI를 소프트웨어 혁신 정도로 이해하지만, 현실의 AI는 점점 거대한 산업 인프라 체제로 변하고 있다. 생성형 AI는 막대한 GPU와 초고속 메모리, 첨단 패키징, 데이터센터, 냉각시설, 광통신망, 그리고 무엇보다 엄청난 전력을 필요로 한다. AI 산업은 이제 반도체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전력·건설·통신·자본시장 전체를 움직이는 새로운 산업혁명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최근 일본경제신문의 문제 제기는 매우 시의적절하다. 일본경제신문은 최근 사설을 통해 AI 인플레 현상 속에서 각종 부품과 장치, 인프라 비용이 급등하고 있으며, 기업들의 투자 부담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지속가능한 투자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향후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과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단순한 비용 문제를 넘어 AI 시대의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실제로 지금 AI 인플레는 반도체와 메모리 가격뿐 아니라 전력과 냉각설비, 변압기, 산업용 전선,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까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전기요금 인상 압력이 커지고 있고, 유틸리티 기업들과 발전기업들이 새로운 전략 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AI 데이터센터 때문에 전력망 자체가 부족해지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6년까지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이 현재의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전력 인프라는 이제 AI 시대의 핵심 병목이자 새로운 지정학적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테크노 중상주의, 기술이 국가 패권의 핵심이 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근 국제정치경제학계에서 거론되는 '테크노 중상주의(Techno-Mercantilism)' 개념이 중요해진다. 과거 중상주의 시대 국가들은 금과 은, 해상무역과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 역량을 총동원했다. 오늘날의 테크노 중상주의는 반도체와 AI, 데이터, 전력망, 첨단 제조기술을 둘러싼 국가 경쟁 체제를 의미한다. 즉 이제 기술은 더 이상 단순한 시장 경쟁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안보와 경제 패권, 지정학적 영향력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이 되었다.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재편과 중국 견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이에 맞서 중국이 국가 주도의 반도체 자립과 AI 산업 육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며, 중동 국가들조차 국부펀드를 앞세워 AI 데이터센터 경쟁에 뛰어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목할 점은 이 경쟁이 순수한 민간 기업 간 경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해 반도체 제조에 수백억 달러의 보조금을 직접 투입하고 있고, 수출 통제와 동맹국 압박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려 한다. 중국은 '신형거국체제(新型擧国体制)'라는 이름 아래 국가가 AI와 반도체 분야 자원을 직접 배분하고 산업 로드맵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맞서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산업정책을 넘어, 국가 전체의 자원과 역량을 하나의 전략 목표에 결집하는 총력전 체제다. 산업혁명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같은 패턴은 낯설지 않다. 19세기 철도 경쟁은 단순한 교통산업 경쟁이 아니라 철강·석탄·금융·군사력을 결합한 국가체제 경쟁이었다. 20세기 냉전기의 우주개발 경쟁 역시 과학기술 경쟁인 동시에 국가 산업동원체제의 총력전이었다. 지금 AI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움직임 역시 본질적으로는 국가 총력 산업체제 경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만 이번 경쟁은 한 가지 면에서 이전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속도가 전례 없이 빠르고, 기술의 파급 범위가 경제·군사·사회 전 영역에 걸쳐 있으며, 승자가 독식하는 구조적 특성이 더욱 강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딜레마, 최고의 자산을 가졌으나 체제 결집이 관건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우려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한국은 본디 AI 시대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진 나라다.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과 첨단 제조 역량, 우수한 디지털 인프라와 높은 교육 수준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시대 핵심 병목 자원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공급망의 중심에 서 있다. 이는 단순 제조업 강국을 넘어 AI 시대 전략 자원 공급국의 위치에 있다는 의미다. HBM은 AI 가속기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부품으로, 엔비디아의 최신 GPU는 모두 이 메모리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현재 HBM 시장은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그리고 미국 마이크론이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최대 HBM 공급처로서 AI 붐의 직접적 수혜를 누리고 있으며, 삼성전자 역시 5세대 HBM(HBM3E) 공급을 본격화하면서 이 레이스에 다시 뛰어들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글로벌 AI 인프라 경쟁에서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강점을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 체제로 조직화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AI 국가 전략을 이끌던 핵심 리더십이 정치권으로 이동하고, 국가 차원의 전략 컨트롤타워가 흔들리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AI 경쟁은 단기 정권 차원의 이벤트가 아니라 최소 10년 이상 지속될 장기 산업전쟁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여전히 정권 교체와 정치 일정에 따라 산업 전략의 연속성이 흔들리는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초당적·초정권적 틀에서 AI 패권 전략을 추진하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전력 인프라 문제도 심각하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위한 전력 확보는 이미 미국에서도 국가적 과제가 되었지만,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향후 10년간 AI와 반도체 제조를 위한 전력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신규 발전 인프라 구축과 전력망 현대화가 얼마나 신속하게 이루어지느냐가 한국의 반도체·AI 경쟁력을 좌우하는 변수가 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에너지 정책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전략의 핵심 과제다. 삼성 노조 분쟁이 던지는 더 큰 질문 여기에 삼성전자를 둘러싼 노사 갈등 역시 단순한 기업 내부 문제로만 보기 어렵다. 물론 노동권과 노조 활동은 민주사회에서 존중받아야 할 기본 권리다. 그러나 현재 반도체와 AI 산업은 과거 제조업 시대와 전혀 다른 속도의 경쟁에 직면해 있다. AI 산업에서는 투자 속도와 의사결정 속도, 연구개발 집중도, 인재 확보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 자체와 직결된다. 삼성전자는 단순한 민간기업이 아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과 수출, 고용, 기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 축이다. 한국 총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 안팎에 달하며, 그 중심에는 삼성전자가 있다. 따라서 삼성전자의 경쟁력 약화는 개별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체제 전체의 불안정성으로 연결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은 분기 단위가 아닌 주 단위, 심지어 일 단위로 전개되는 측면이 있다. 엔비디아가 새 칩을 발표하면 몇 주 안에 이를 지원하는 메모리 규격이 업계 표준으로 굳어지고, 여기에 대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밀려날 수 있다. 이러한 속도전 속에서 조직 내부의 갈등과 의사결정 지연, 관료화가 심화된다면 초격차 경쟁에서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는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노사 양측이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역사적 맥락을 함께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흔들리면 노동자들의 일자리도, 임금 협상의 기반도 동시에 무너진다. 노사 간 대립이 산업 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악순환을 끊고,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새로운 협력 모델이 절실하다. 국가 시스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큰 문제는 한국 사회 전체가 아직 AI 시대의 본질적 변화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세계는 단순한 기술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각국은 AI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산업동원체제를 구축하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는 반도체와 전력, 데이터센터, 인재, 교육, 규제, 금융, 외교전략까지 모두 연결된다. 다시 말해 AI 경쟁은 국가 시스템 경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연구개발 지원이나 스타트업 육성 차원을 넘어선 장기 국가 전략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초당적 산업정책, AI와 반도체·전력 인프라를 통합적으로 보는 전략적 시야, 민관 협력 체계의 복원, 인재 육성과 글로벌 인재 유치 전략 등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AI 분야의 핵심 인재 양성은 최소 10년 이상의 시계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대학 교육의 AI 전환, 이공계 인재의 처우 개선, 글로벌 연구 네트워크 구축 등이 단편적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 국가 과제로 추진되어야 한다. 아울러 한국은 자국의 전략적 위치를 외교적 자산으로 더욱 적극 활용해야 한다. HBM과 같은 핵심 반도체 기술은 미·중 어느 쪽도 단기간에 한국을 대체하기 어려운 포지션을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과도한 기술 의존이나 공급망 종속을 피하는 균형 외교가 필요하다. 첨단 기술을 둘러싼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는 시대일수록, 기술 외교와 산업 전략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제가 된다. AI 시대의 승자는 단순히 뛰어난 기술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산업 인프라와 국가 시스템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조직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략 자산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하나의 국가적 산업체제로 결집할 수 있는가라는 중대한 시험대 위에 서 있다. AI는 더 이상 하나의 산업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산업 구조와 자본 흐름, 전력 체계, 노동 질서, 교육 시스템까지 모두 재편하는 새로운 문명 인프라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의 삼성 노조 분쟁 역시 단순한 노사 문제를 넘어 AI 시대 한국 산업체제의 방향성과 경쟁력을 가늠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 이 역사적 전환점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향후 10년, 20년 뒤의 국가 위상을 결정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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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초집적 기술 경쟁의 시대 … 삼성전자 노사갈등에 쏠린 세계의 시선
