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최근 동아시아의 정치와 경제를 관찰하면 단순한 동시적 흐름을 넘어서는 구조적 공통성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 경험과 정치 체제, 정책 전통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현재 매우 유사한 정치경제적 궤도 위에 올라 있다. 양국 모두 내각 지지율이 60~70%대의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집권 여당 지지율 역시 40%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글로벌 주요국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특히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에 머무르는 상황과 대비하면, 한일 양국 정부의 정치적 기반은 오히려 매우 견고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정치적 안정성이 확보된 상황에서도 경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양국 증시는 최근 들어 뚜렷한 하락 압력을 받고 있으며, 투자심리는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동시에 원화와 엔화는 모두 달러 대비 약세를 보이며 수입물가를 자극하고 있고,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국제 유가가 상승해 물가 압력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경기 둔화 신호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더 이상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적 위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불안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이중적 상황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결과다.
이러한 공진(resonance)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양국이 공유하고 있는 경제 구조를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 구조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에너지 순수입국이며, 산업 전반이 에너지 가격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중동 지역에 대한 원유와 가스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중동 지역의 군사적 긴장은 곧바로 경제 변수로 전이된다. 유가 상승은 단순히 연료비 상승에 그치지 않는다. 전력 비용, 물류 비용, 원자재 가격이 연쇄적으로 상승하며 경제 전반에 비용 압력을 가한다. 제조업 중심 경제에서는 이러한 비용 상승이 기업 수익성을 직접적으로 훼손하고, 결국 투자 감소와 고용 둔화로 이어진다.
여기에 수출 중심 경제 구조가 더해진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글로벌 시장에 깊이 통합된 경제로서, 외부 수요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세계 경제가 둔화되거나 주요 교역국의 수요가 약화되면 수출은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이러한 수요 둔화가 비용 상승과 동시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매출은 줄어들고 비용은 증가하는 이중 압박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곧바로 실적 악화로 이어지고, 주가 하락과 투자 위축을 초래한다. 최근 양국 증시의 동반 하락은 이러한 구조적 압박이 시장에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금융 측면에서도 양국은 매우 유사한 조건에 놓여 있다. 달러 중심의 글로벌 금융 질서 속에서 원화와 엔화는 모두 주변 통화로서 미국의 금리 정책과 자본 흐름에 큰 영향을 받는다.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거나 글로벌 불확실성이 확대되면 자본은 달러로 이동하고, 그 결과 원화와 엔화는 약세를 보이게 된다. 통화 약세는 수출 기업에는 일부 긍정적일 수 있지만,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에서는 물가 상승 압력을 더욱 키운다. 결국 환율은 물가와 금리, 성장 사이를 연결하는 핵심 변수로 작용하며 정책 당국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고령화와 저성장 역시 두 나라를 묶는 중요한 구조적 요인이다. 일본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한국 역시 매우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복지, 의료, 연금 지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노동력 감소와 생산성 둔화로 잠재성장률은 하락하고 있다. 민간 부문의 활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정부는 재정을 통해 경제를 지탱하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결국 확장적 재정 정책은 특정 정부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정치와 경제의 평가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 더해진다. 유권자는 정부를 평가할 때 안보, 리더십, 정책 방향성을 중시하는 반면, 금융시장은 금리, 환율, 기업 실적, 글로벌 리스크에 즉각 반응한다. 따라서 정치적 지지율이 높다고 해서 경제 상황이 안정적인 것은 아니며, 두 영역은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현재 한일 양국에서 나타나는 ‘지지율은 높지만 경제는 불안한’ 현상은 이러한 정치-경제 분리 구조의 전형적인 사례다.
이같은 구조적 공통성 위에서 최근 양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경제 정책 역시 매우 유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환율과 금융시장 안정 측면에서 양국은 모두 적극적인 대응 기조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외환시장 변동성 완화를 위한 정책 수단을 동원하고 있으며, 국채시장 안정화를 위한 조치와 병행해 금융 시스템 전반의 안정성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일본 역시 엔화 약세에 대한 경계감을 높이며 통화정책과 외환정책을 조합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환율을 단순한 수출 변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물가와 금융 안정의 핵심 축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재정 정책에서는 공통적으로 확장 기조가 강화되고 있다. 한국은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경기 하방 압력을 완화하고,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한 생활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유류세 조정, 공공요금 관리, 취약계층 지원 확대 등이 그 핵심이다. 일본 역시 적극적 재정 정책을 통해 경기 방어에 나서고 있으며, 대규모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소비와 투자를 동시에 자극하려 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단순한 경기 부양을 넘어 생활 안정과 비용 충격 완화를 동시에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책 방향이 일치한다.
산업과 과학기술 정책에서도 공진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국은 인공지능(AI)과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첨단 산업 전략을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으며, 데이터센터 구축, 전력 인프라 확충, 연구개발 투자 확대