세계 증시의 열기와 한국의 불안한 속살 요즘 글로벌 증시 뉴스를 보면 마치 축제 분위기다. 미국의 S&P 500 지수는 2022년 10월 바닥을 찍은 이후 불과 3년 반 만에 두 배로 뛰어올랐다. 미국의 저명한 시장 분석가 라이언 데트릭이 1950년부터 74년간의 강세장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주가가 바닥 대비 두 배가 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3년 9개월이다. 지금 미국 증시는 그 역사적 평균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더욱이 강세장이 정점에 도달하기까지는 평균 6년 9개월이 걸린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아직도 상승 여력이 충분하다는 낙관론—이른바 '업사이드 크러시(Upside Crush)'—이 전 세계 투자자들의 심리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도 이 흐름에 탑승한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이 가파르게 회복되고, 개인 투자자들은 다시 '반도체 대장주'를 외치며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그런데 잠깐, 한 걸음 물러서서 냉정하게 따져보자. 과연 한국 경제의 내부 체력은 미국이나 일본처럼 탄탄한가? 화려한 지수와 실적이라는 외피 뒤에서, 세계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는 한국만의 '구조적 모순'이 똬리를 틀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상승은 '운'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 증시의 강세를 단순히 ‘돈이 많이 풀렸으니까’라고 설명하면 본질을 놓친다. 그 이면에는 'AX(AI 전환, AI Transformation)'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 앞에서 국가와 기업이 방향을 하나로 맞추고 단행한 과감한 거버넌스 개혁과 천문학적 인프라 투자가 자리한다. 엔비디아를 보자. 이 회사의 주가가 3년 새 수십 배로 뛴 것은 단순한 투기 수요 때문이 아니다. GPU 설계에서 소프트웨어 생태계(CUDA)까지 AI 산업 전반을 장악하는 전략을 수십 년에 걸쳐 집요하게 실행한 결과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에 수조 원을 투자하면서 클라우드와 AI를 융합하는 사업 모델을 재편했고, 구글은 자체 AI 칩(TPU) 개발과 제미나이 모델 고도화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이 기업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번 돈의 상당 부분을 다시 미래에 투자한다. 주주 배당이나 직원 임금 인상보다 기술 우위를 지키는 데 우선순위를 둔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의 '잃어버린 시간'에서 깨어난 일본은 정부 주도로 반도체 국산화 프로젝트(라피더스)를 추진하고, 해외 자본 유치를 위해 기업 지배구조를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이하 기업에 개선 계획을 요구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단행했고, 이것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신호탄이 됐다. 국가가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고, 기업이 그 방향을 따라 내부 체질을 바꾼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세계적 수준의 기업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기업들이 힘껏 날개를 펼치도록 국가가 환경을 조성해주고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 한국이 세계에 생중계하고 있는 장면은 정반대다. 번 돈을 미래에 쓸 것인가, 현재에 나눌 것인가 삼성전자는 2023년 반도체 부문에서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다.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면서 재고가 쌓이고, 이익이 증발했다. 그러나 삼성은 이 어려운 시기에도 28조 원이 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 투자를 집행했다. 매출액 대비 10%를 훨씬 웃도는 이 투자는, 당장의 손익보다 기술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절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적자 속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생존형 투자'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삼성전자 노조가 최근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요구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단순한 임금 인상 요구를 넘어선다. 영업이익의 상당 비율을 성과급으로 고정하라는 요구, 휴가 체계 확대, 각종 복지 강화—이것들이 한데 묶여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 개별 항목만 보면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체 그림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문제의 핵심은 '타이밍'과 '규모'다. 지금 이 순간, 전 세계 AI 경쟁은 문자 그대로 초단위로 진행되고 있다. 엔비디아는 새로운 칩 아키텍처를 설계하고, 인텔과 AMD가 추격을 가하며, TSMC는 2나노 이하 공정에서 기술 장벽을 높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뒤처지고, 파운드리 사업에서 TSMC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잇따르는 상황이다. 이 국면에서 기업이 집중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자본을 아껴 첨단 설비에 투자하고, 최고 인재를 확보하며,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삼성은 노조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1달러를 아껴 서버와 전력망에 투자할 때, 한국의 초규모 노조는 기업의 '미래 체력'을 헐어 '현재의 지갑'을 채우자고 압박하고 있다. 이 대비가 너무도 선명하다. 삼성, 진짜 괜찮은 건가?’ 글로벌 기관 투자자들, 즉 연기금과 헤지펀드와 자산운용사들은 한국 기업에 투자할 때 재무 지표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기업의 거버넌스(지배구조)와 내부 리스크를 꼼꼼히 살핀다. 노사 관계의 안정성, 경영진의 의사결정 속도, 내부 갈등이 전략 실행에 미치는 영향—이런 것들이 투자 판단의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 관점에서 지금 삼성전자가 세계에 보내고 있는 신호는 우려스럽다. 최첨단 HBM을 설계하고 파운드리 2나노 공정을 다투는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기업이 19세기적 계급 투쟁의 언어로 무장한 노조의 파업 위협과 대치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있다. 한 외국계 운용사 관계자의 말이 상징적이다. "삼성이 기술 면에서는 세계 톱이지만, 경영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 노사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포지션을 재검토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 특히 삼성전자에 대한 비중을 줄이는 흐름이 지속되는 배경에는 이런 구조적 불안 요인이 자리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기업의 주가가 글로벌 동업종 대비 낮게 평가받는 현상—의 원인을 따질 때 노사 리스크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노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가? 물론 아니다. 근로자의 권익 보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가치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권익 보호'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기업의 전략적 의사결정에 개입하고, 미래 투자 재원을 현재의 분배로 전환하도록 구조적으로 압박하며, 경영의 불확실성을 주기적으로 높이는 방식은 더 이상 '노동권'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기업 경쟁력의 지속 가능성' 문제이고, 나아가 국가 산업의 미래 문제다. AI 시대의 속도전과 한국의 내부 크러시 AI 산업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속도'다. 기술이 6개월~1년 단위로 세대 교체되고, 시장의 주도권이 순식간에 바뀐다. 2년 전까지만 해도 AI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의 HBM 경쟁력에 의문을 다는 목소리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를 굳히는 동안, 삼성은 품질 이슈와 공정 지연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격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투자 결정이 빨라야 하고, 내부 에너지가 기술 개발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삼성전자 경영진이 노조와의 협상에서 소모하는 시간과 자원이 결코 작지 않다. 파업이 실제로 발생하면 생산 차질은 물론, 고객사들의 신뢰가 흔들린다. 협상 과정에서 내부 정보가 외부로 유출될 위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내부 크러시(Internal Crush)'—외부의 경쟁 압력이 아니라 내부의 구조적 갈등이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현상—의 전형적인 징후다. 비교를 해보자.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가. 젠슨 황엔비디아 CEO가 새 칩 아키텍처를 발표하기로 결정하면, 그 결정이 실행으로 이어지는 데 조직 내부의 저항이 거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오픈AI와 파트너십을 맺고 수조 원을 집행하기로 했을 때, 그 결정을 되돌리거나 지연시키는 내부 압력은 없었다. 이 기업들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전략적 투자 결정'과 '내부 분배 갈등'이 서로 뒤엉켜 경영의 발목을 잡는 구도는 아니다. 한국의 구도는 다르다. 초집적 기술—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설계와 제조 역량—을 보유한 기업이, 그 기술을 지탱할 자본 축적을 구조적으로 방해받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마치 세계 최고의 스프린터가 발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형국이다. 분배인가, 성장인가 — 이분법을 넘어서 이 시점에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분명히 해두자. 이 글은 노동자의 권리를 부정하거나, 기업이 이익을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 가능한 성장 없이는 지속 가능한 분배도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져 수익성이 무너지면, 그 피해를 가장 먼저 받는 것은 누구인가? 주주들도, 경영진도 아니다.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이다. 협력업체들이다. 삼성 생태계에 기대어 살아가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다. 더 넓게 보면, 삼성의 경쟁력 약화는 한국의 수출과 세수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그 여파는 전 국민에게 돌아온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의 노사 갈등은 단순히 '사용자 대 노동자'의 대립이 아니다. '현재의 이익'과 '미래의 생존' 사이의 갈등이다. 그리고 이 갈등의 해법은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기업의 장기적 경쟁력을 보전하면서도 성과를 합리적으로 나누는 새로운 틀의 마련에 있다. 문제는 그 새로운 틀을 만들 주체가 기업과 노조만의 협상으로는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협상의 구조 자체가 단기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은 결국 정부로 넘어간다. 정부의 역할 — 중재자가 아닌 설계자로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노사 문제 접근 방식은 대체로 '중재자' 역할에 머물렀다. 갈등이 표면화되면 개입하고, 타협을 유도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물러서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 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AI 시대, 초집적 기술 경쟁의 시대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정부는 이제 '설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노사 관계의 판 자체를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새로 설계하는 것이다. 첫째, 노동 유연성의 확대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 기업이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려면 인력 운용의 유연성이 필수다. 지금처럼 인력 구조조정이 사실상 불가능한 환경에서는, 기업이 장기 투자를 꺼리게 된다. 채용을 줄이고 자동화와 해외 이전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내몰린다. 둘째, 전략 자산 보호 원칙의 명문화다. 국가 안보와 경제 핵심에 해당하는 기업의 경우, 집단행동으로 인한 생산 차질이 국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제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노동권의 제한이 아니라, 국가 전략 자산 보호라는 또 다른 공익의 실현이다. 셋째, 성과 공유 모델의 혁신이다. 단기 임금 인상이나 성과급 고정이 아니라, 기업의 장기 성과와 연동되는 주식 기반 보상, 성과 공유 펀드 등 새로운 분배 모델을 정부가 적극 설계하고 제도화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도 기업의 장기 성공에 이해관계를 갖게 되고, '현재 분배 vs 미래 투자'의 갈등 구도가 완화된다. 넷째, 명확한 메시지다. 정부는 시장과 투자자, 그리고 국민에게 분명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 한국은 기술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내부 구조를 과감히 바꿀 의지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뒷받침할 법과 제도를 갖출 것이라는 것을. 이 메시지 하나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어떤 구체적 정책보다 강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진정한 '업사이드 크러시'를 위하여 라이언 데트릭의 74년치 데이터가 말하는 강세장의 조건은 단순하다. 탄탄한 이익 성장과 기술 혁신,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거버넌스의 신뢰.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 강세장은 오래 지속된다. 한국에는 이미 세계가 부러워하는 기술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역량, POSCO의 소재 기술, 현대차의 전동화 속도—이것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십 년의 투자와 인내, 수많은 엔지니어들의 헌신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 소중한 자산을 지키고 더 키우기 위해서는, 지금 내부를 갉아먹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직시해야 한다. 초집적 기술 기업이 구시대적 분배 논리에 발목 잡히는 기형적 구도를 방치하는 한, 한국의 '업사이드 크러시'는 신기루에 그칠 것이다. 삼성전자의 자화상이 눈물로 얼룩지기 전에, 기업과 노조와 정부 모두가 한 발씩 물러서서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오늘의 더 많은 나눔이 내일의 나눌 것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역설,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한 이 냉혹한 현실을 우리 모두가 직시해야 할 때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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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이번 중동 전쟁이 주식투자자 에게 던진 몇 가지 교훈
지정학적 리스크가 일상의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는 지금 우리는 주식 시장의 기묘한 강세를 목도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서로에게 ‘왜’,‘어떻게’, ‘어디로’ 라는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군사충돌로 야기된 중동의 전운은 과거라면 시장을 공포로 몰아넣었을 대형 악재였으나, 현재의 시장은 이를 냉소적으로 관조하거나 오히려 새로운 투자의 동력으로 삼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역설적 현상의 배후에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의 칼럼니스트 라나 포루하가 최근 분석한 '신지정학적 경제학'의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포루하는 이번 이란-이스라엘 충돌을 통해 세계 경제가 직면한 중요한 교훈을 제시하며, 우리가 알던 기존의 시장 법칙이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경고한다. 포루하의 통찰과 작금의 한국 시장 상황을 결합하여 우리가 중동의 포화 속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투자자의 자세를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교훈은 효율성의 시대가 가고 안보와 신뢰가 자본의 흐름을 결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포루하에 따르면 과거 30년의 세계화가 '가장 싼 곳에서 생산하는 효율성'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생산하는 회복력'의 시대로 변모했다. 중동의 갈등은 글로벌 공급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다. 이제 자본은 가장 저렴한 곳이 아니라 가장 믿을 수 있는 곳, 즉 지정학적으로 안전하며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동맹의 울타리 안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 시장이 한국을 보는 눈은 다면적이다. 한국은 북한 리스크와 대중국 의존도라는 고질적인 위기 요인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미국 중심의 새로운 공급망(Friend-shoring)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반도체, 배터리, 방산 분야의 핵심 파트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국의 가계 부채나 내수 부진 같은 단기적 거시경제 지표보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이 확보한 '대체 불가능한 전략적 가치'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축과 세제 혜택 등 강력한 지원책은 시장의 기대를 자극한다. 시장은 민간 부문의 위기보다 정부와 대기업이 주도하는 산업 정책이 만들어낼 미래 수익성에 베팅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경제가 어렵다'는 신호는 정부의 더 강력한 지원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이어져 주가를 떠받치는 동력이 되고 있다. 투자자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주가가 강세를 보이는 것은 단순히 근거 없는 낙관론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위기를 계기로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고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기업과 국가에 자금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에너지 안보의 변화는 시장의 내성을 키운 결정적 요인이다. 포루하는 미국이 셰일 혁명을 통해 에너지 자립도를 높인 결과, 중동발 석유 쇼크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괴력이 1970년대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음을 강조한다. 이는 개인 투자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이 투자한 기업이나 국가가 외부의 지정학적 충격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 맷집, 즉 자급자족의 역량이나 대체 불가능한 기술적 해자(moat)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단순한 수익률보다 훨씬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안보가 경제의 최우선 순위가 된 시대에는 방위 산업과 에너지 자립 기술이 더 이상 특수 섹터가 아닌 포트폴리오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한국의 방위 산업(K-방산)과 원전 산업에는 엄청난 기회로 작용한다. 전쟁 위기가 고조될수록 한국 기업들의 수주 잔고가 늘어나는 기묘한 구조 속에서, 위기 요인이 특정 섹터에는 강력한 호재가 되어 전체 지수를 견인하는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전쟁이 가져오는 인플레이션의 속성을 재해석해야 한다. 포루하가 언급한 '그림자 인플레이션' (공식통계 등에 반영되지 않는 물가상승의 한 형태로 명목가격은 그대로 둔 채 상품용량을 줄이거나 서비스질을 낮추어 실질 구매력을 떨어뜨리는 현상) 과 공급망 병목 현상은 필연적으로 자원의 희소성을 부각시키며 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현금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으며, 투자자들은 본능적으로 실물 자산의 성격을 지닌 주식으로 피신하게 된다. 특히 막대한 현금 보유력과 독점적 시장 지배력을 갖춘 거대 빅테크 기업들은 이제 단순한 경제적 주체를 넘어 일종의 안전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위기 속에서 주가가 오르는 현상은 공포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포를 헤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피처로서 우량 자산에 대한 수요가 폭주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결국 위기 속의 초강세는 저물가·저금리·평화로 대변되는 구질서의 붕괴 속에서 안보·공급망·국가주도 성장의 신질서 수혜주를 찾는 자본의 영리한 움직임이다. 시장은 한국 경제를 단순히 '위태로운 내수 경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재편되는 글로벌 질서 속의 핵심 요소로 평가하고 있기에 강한 매수세가 유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시적 흐름 뒤에 숨겨진 개인 투자자들의 위험한 자세에 대해서는 엄중한 경고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관측되는 것처럼 정부의 부양 의지만을 믿고 빚을 내어 시장에 뛰어드는 행태는 대단히 우려스럽다. 정책이 시장 심리를 일정 기간 지탱할 수는 있지만, 전쟁이라는 블랙 스완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파도를 끝까지 막아낼 수는 없다. 정부가 주가를 경제 성과의 핵심 지표로 삼고 있다는 믿음이 과도한 확증 편향으로 이어질 때 시장은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인다. 부동산 규제의 반사 이익으로 흘러들어온 유동성은 기업의 미래 가치를 보고 들어온 '똑똑한 돈'이라기보다 갈 곳을 잃은 '불안한 돈'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자금은 작은 충격에도 쥐떼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시장 붕괴를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중동의 포화 속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군중 심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들이 모두 대열에 합류할 때 소외되는 것에 대한 공포(FOMO)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나, 투자의 세계에서는 그 본능에 굴복하는 순간 파탄이 시작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수'가 된 시대에는 언제든 시장이 급변할 수 있음을 상정하고 자산을 지리적으로, 그리고 자산군별로 분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국내 시장의 정책적 호재에만 매몰되지 말고,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을 쥐고 있는 우량 자산이나 금, 국채와 같은 안전 자산으로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생존의 열쇠다. 둘째, 레버리지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상승장에서는 빚이 수익을 극대화하는 마법처럼 보이지만 하락장에서는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악마로 돌변한다. 전쟁은 불확실성의 극치다. 내일 아침 어떤 뉴스가 들려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변동성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자기 자본으로 투자하는 여유에서 나온다. 강제 청산의 공포 없이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있는 투자자만이 결국 시장의 결실을 맛본다는 경험칙이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와 금융 당국의 역할을 매섭게 감시하고 요구해야 한다. 시장이 광기에 휩싸일 때 당국은 달콤한 구두선이 아니라 뼈아픈 경고를 날릴 수 있어야 한다. 가계 부채의 위험성과 시장 과열의 징후를 가감 없이 알리고 투명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이 무모한 도박에 빠지지 않도록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중동전쟁이 투자자에게 주는 최종적인 교훈은 명확하다. 지금은 수익률 극대화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내 삶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안전 마진'을 확보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젊은 층과 서민들이 '역전의 기회'로 주식을 선택한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그 절박함이 눈을 가려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그 결과는 더욱 가혹할 수 있다. 모든 호황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는 엄중한 진실이다. 지금의 주가 강세는 우리가 새로운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과 기대가 뒤섞인 복합적 결과물이다. 투자자들은 이 포화의 연기 속에서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 지정학적 생존 능력을 분별하는 선구안을 길러야 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신뢰할 수 있는 자산에 뿌리를 내리는 능력은 오직 투자자 본인의 냉철한 자세에 달려 있다. “위기는 기회의 얼굴을 하고 오지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리스크의 무게를 아는 자뿐이다”라는 시장의 유명한 금언이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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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유가 금리 환율 동시폭주 …'메조 경제'만이 해법이다
국제정세를 분석해 국내외 경제를 전망하는 전문가들에게 지금은 가히 ‘최악의 시대’라 할 만하다. 40년 넘게 현장을 지켜온 필자에게도 최근의 변동성은 생소함을 넘어 공포스럽다. 밤사이 고뇌하며 써 내려간 분석 보고서가 다음 날 아침이면 곧장 오보로 변해버리는 광경이 일상이 되었다. 특히 중동 전쟁의 불길이 번진 지난 한 달여, 세계 경제는 우리의 상상력과 기존 경제학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4월 12~13일에는 미국·이란 협상 결렬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조치 여파로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를 다시 넘겼다. 달러 강세, 금리인하 기대 후퇴, 신흥국 성장 둔화 우려도 동시에 커졌다. IMF·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까지 성장률 하향과 물가 상향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핵심은 이것이다. 예전에는 국제정세와 경제변수가 대체로 순차적으로 움직였다. 전쟁이 나면 유가가 오르고, 그다음 물가가 오르고, 이후 중앙은행이 대응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유 현물시장, 환율, 금리, 재정, 안보 리스크가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실제로 최근에는 호르무즈 긴장으로 현물 원유 가격이 급등하는 동안 달러가 안전자산으로 강세를 보였고, 그 결과 시장은 연준의 금리인하 기대를 줄였다. 심지어 전통적 안전자산인 금값도 강달러와 고금리 전망 앞에서 약세를 보였다. 즉 ‘전쟁 → 유가 상승’이라는 단선적 공식만으로는 더 이상 설명이 되지 않는 국면이다. 혹자는 이를 ‘트럼프 복합위기’라는 정치적 수사로 일축하며 특정 인물의 돌출 행동 탓으로 돌리려 한다. 하지만 현상의 본질은 훨씬 깊고 구조적이다. 세계 경제의 혈액인 원유 시장, 주요국의 환율, 금리, 심지어 국가 재정의 건전성마저도 기존의 선형적 예측 모델을 비웃듯 제각각 요동치고 있다. 과거에는 어쩌다 한번 발생하던 극단적인 사건(블랙스완)들이 이제는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폴리크라이시스(복합위기)' 국면에 접어들었다. 금리, 환율, 재정 정책이 서로 시너지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한쪽의 구멍을 막으면 다른 쪽이 터지는 '두더지 잡기' 식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과 데이터 기술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정보의 과잉과 확증 편향을 낳으며, 시장의 변동성을 실시간으로 증폭시키는 '초가속의 시대'가 되었다. 전문가들이 데이터를 분석하는 속도보다 상황이 변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된 도구들인 전통적 경제 지표(GDP, 물가상승률 등)는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우선 ‘지능의 외주화’를 꼽을 수 있다. AI 에이전트와 자동화가 자본과 노동의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지만, 국가의 재정 및 통제 시스템은 여전히 과거의 틀에 갇혀 있다. 주요국들의 재정 건전성이 임계치에 도달하면서, 정책 당국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사실상 고갈되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요즘 정책 당국자들 사이에서조차 “(분석과 예측은) 안 하는 게 하는 것보다 덜 위험하다”는 자조 섞인 고백이 흘러나온다. 장기 전략은커녕 단기 대응조차 임기응변에 급급한 것이 작금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변동성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비용 효율성’과 ‘자유 무역’이라는 경제적 알고리즘이 붕괴되고, 그 자리에 ‘지정학적 생존’과 ‘자국 우선주의’라는 안보 논리가 들어앉은 ‘전쟁경제(War Economy)’의 서막이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국가가 내놓는 정책은 무엇보다 ‘방향타’가 선명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정책 대응은 극단적인 이분법에 갇혀 표류하고 있다. 금리나 환율을 만지는 거시(Macro) 담론은 국민의 삶과 동떨어져 체감되지 않고, 소상공인이나 개별 가계를 핀셋 지원하는 미시(Micro) 정책은 거대한 파고를 막아내기엔 그 규모와 범위가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이 양극단을 잇는 ‘메조(Messo) 경제’의 복원이다. 메조 경제란 특정 산업 생태계, 지역 공동체, 혹은 에너지·교통·데이터와 같은 사회적 인프라 단위를 일컫는다. 거시 경제의 충격이 미시 경제의 파멸로 이어지지 않도록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관절’이자 ‘방파제’와 같은 영역이다. 신뢰가 붕괴된 국제 사회에서 정책 당국이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세상은 요동쳐도 우리의 핵심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 확신은 바로 이 메조 경제를 얼마나 단단하게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이재명 정부가 중동 위기 극복을 위해 편성한 26조2000억원 규모의 비상 경제대책(추경 중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재정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단순히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과거의 관성적 문법으로 접근해서는 백약이 무효이다. 이번 추경의 용처는 ‘전쟁경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메조 단위 시스템을 수리하고 보강하는 ‘전략적 방패’가 되어야 한다. 첫째, 에너지 메조 시스템의 안정화다. 유가 폭등은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변수다. 그러나 이 리스크가 물류망을 마비시키고 서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은 메조 단위에서 차단할 수 있다. 이번 추경에 포함된 에너지 바우처와 유가 보조금 확대는 단순한 현금 지원이 아니다. 우리 경제의 혈맥이 굳지 않도록 하는 ‘항응고제’ 처방이며, 공급망 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다. 둘째, 비용 구조의 혁신을 통한 생활 인프라 보호다. 대중교통 K-패스 확대나 석유 최고가격제 관련 예산은 가계 부채라는 미시적 난제와 고물가라는 거시적 난제 사이에서 ‘교통’과 ‘에너지’라는 중간 인프라 비용을 낮춰 실질 소득을 보전하는 효과를 낸다. 국민이 느끼는 체감 물가의 저지선을 메조 단위에서 확보하는 것이다. 셋째, 산업 생태계의 회복탄력성(Resilience) 강화다. 특정 부품이나 원자재가 막혔을 때 개별 기업이 각자도생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산업 전체가 버틸 수 있도록 피해 기업 손실 보전과 수출 금융 지원을 결합해야 한다. 이는 기업에 주는 특혜가 아니라 대한민국 수출 네트워크라는 메조 자산을 지키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본의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최근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은 예산 정책의 패러다임을 크게 바꿨다. 그들은 예산을 ‘위기 관리 투자’와 ‘성장 투자’로 명확히 구분하되, 이를 일체적으로 추진한다. 일본의 위기 관리 투자는 식량, 에너지, 의료, 사이버 보안 등 사회 전반의 리스크에 관민이 협력하여 선제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는 전략이다. 이는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국민 생활의 안정을 지키는 ‘방패’를 만드는 일이다. 동시에 AI, 반도체, 항공·우주 등 첨단 기술에 투자하는 성장 투자를 통해 이 방패를 ‘창’으로 바꾼다. 위기 관리를 통해 확보된 ‘억지력’과 ‘회복탄력성’이 기업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미래 기술에 투자하게 만드는 선순환 구조를 설계한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추경 역시 이러한 ‘안보-성장 일체형’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 에너지 위기 대응이 단순히 고통을 분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에너지 자립을 위한 기술 투자나 공급망 재편으로 이어지도록 예산의 용처를 정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일본이 다년간의 별도 예산 체계를 도입해 재정 규율을 유지하면서도 성장을 도모하듯, 우리도 추경이 단발성 소모품이 되지 않도록 관리 체계를 고도화해야 한다. 지금 정책 당국자들에게 ‘신뢰’라는 단어는 사치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당장 내일 유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신뢰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뢰는 평시가 아닌 위기 시에 그 진가를 발휘한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는 것은 정부가 미래를 완벽히 맞추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폭풍 속에서도 정부가 내 삶의 기본값을 지켜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당국은 이제 거시 지표의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임기응변에 매달리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책은 위험 속에서도 길을 내는 작업이다. 정책 당국은 거시와 미시를 잇는 메조 경제의 컨트롤타워로서, 이번 추경 26조2000억원을 우리 경제의 관절을 튼튼히 하는 ‘골든타임의 수술비’로 써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문명사적 전환의 진통을 겪고 있다. ‘신뢰를 기반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회’가 아니라, ‘신뢰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정책 역량을 총동원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역발상의 시대다. 전쟁경제의 파고는 높고 기존의 경제 이론은 무력해졌지만, 우리 경제의 허리인 메조 단위를 보강하고 일본의 전략적 사례처럼 위기 관리와 성장을 하나로 묶어낸다면, 이 위기는 대한민국이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으로 도약하는 거대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번 추경 예산이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이겨내는 단단한 방파제가 되어야 한다. 세계 경제는 이미 지정학, 에너지, 금융, 재정이 하나의 통합 시스템처럼 반응하는 단계로 들어왔고, 그 결과 전통적 거시전망의 수명이 짧아졌다. 그래서 앞으로는 전망의 정확도보다, 충격이 왔을 때 얼마나 빠르게 가정을 수정하고 정책·포트폴리오를 바꾸느냐가 더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다. 무너진 예측의 자리에 확고한 정책적 신뢰가 다시 들어차는 것, 그것이 이 가혹한 시대를 건너가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정공법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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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중동 사태, '신 한일 경제협력의 시대' 본격화 절호의 기회
최근 동아시아의 정치와 경제를 관찰하면 단순한 동시적 흐름을 넘어서는 구조적 공통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 경험과 정치 체제, 정책 전통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현재 매우 유사한 정치경제적 궤도 위에 올라 있다. 양국 모두 내각 지지율이 60~70%대의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집권 여당 지지율 역시 40%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주요국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특히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에 머무르는 상황과 대비하면, 한일 양국 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오히려 매우 견고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정치적 안정성이 확보된 상황에서도 경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양국 증시는 최근 들어 뚜렷한 하락 압력을 받고 있으며, 투자심리는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동시에 원화와 엔화는 모두 달러 대비 약세를 보이며 수입물가를 자극하고 있고,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국제 유가가 상승해 물가 압력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경기 둔화 신호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더 이상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적 위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불안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이중적 상황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결과다. 이러한 공진(resonance)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국이 공유하고 있는 경제 구조를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 구조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에너지 순수입국이며, 산업 전반이 에너지 가격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중동 지역에 대한 원유와 가스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은 곧바로 경제 변수로 전이된다. 유가 상승은 단순히 연료비 상승에 그치지 않는다. 전력 비용, 물류 비용, 원자재 가격이 연쇄적으로 상승하며 경제 전반에 비용 압력을 가한다. 제조업 중심 경제에서는 이러한 비용 상승이 기업 수익성을 직접적으로 훼손하고, 결국 투자 감소와 고용 둔화로 이어진다. 여기에 수출 중심 경제 구조가 더해진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글로벌 시장에 깊이 통합된 경제로서, 외부 수요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세계 경제가 둔화되거나 주요 교역국의 수요가 약화되면 수출은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이러한 수요 둔화가 비용 상승과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매출은 줄어들고 비용은 증가하는 이중 압박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곧바로 실적 악화로 이어지고, 주가 하락과 투자 위축을 초래한다. 최근 양국 증시의 동반 하락은 이러한 구조적 압박이 시장에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금융 측면에서도 양국은 매우 유사한 조건에 놓여 있다. 달러 중심의 글로벌 금융 질서 속에서 원화와 엔화는 모두 주변 통화로서 미국의 금리 정책과 자본 흐름에 큰 영향을 받는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거나 글로벌 불확실성이 확대되면 자본은 달러로 이동하고, 그 결과 원화와 엔화는 약세를 보이게 된다. 통화 약세는 수출 기업에는 일부 긍정적일 수 있지만,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에서는 물가 상승 압력을 더욱 키운다. 결국 환율은 물가와 금리, 성장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하며 정책 당국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고령화와 저성장 역시 두 나라를 묶는 중요한 구조적 요인이다. 일본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한국 역시 매우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복지, 의료, 연금 지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노동력 감소와 생산성 둔화로 잠재성장률은 하락하고 있다. 민간 부문의 활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정부는 재정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결국 확장적 재정 정책은 특정 정부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정치와 경제의 평가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 더해진다. 유권자는 정부를 평가할 때 안보, 리더십, 정책 방향성을 중시하는 반면, 금융시장은 금리, 환율, 기업 실적, 글로벌 리스크에 즉각 반응한다. 따라서 정치적 지지율이 높다고 해서 경제 상황이 안정적인 것은 아니며, 두 영역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현재 한일 양국에서 나타나는 ‘지지율은 높지만 경제는 불안한’ 현상은 이러한 정치-경제 분리 구조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같은 구조적 공통성 위에서 최근 양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경제 정책 역시 매우 유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환율과 금융시장 안정 측면에서 양국은 모두 적극적인 대응 기조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외환시장 변동성 완화를 위한 정책 수단을 동원하고 있으며, 국채시장 안정화를 위한 조치와 병행해 금융 시스템 전반의 안정성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일본 역시 엔화 약세에 대한 경계감을 높이며 통화정책과 외환정책을 조합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환율을 단순한 수출 변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물가와 금융 안정의 핵심 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재정 정책에서는 공통적으로 확장 기조가 강화되고 있다. 한국은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경기 하방 압력을 완화하고,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한 생활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유류세 조정, 공공요금 관리, 취약계층 지원 확대 등이 그 핵심이다. 일본 역시 적극적 재정 정책을 통해 경기 방어에 나서고 있으며, 대규모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동시에 자극하려 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단순한 경기 부양을 넘어 생활 안정과 비용 충격 완화를 동시에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 방향이 일치한다. 산업과 과학기술 정책에서도 공진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국은 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첨단 산업 전략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으며, 데이터센터 구축, 전력 인프라 확충, 연구개발 투자 확대 등을 병행하고 있다. 일본 역시 반도체와 AI를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산업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재정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양국 모두 군민양용 기술, 즉 듀얼 유스(dual-use) 기술을 핵심 경쟁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기술 경쟁이 곧 안보 경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 에너지 정책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나타난다. 단기적으로는 에너지 절약과 수요 관리, 세제 조정을 통해 충격을 완화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원전, 재생에너지, 저장 기술 등 다양한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설계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환경 정책을 넘어 경제 안정과 국가 안보를 동시에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다. 사회정책 역시 중요한 축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물가 부담은 저소득층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양국 정부는 보조금, 세제 지원, 직접 지원을 통해 취약계층 보호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복지 정책이 아니라 경제 안정 정책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사회적 불안을 완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정책 방향이 유사하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왜 공동 대응을 하지 않는가. 지금이야말로 한일 양국이 협력을 통해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시점이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분야는 에너지다. 공동 구매나 협상 공조를 통해 가격 협상력을 높이고, 비상 상황에서 공급망을 안정화할 수 있는 협력 체계를 구축한다면 단기적인 물가 압력을 크게 완화할 수 있다. 특히 LNG와 원유 조달에서의 협력은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다. 금융과 환율 분야에서도 협력의 필요성은 크다. 통화스와프 확대와 외환시장 정보 공유를 통해 환율 변동성을 줄이고, 금융시장 불안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금융 위기는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사전적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업과 공급망 협력은 장기적 성장의 핵심이다. 반도체, 배터리, AI, 에너지 인프라 분야에서 협력적 분업 구조를 구축한다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고, 중복 투자를 줄이며,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경쟁과 협력의 균형을 통해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결국 지금의 한일 공진현상은 단순한 동시적 경기 변동이 아니라 구조적 현상이며, 동시에 협력의 기회다. 두 나라가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를 공유하는 인식과 미래를 함께 설계하려는 의지다. 에너지, 금융, 산업이라는 세 축에서 실질적인 협력이 이루어진다면, 한일 양국은 현재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성장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의 기존의 관성적 정치를 넘어선 ‘성과 중심적 국가 경영’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다카이치 총리의 ‘사나에노믹스’를 통해 잃어버린 30년을 끝내고 ‘강한 일본’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는 한일 양국의 강한 접착제가 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신 한일경제협력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갈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진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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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갤럭시 26이 던진 질문 … 우리는 진정 AI 강국인가
며칠 전 새로 출시된 갤럭시26 스마트폰을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최신 기술이 집약된 기기답게 화면과 카메라, 배터리 성능, 디자인까지 모두 인상적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하드웨어 기술이 한 손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서 자부심도 느껴졌다. 한국 기업이 만든 스마트폰이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강력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과연 진짜 ‘AI(인공지능) 강국’이 될 수 있을까. 갤럭시26은 분명 뛰어난 제품이다. 그러나 이 스마트폰의 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한국 기술의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 스마트폰을 만든 기업은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다. 하드웨어 설계와 제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운영체제는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최근 스마트폰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능인 AI 역시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같은 글로벌 플랫폼 기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조 기술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플랫폼과 핵심 AI 기술에서는 해외 기술에 기대고 있는 구조다. 갤럭시 26은 한국 기술의 경쟁력과 동시에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처럼 느껴졌다. 이 대목에서 얼마 전 일본경제신문에 실린 한 사설의 내용이 떠오른다. 일본은 최근 ‘디지털 적자(digital deficit)’라는 새로운 경제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다. 일본 기업과 개인이 클라우드 서비스 이용료, 인터넷 광고비, 디지털 콘텐츠 라이선스 비용 등을 해외 거대 테크 기업에 지불하는 금액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국가적으로 막대한 부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재무성의 국제수지 통계에 따르면 디지털 분야의 적자는 2023년에 5.5조엔(약 55조원)에 달해 불과 5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2024년에도 증가 속도는 더 빨라져 6.6조엔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의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제공하는 디지털 서비스는 이제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프라가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상당한 부가 해외로 이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경제신문은 이 문제를 두고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해외 디지털 서비스에 대한 의존이 커지는 현실을 당장 바꾸기 어렵다면 일본은 무엇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결국 일본 내부에서 새로운 혁신과 산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디지털 적자는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한국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 최근 중동에서 이어지는 전쟁을 지켜보면서 또 하나의 변화가 분명해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전쟁의 양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전쟁은 화력 중심의 경쟁이었다. 더 많은 병력과 더 강력한 무기가 승패를 좌우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드론이 전장을 누비고 AI가 표적을 분석하며 위성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군사 작전을 결정한다. 전장의 핵심 자산이 점점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약의 시대가 저물고 ‘비트(Bit)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전쟁의 변화는 국가 경쟁의 방식도 바꾸고 있다. 군사력뿐 아니라 기술력, 공급망, 금융 시스템, 에너지 자원까지 모두가 전략 자산이 되는 시대다. 지정학과 지경학, 그리고 기술 전략이 하나의 체계로 결합되고 있다. 미국의 아마존을 비롯한 빅테크와 팔란티어, 앤트로픽 같은 AI 벤처들이 전장(戰場)에 대거 포진되어 있는 모습이 그 상징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최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던진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미들파워 국가들이 협력하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메뉴에 올라갈 것이다.”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중견 국가들이 아무 전략 없이 움직인다면 결국 국제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는 또한 미들파워 국가들의 연대(middle power coalition)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카니 총리는 현재 국제 질서는 ‘단순한 변화의 과정(transition)이 아니라 단절(rupture)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기존의 글로벌 질서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진단은 지금 국제정치와 경제 질서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 첨단 기술 패권 경쟁, 에너지와 금융을 둘러싼 갈등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세계 질서의 구조 자체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분명 세계적인 산업 강국이다. 경제 규모와 산업 경쟁력, 군사력 모두 세계 상위권에 속한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디스플레이, 전기차 배터리 등 여러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제조 기반 산업에서 한국의 경쟁력은 매우 강하다. 메모리 반도체와 조선 산업 등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처럼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패권국가와는 다른 위치에 있다. 한국은 ‘미들파워 국가’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한국 전략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특히 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위치는 매우 상징적이다. 한국은 기술 강국이지만 동시에 기술 패러다임 전환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기술 경쟁의 중심에는 AI가 있다. 많은 국가들이 AI 전략을 국가 차원의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국 역시 AI 강국을 목표로 다양한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조금 더 냉정하게 보면 한국은 지금 디지털 전환(DX)에서 인공지능 전환(AX)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 DX는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는 단계였다. 이에 비해 AX는 조직의 의사결정과 운영 자체를 AI 중심으로 재편하는 단계다.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기업 구조와 산업 구조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이다. 한국 기업들은 DX 단계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AX 단계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전환이 시작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틱 AI로 이어지는 기술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AI가 단순히 콘텐츠를 생성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 업무를 수행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산업 경쟁의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 여기서도 한국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기술 강국이지만 동시에 기술 중간지대에 서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갤럭시 26이 보여준 모습도 바로 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기술 경쟁에서 주변 국가로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 가진 강점을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바로 제조 기반 산업과 첨단 기술을 결합하는 전략이다. 반도체, 배터리, 로봇, 자동차, 조선 등 한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에 AI와 데이터 기술을 결합하면 새로운 산업 경쟁력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것이 한국형 기술 미들파워 전략의 현실적인 방향일 것이다. 이 얘기도 실은 귀가 닳도록 듣고 있다. 전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실행력이다. 최근 정부와 기업의 발표를 보면 ‘AI 강국’, ‘디지털 강국’, ‘첨단 산업 선도국’과 같은 거창한 목표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선언적 구호에 머물러서는 의미가 없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이다. 과학기술 정책과 산업 정책이 실제 기업과 연구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개발 투자, 인재 양성, 규제 혁신, 산업 생태계 구축 같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특히 AI와 반도체, 배터리, 로봇 같은 전략 산업에서는 정책의 속도와 실행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갤럭시 26을 사용하며 떠올린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과연 어떤 기술 국가가 될 것인가. 이 질문을 생각하던 중 며칠 전 폐막한 중국의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회의에서 중국 정부가 가장 강조한 정책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기술과 AI였다. 중국은 이번 전인대에서 AI, 반도체, 양자기술, 첨단 제조를 국가 경쟁의 핵심 분야로 다시 한번 분명히 언급했다. 특히 ‘AI+’ 전략을 통해 AI를 제조업, 의료, 교통, 금융 등 산업 전반에 빠르게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동시에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구축과 데이터 활용 확대, 핵심 반도체 기술 자립을 위한 국가 차원의 투자를 계속 확대하겠다는 방침도 확인했다. 눈에 띄는 점은 정책의 방향이 매우 분명하다는 것이다. AI를 단순한 기술 산업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 개발과 산업 적용, 데이터 정책과 컴퓨팅 인프라를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묶어 추진하고 있다. 물론 중국의 방식이 그대로 한국에 적용될 수는 없다. 정치·경제 체제도 다르고 산업 구조도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는 있다. 기술 경쟁의 시대에는 정책과 실행의 속도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기술 질서를 만드는 국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가 만든 기술 질서를 따라가는 국가가 될 것인가. 갤럭시 26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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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중동發 '지정학적 폭탄'… '3고(高)'가 오는 가
최근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돌아보면 오랜만에 경제를 둘러싼 낙관이 넓게 퍼져 있었다. 주식시장은 상승세를 이어갔고, 개인 투자자들의 기대감도 크게 높아졌다. 오랫동안 이어진 경기 둔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이제는 경제가 정상 궤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희망이 곳곳에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 경제는 언제나 국내의 기대와 별개로 움직인다. 국제 정세의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를 흔들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했고,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너지 수송의 대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밝히면서 국제 경제가 긴장에 휩싸였다. 이른바 중동발 ‘지정학적 폭탄’이다. 이란의 보복 공격은 걸프 지역의 에너지 시설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원유 생산시설과 액화천연가스(LNG) 설비가 있는 지역에 대한 공격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글로벌 에너지 공급에 대한 우려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이미 여러 유조선이 공격을 받아 항해가 어려워졌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은 이런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에너지 가격과 환율, 채권금리 등 핵심 지표들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단순한 해상 통로가 아니다. 이란과 아라비아 반도 사이에 위치한 이 좁은 해협은 세계 에너지 시장의 핵심 동맥이다. 전 세계에서 거래되는 석유의 약 20%와 LNG의 상당 부분이 이곳을 통과한다. 세계 경제의 심장으로 향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이 좁은 해협을 지나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긴장은 언제나 국제 경제의 가장 민감한 위험 요소로 꼽혀왔다. 과거에도 이란은 여러 차례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봉쇄가 실행된 적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협이 완전히 봉쇄되면 이란 역시 원유 수출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단순한 정치적 위협 이상의 긴장감을 낳고 있다. 유조선 공격과 에너지 시설에 대한 무인기 공격이 실제로 발생하면서 시장은 더 이상 이 상황을 단순한 외교적 수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국제 에너지 시장을 즉각적으로 흔들었다. 중동 정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원유와 LNG 가격이 빠르게 상승했다. 에너지 가격은 세계 경제의 거의 모든 산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은 곧바로 금융시장 전반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특히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직접적인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역시 그중 하나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 지역에 의존하고 있으며, LNG도 약 30%를 이 지역에서 들여온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에너지의 대부분이 바로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 한국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은 곧 한국 경제의 긴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만약 해협 봉쇄가 장기화되거나 에너지 생산시설의 피해가 확대된다면 한국 경제는 두 가지 위험에 동시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가격 충격이고, 다른 하나는 공급 충격이다. 먼저 가격 충격이다.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면 그 영향은 경제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된다. 석유와 가스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산업과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되는 기본 자원이다. 원유 가격이 상승하면 정유제품 가격이 올라가고, 이는 운송비와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진다. LNG 가격 상승은 전력과 도시가스 요금 상승 압력으로 연결된다. 결국 물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인플레이션 요인이 된다. 여기에 환율 문제까지 겹치면 부담은 더 커진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불확실성이 커지면 달러가 강세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원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면 같은 에너지를 수입하더라도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더 커진다. 즉 국제 가격 상승과 환율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면 수입 비용은 이중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 경제가 우려하는 ‘3고(高)’ 현상이다. 환율 상승, 물가 상승, 금리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상황이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물가가 올라가고,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금리가 상승하면 가계와 기업의 금융 부담이 커지고 경제 전반의 활력이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 위기의 또 다른 측면은 공급 자체의 문제다. 가격이 오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은 공급이 실제로 줄어드는 경우다. 다행히 한국은 과거의 석유 위기를 교훈 삼아 상당한 수준의 전략 비축 체계를 갖추고 있다. 현재 한국의 원유 비축량은 국내 소비 기준으로 약 221일분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만약 공급이 일시적으로 차질을 빚더라도 즉각적인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문제는 LNG다. LNG는 극저온 상태에서 보관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장기간 대량 저장이 쉽지 않다. 현재 한국의 LNG 재고는 약 50일 남짓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중동 지역 공급이 장기간 차질을 빚게 되면 LNG 수급 문제가 현실적인 위험으로 떠오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중동 긴장은 단순히 유가 상승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에너지 안보의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제조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에너지 소비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국제 정세의 작은 변화도 경제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을 곧바로 경제 위기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 국제 분쟁이 발생하면 금융시장은 대개 초기 단계에서 과잉 반응을 보인다. 위험을 피하려는 자금이 이동하면서 환율과 금리가 빠르게 움직이고 주식시장의 변동성이 커진다. 하지만 분쟁이 빠르게 진정되면 상당 부분이 다시 안정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과도한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 것이다. 금융시장과 경제는 심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소비자와 기업이 동시에 위축되면 실제 경제활동이 줄어들고, 이는 경기 둔화로 이어질 수 있다. 시장이 상승할 때는 지나친 낙관이 문제지만, 위기가 닥칠 때는 과도한 비관이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침착함이다. 주식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상승기에는 모든 사람이 낙관에 빠지고, 하락기에는 공포가 빠르게 확산된다. 그러나 시장은 언제나 이러한 감정의 진폭을 반복해 왔다. 이런 때일수록 감정에 치우친 '투매'나, 반등을 노린 무리한 '빚투(빚내서 투자)'는 가계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 있다. 지금은 공격적인 자산 증식보다는 '방어적 자산 관리'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고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오래 유지될 가능성이 커진 만큼, 부채 규모를 줄이고 현금 흐름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또한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압박이 실물 경기에 반영되는 시차를 고려할 때, 불요불급한 소비를 줄이는 등 가계 경제의 기초 체력을 비축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위기일수록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자산을 지키는 최고의 전략이다. 그러나 국민의 침착함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시나리오(컨틴전시 플랜)에 기반한 대응 전략이다.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위기 그 자체보다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확실성이다. 단순히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는 식의 원론적인 답변으로는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먼저 단기적으로는 금융시장 안정이 중요하다. 환율이 과도하게 흔들릴 경우 시장의 공포가 확대되지 않도록 안정 장치를 가동할 필요가 있다. 외환시장 개입이나 유동성 공급 같은 정책 수단을 통해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완화해야 한다. 채권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 금융 시스템 전체에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채권시장 안정 조치를 준비해야 한다. 동시에 에너지 공급 안정 대책도 중요하다. 정부와 에너지 기업은 중동 이외 지역에서의 대체 조달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미국, 호주, 동남아 등 다양한 공급원을 활용해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전략 비축 물량을 탄력적으로 방출해 가격 급등을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국제 협력 역시 중요한 수단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를 중심으로 한 소비국 간 협력 체계를 활용하면 에너지 시장의 급격한 변동을 완화할 수 있다. 실제로 과거의 에너지 위기에서도 주요 소비국들이 협력해 전략 비축을 공동으로 활용하면서 시장 안정에 기여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중장기적인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 이번 사태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에너지 공급의 상당 부분이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언제든 경제적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에너지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다양한 에너지원을 균형 있게 활용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산업 구조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동시에 기업과 금융기관의 환율 위험 관리 능력을 강화해 외부 충격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야 한다. 경제 위기의 대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국민은 과도한 공포를 경계해야 하고, 정부는 과도한 낙관을 경계해야 한다. 사회 전체가 침착함을 유지하면서도 정책은 철저히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지금의 상황은 분명 긴장을 요구하는 시기다. 그러나 동시에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 경제는 여러 번의 외부 충격을 이겨낸 경험이 있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경제 시스템을 단단하게 다져 왔다. 위기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러나 준비된 사회는 그 충격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준비다. 국민에게는 차분함을, 정부에게는 명확한 시나리오와 신속한 대응을 요구해야 할 때다. 경제는 결국 신뢰 위에서 움직인다. 그 신뢰가 유지되는 한 어떤 외부 충격도 한국 경제를 쉽게 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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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AI가 당신의 앱을지운다 …소프트웨어의 권력 이동
최근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 언론과 투자 리포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AI가 소프트웨어 산업을 붕괴시키고 있다”는 주장이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시장의 반응과 기술 변화를 동시에 살펴보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의 징후라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밸류에이션이 AI 도구 등장 이후 급격히 흔들리고 있으며, 투자자들은 기존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Software as a Service) 모델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특정 기업의 경쟁력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층위에 있다. AI가 소프트웨어의 역할 자체를 대체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소프트웨어는 인간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였다. 사용자는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고, 메뉴를 선택하며, 데이터를 입력하고, 결과를 해석해야 했다. 그러나 생성형 AI와 에이전트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작업 수행의 주체가 사용자에서 AI로 이동하고 있다. 사용자는 더 이상 애플리케이션을 조작하지 않는다. 의도를 표현하면 AI가 여러 시스템을 가로질러 작업을 완결한다. 이는 인터페이스의 변화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소비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수준이다. 이 변화가 특히 두드러지는 영역은 ‘앱의 경계 붕괴’다. 기존 디지털 환경에서 기업은 CRM(고객 관계 관리), ERP(전사적 자원관리), 협업툴, 분석툴 등 다양한 SaaS를 별도로 도입해 사용해 왔다. 각 애플리케이션은 독립된 기능 묶음을 제공했고, 사용자는 애플리케이션 간 이동을 전제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AI 에이전트는 이러한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하나의 명령으로 데이터 조회, 문서 작성, 고객 응대, 일정 조정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기능은 더 이상 애플리케이션 단위로 소비되지 않는다. 필요 기능이 작업 흐름 속에서 동적으로 호출된다. 다시 말해 실행 시점에 필요한 작업을 지능적으로 선택·추론해 호출하는 것이다. 이른바 ‘언번들링(unbundling)’ 현상이다. 이 같은 흐름은 이미 글로벌 기술기업 전략과 시장 구조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글로벌 기술기업들은 기존 소프트웨어 기능을 강화하는 수준을 넘어, 애플리케이션 자체의 필요성을 줄이거나 업무 수행 구조를 바꾸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AI를 별도의 제품군이 아니라 기존 소프트웨어 스택 전체에 통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애저(Azure) 클라우드와 협업 도구, 개발 환경에 AI 모델을 결합하면서 AI 관련 서비스가 플랫폼 수익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 실제로 애저 매출은 AI 수요에 힘입어 높은 성장세를 보였고, 코파일럿 계열 서비스는 2026년에는 플랫폼 매출의 40% 이상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제조업 현장에서는 AI 에이전트를 통해 데이터 조회와 의사결정을 자동화하면서 유지보수 사고 감소와 생산성 개선을 달성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아마존은 클라우드 서비스 자체의 성격을 바꾸는 방향으로 AI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 막대한 규모의 AI 투자를 통해 연산 인프라와 모델 생태계를 동시에 강화하고 있으며, 자체 AI 칩 개발로 비용 구조까지 재편하고 있다. 한편 AWS는 파트너십을 통해 AI 모델 공급망을 확보하는 동시에 기업 업무 자동화를 위한 AI 에이전트 환경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앤스로픽과의 전략적 협력 및 투자 확대는 클라우드 고객이 단순한 데이터 분석 도구가 아니라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는 AI 시스템을 직접 활용하도록 유도하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이런 흐름은 SaaS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대신 클라우드 기반 AI가 업무를 직접 처리하는 구조로의 전환을 가속한다. AI 확산은 특정 기업 전략을 넘어 시장 전반의 구조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은 소프트웨어 공급업체 수를 줄이고 AI 도구로 동일 업무를 수행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평균 SaaS 사용 애플리케이션 수 감소와 공급업체 축소가 진행되고 있다. AI 에이전트가 여러 단계 업무를 자동으로 수행할 경우 한 사람이 다수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 좌석 기반 라이선스 수요가 줄어드는 구조가 형성된다. 생산성 도구 영역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AI 도입을 통해 기존 CRM 소프트웨어를 대체하거나 대규모 조직 운영 소프트웨어 인력 구조를 축소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으며, 향후 SaaS 좌석(사용자/계정) 수가 두 자릿수 비율로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클라우드 운영 영역에서는 AI 에이전트를 활용해 자원 배치와 비용 관리까지 자동화하는 플랫폼이 등장하며 기존 관리 소프트웨어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 주거·의료 운영 분야에서는 일정 조정, 청구, 유지보수 요청 처리 등 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AI 서비스가 확산되고 있으며 과금 방식 역시 사용자 수가 아닌 관리 자산 규모 기준으로 변화하고 있다. 개발 영역에서는 AI 코딩 도구가 반복적 프로그래밍 시간을 크게 단축시키며 생산성 도구 자체가 AI 기능에 흡수되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변화는 SaaS의 핵심 수익 모델에도 직접적인 충격을 준다. SaaS 산업은 좌석 기반 과금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사용자 수가 늘수록 매출이 증가하는 구조다. 하지만 AI 자동화가 확산되면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업무를 수행하거나 일부 역할 자체가 사라진다. 라이선스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다. 일부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를 축소하거나 도입 계획을 재검토하는 사례가 보고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또 다른 구조적 충격은 진입장벽 붕괴다. 과거에는 복잡한 기능을 갖춘 소프트웨어 구축에 대규모 개발 조직과 자본이 필요했다. 그러나 AI 개발 도구는 기능 구현 비용을 급격히 낮추고 있다. 소규모 팀이 짧은 시간 내 기존 SaaS 기능을 재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제품 희소성이 약화되고 가격 결정력도 떨어지고 있다. 산업 전체가 과잉 경쟁 상태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프트웨어 붕괴’라는 표현은 완전히 근거 없는 과장이라 보기 어렵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표현의 의미를 정확히 정의하는 일이다. 소프트웨어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프트웨어는 더 많이 필요해진다. 변화하는 것은 전달 방식과 경제 모델이다. 애플리케이션 접근권을 판매하던 구조가 결과 수행 능력을 제공하는 구조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이 전환 속에서 한국의 위치를 살펴보면 복합적인 평가가 나온다. 한국은 소프트웨어와 AI 핵심 스택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다. GPU(그래픽 처리 장치), 클라우드 인프라, 핵심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등 주요 구성 요소 상당 부분을 외국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글로벌 AI 질서가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형성되는 상황에서 전략적 자율성 확보는 쉽지 않은 과제다. 독자 모델 개발 시도 역시 외부 기술 의존 논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중요한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산업 현장에서의 AI 도입 속도는 매우 빠르며 제조,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물리 산업 기반 데이터 자산이 풍부하다. 이는 범용 모델 경쟁에서는 불리할 수 있으나 산업 특화 AI에서는 강력한 경쟁력을 제공한다. 또한 반도체 공급망에서의 역할과 AI 인프라 투자 확대는 중장기 전략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조건을 고려할 때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기술 완전 자립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전략적 자립을 추구해야 한다. 범용 컴퓨팅 자원은 글로벌 협력을 활용하되 특화 영역에서는 독자 기술을 확보하는 이중 구조 접근이 현실적이다. 둘째, 초거대 모델 경쟁에 집착하기보다 산업 AI에 집중해야 한다. 제조, 로봇, 물류 등 실제 물리 시스템과 결합된 AI는 진입장벽이 높고 글로벌 경쟁력이 확보될 가능성이 크다. 셋째, 오픈소스 생태계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술 접근성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중견국(미들파워) 전략이다. 넷째, 컴퓨팅 인프라 투자를 국가 전략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AI 시대의 주권은 데이터나 모델뿐 아니라 연산 능력에서도 결정된다. 다섯째, 소프트웨어 수출 전략을 재정의해야 한다. 애플리케이션 판매 중심에서 운영 서비스, 통합 관리, AI 오케스트레이션 제공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AI가 촉발한 변화는 단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산업 패러다임 전환이다. 앱 중심 구조에서 작업 수행 중심 구조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서 기존 경쟁 구도는 크게 재편될 것이다. 한국이 직면한 도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의 창도 열리고 있다. 애플리케이션 중심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었던 국가가 실세계 시스템 통합과 산업 AI 영역에서는 오히려 유리한 위치를 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위기를 구조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다. 소프트웨어가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 그리고 그 전환의 순간마다 새로운 산업 질서가 형성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변화 역시 그 연속선 위에 있다. 한국이 이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 중 하나가 될 것인지는 지금의 전략 선택에 달려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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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K-경제 '올인원 전략' …쪼개면 지고 뭉쳐야 산다
지금 한국 경제를 둘러싼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수출은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주식시장은 5000포인트 돌파를 앞두고 있다. 이와 동시에 원화 약세, 부동산 가격 재상승, 청년 고용 악화라는 경고음도 분명히 울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를 대전환기의 기회라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침체로 가는 냉각기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경제는 이 둘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작동하는, 가장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방식의 문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상당 부분 명확해졌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순서로, 어떤 속도로,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느냐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의 정책 사고방식은 결정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정책 문서와 보고서에는 여전히 익숙한 도식이 반복된다. 먼저 안정을 되찾고, 그 다음 성장 동력을 확보한 뒤, 마지막으로 구조개혁에 나선다는 순서다. 안정, 도약, 구조전환으로 이어지는 시계열적 선형 로드맵은 오랫동안 교과서처럼 사용돼 왔다. 그러나 지금 이 방식은 현실을 단순화하는 수준을 넘어, 오히려 현실을 왜곡한다. 이 접근 방식은 세 가지 전제를 깔고 있다. 외부 환경이 비교적 안정적일 것, 내부의 사회적 신뢰가 유지될 것, 정책이 시간을 벌 수 있을 만큼 성장 여력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지금의 한국은 이 세 조건을 모두 상실했다. 글로벌 환경은 기술, 안보, 에너지, 통화가 뒤엉킨 상시적 경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 번의 판단 지연이 수년의 격차로 이어지는 시대다. 국내적으로는 자산과 소득, 세대 간 격차가 누적되며 사회적 신뢰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성장 잠재력은 남아 있지만, 정책이 순서를 핑계로 시간을 끌 여유는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는 안정, 내년은 도약, 그 다음은 구조개혁이라는 말은 더 이상 전략이 아니다. 사실상 미루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국민에게는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지금의 유권자와 시장은 이런 메시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이 처한 문제는 여러 위기가 나열된 상태가 아니다. 위기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 위기 상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지만, 한국의 상황은 유독 더 복잡하다. 한국은 여전히 성장해야 하는 국가이면서 동시에 선진국이 겪는 구조적 문제를 이미 안고 있기 때문이다. 추격형 성장의 과제와 선진국형 구조 문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구간에 서 있다. 환율 문제만 보더라도 그렇다. 환율은 단순한 외환시장의 문제가 아니다. 환율은 물가를 자극하고, 물가는 가계 부담을 키우며, 이는 소비와 내수를 위축시킨다. 동시에 기업의 투자 판단에도 영향을 준다. 환율 안정만 따로 떼어 관리하겠다는 발상은 현실적이지 않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주거 문제는 자산 문제를 넘어 노동 이동성과 청년 고용, 출산과 인구 구조까지 연결돼 있다. 부동산을 나중의 구조개혁 과제로 미루는 순간, 청년 정책과 노동 정책은 이미 실패로 기울기 시작한다. AI와 첨단 산업 역시 다르지 않다. 기술은 도약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력망과 데이터, 인허가와 규제라는 구조적인 문제와 깊이 얽혀 있다. 기술 도약을 말하면서 구조전환을 뒤로 미루는 것은 현실을 오해한 접근이다. 이 모든 과제는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정책만 과거의 시간표에 묶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시계열 로드맵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는 패키지 전략이다. 안정과 도약, 구조전환을 나누지 말고, 서로를 지탱하는 하나의 묶음으로 설계해야 한다. 그 핵심은 분명하다. 2026년 1년 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성공 궤도에 올라섰다는 것을 국민이 체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완결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고, 완성이 아니라 비가역성이다. 안전은 출발점이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환율, 물가, 주거, 금융에 대한 불확실성을 동시에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적인 미세 조정이 아니라 정책 주체들의 집단적 신호다. 정부와 중앙은행, 연기금이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면서 시장과 국민에게 한 방향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이 문제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신호가 분명해야 한다. 도약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정부 문서에는 AI와 첨단 산업이라는 단어가 넘쳐나지만,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이 실제로 작동하는 조건이다. 전력과 데이터, 인허가와 규제, 인재 유인 구조를 한꺼번에 풀지 않으면 도약은 구호에 그친다. 도약은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는 현재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구조전환은 더더욱 미룰 수 없다. 청년 고용과 노동 이동성, 지역 격차, 인구 구조 문제는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이 문제들에 대해 원칙과 방향을 지금 제시하지 않으면 정책은 곧 신뢰를 잃는다. 구조전환의 핵심은 당장 모든 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방향을 분명히 고정하는 데 있다. 여기서 관건은 국정 컨트롤이다. 이처럼 안정과 도약, 구조전환을 하나의 패키지로 동시에 밀어붙이는 정책은 어느 한 부처에 맡겨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과제가 아니다. 기획재정부의 문제만도 아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산업통상부, 국토교통부, 고용노동부 가운데 어느 한 곳의 소관으로 정리될 수도 없다. 환율과 재정, 산업과 전력, 주거와 고용, 기술과 규제가 서로 얽혀 있는 이 국면에서 필요한 것은 부처별 정책의 합이 아니라 국정 전체를 관통하는 조정과 통제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청와대, 다시 말해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국정 컨트롤 타워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부처 간 충돌을 조정하며, 단기 안정과 중장기 전환을 하나의 방향으로 묶는 작업은 대통령의 권한이자 책임이다. 이는 단순한 실무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문제다. 더 나아가 이 과정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이 국민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동시에 가장 냉정하게 평가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말로 하는 개혁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 부처가 동시에 움직이고 정책의 방향이 일관되게 유지되며 국민이 체감하는 변화가 나타나는지가 대통령의 리더십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성공하면 국정 신뢰는 단기간에 회복되지만, 실패하면 어떤 설명도 변명이 되기 어렵다. 지금 한국 경제는 그런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안정과 도약, 구조전환을 나눠서 생각할 수 없는 이 국면에서 대통령이 직접 책임지고 국정을 묶어내지 못한다면, 그 어떤 정교한 정책도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 지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이 국가의 생존 가능성과 직결되는 순간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현실이 있다. 오는 6월 치러질 전국동시지방선거다. 이 선거는 지금 논의되고 있는 어떤 경제 정책보다도 강력한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선거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선거가 정책을 포퓰리즘으로 끌고 가는 구조적 관성이 문제다. 선거는 정책을 단기성과 중심으로 압축하고, 고통을 수반하는 결정은 뒤로 미루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자석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정책은 일관성을 잃기 쉽다. 환율, 부동산, 요금, 재정 같은 민감한 사안은 특히 그렇다. 선거 국면에서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이 반복되고, 그 사이 문제는 누적된다. 정책의 방향은 유지된다고 말하지만, 실제 실행의 강도와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진다. 국민은 이 미묘한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감지한다. 문제는 앞서 강조한 안전·도약·구조전환의 패키지 전략이 선거에 가장 취약한 유형의 정책이라는 점이다. 이 전략은 단기간에 인기 있는 선물을 나눠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단호함과 일관성, 그리고 일정한 사회적 부담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가 다가올수록 흔들릴 가능성도 커진다. 만약 이 패키지가 선거 국면에서 속도를 잃거나 방향을 바꾼다면, 정책은 실패하는 것뿐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신뢰의 손상을 남길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선거라는 거대한 정치적 이벤트 속에서도, 단호하고 일관된 패키지 정책을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첫째, 정책을 ‘공약’이 아니라 ‘국정 원칙’의 차원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선거용 메시지와 국정 운영 원칙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으면 정책은 흔들린다. 안전·도약·구조전환 패키지는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겨냥한 선거 공약이 아니라, 국가 생존과 직결된 운영 원칙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는 선거 기간일수록 더욱 공개적으로 강조돼야 한다. 둘째, 정책의 핵심 방향과 일정은 가능한 한 제도화해야 한다. 법과 제도, 중장기 계획, 독립적 위원회와 같은 장치는 정치 일정의 영향을 완화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모든 것을 법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정책의 큰 방향과 되돌릴 수 없는 기준선은 제도 속에 남겨야 한다. 그래야 선거 국면에서도 정책이 완전히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정책의 성과를 ‘미래 약속’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보여줘야 한다. 선거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민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체 상태에도 불안을 느낀다. 패키지 정책이 선거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2026년 안에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부라도 나타나야 한다. 방향이 이미 바뀌었고, 되돌릴 수 없는 궤도에 올랐다는 신호가 있어야 한다. 넷째, 대통령의 역할은 이 지점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선거 국면에서는 부처가 스스로 움직이기 어렵다. 책임 회피와 관망이 늘어난다. 이때 정책을 붙들고 가는 유일한 주체는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정책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고, 선거와 무관하게 유지돼야 할 원칙을 직접 천명하지 않는다면, 패키지 전략은 쉽게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결국 선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선거가 정책을 집어삼키도록 내버려둘 것인지는 전적으로 국정 운영의 문제다. 지금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선거를 이유로 단호한 결정을 미루는 것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국가적 위험에 가깝다. 안전과 도약, 구조전환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요구는 선거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라는 현실을 직시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국정 기준을 세우자는 제안이다. 선거는 지나가지만, 경제의 방향은 그 이후 수년을 좌우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또 한번의 시험대에 서 있다. 정책이 선거의 자석에 끌려가느냐, 아니면 선거 위에서도 방향을 지켜내느냐. 그 선택의 결과는 고스란히 국민의 삶으로 돌아올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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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의 Now&Future] 엔트로피(Entropy)가 높아진 세계, 2026년의 결정적 질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더 이상 세계를 파괴하지 마라.” 이처럼 직설적이고도 엄중한 문장이 일본의 대표적 경제지 사설에 실렸다. 2026년 1월 18일자 일본경제신문 사설이다. 외교적 수사와 절제를 중시해온 일본 언론의 문법을 감안하면, 이 표현은 이례적일 정도로 강경하다. 더욱 주목할 점은 이 사설이 특정 정책에 대한 일시적 비판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 질서가 처한 구조적 위기를 향한 경고라는 점이다. 사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이후 1년 동안 전후 국제질서를 떠받쳐온 핵심 기둥들이 연쇄적으로 훼손됐다고 진단한다. 세계무역기구(WTO) 규칙을 무시한 고관세 정책은 자유무역 질서를 흔들었고, 동맹국과의 협력 관계는 거래 대상으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러시아에 대한 유화적 태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의 신뢰를 약화시켰으며,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병합에 대한 집착은 동맹의 존재 이유 자체를 의문에 빠뜨렸다고 지적했다.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일방적 군사 행동, 다자 국제기구 탈퇴로 인한 기후변화·빈곤·공중보건 협력의 후퇴,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비롯한 행정 기구 해체로 인한 전문성 상실도 사설이 열거한 문제들이다. 언론 자유에 대한 압박, 이견 배제와 정적 제거 시도, 연방군 투입 가능성까지 언급하며 일본경제신문은 이를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태”라고 규정했다. 사설의 결론은 분명하다. 이러한 흐름이 남은 임기 동안 지속된다면 세계는 바람직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며, 일본을 포함한 동맹국들은 미국이 다시 국제 협력의 궤도로 돌아오도록 집단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구상을 그 대안적 나침반으로 제시한 대목 역시 인상적이다. 일본경제신문의 이 사설은 단순한 외교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질서가 관리 가능한 범위를 넘어서는 비용 구조, 다시 말해 엔트로피가 급격히 높아진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경고다. 엔트로피(Entropy)는 원래 물리학 개념이다. 시스템이 얼마나 무질서해졌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알려져 있지만, 이를 일상 언어로 풀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엔트로피가 높아진다는 것은 같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와 비용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정리된 방에서는 물건 하나를 찾는 데 큰 노력이 들지 않지만, 어질러진 방에서는 같은 물건을 찾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시간과 힘이 필요하다. 국제질서도 마찬가지다. 규칙이 분명하고, 합의가 존중되며, 약속이 지켜지는 세계에서는 갈등이 발생해도 관리 비용이 비교적 낮다. 그러나 규칙이 무시되고, 합의가 언제든 뒤집히며, 힘이 우선하는 환경이 되면 각국은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더 많은 군비를 쌓고, 더 많은 외교 자원을 투입하며, 더 많은 보험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이것이 국제 시스템의 엔트로피가 높아진 상태다. 지금 세계는 이미 여러 개의 위기를 동시에 감당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불안,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후 변화, 인공지능(AI)의 급속한 확산까지 겹쳐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질서마저 불안정해지면, 작은 충격도 시스템 전체를 흔들 수 있다. 일본경제신문이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더 이상 세계를 파괴하지 말라”고 경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특정 발언이나 정책 하나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마찰계수를 급격히 높이는 정치 방식이다. 트럼프 정치의 특징은 다자 질서를 경시하고, 동맹을 거래 대상으로 바라보며, 규범을 협상의 카드로 사용하는 데 있다. 단기적으로는 강경하고 결단력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신뢰를 소모하고,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며, 결국 세계 전체의 엔트로피를 끌어올린다. 그 비용은 각국의 재정 부담, 기업의 투자 위축, 시민들의 불안으로 되돌아온다. 중요한 점은 세계가 더 이상 이런 엔트로피 상승을 감내할 체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갈등이 존재했지만 질서는 비교적 단순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계는 기술·경제·안보·환경이 서로 얽힌 고차 방정식 위에 놓여 있다. 여기에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면, 시스템은 빠르게 임계점에 접근한다. 그래서 2026년 세계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엔트로피를 낮출 것인가. 이는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현실적 생존의 문제다. 엔트로피를 낮춘다는 것은 규칙을 복원하고, 예측 가능성을 높이며, 갈등을 관리 가능한 범위로 되돌리는 l일이다. 힘의 과시보다 제도의 신뢰를, 즉흥적 결정보다 지속 가능한 질서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미국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일본, 유럽, 한국을 포함한 선진 및 중견국들,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어느 나라든 엔트로피를 증폭시키는 정치에 편승할 것인지, 아니면 비용이 들더라도 질서를 유지·복원하는 길을 택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혼란의 시대마다 두 유형의 지도자가 등장했다. 엔트로피를 키워 순간적 지지를 얻는 지도자와, 불편한 선택을 감수하며 질서를 재구성한 지도자다. 전자는 박수를 받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후자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시스템을 지켜냈다. 지금 세계는 다시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일본경제신문의 사설은 그 갈림길 앞에서 울린 경고음이다. 2026년은 더 이상 혼란을 정치적 개성이나 스타일로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이제 세계는 묻고 있다.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는가가 아니라, 누가 엔트로피를 관리하고 낮출 수 있는가를.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정치는, 결국 세계로부터 외면받게 될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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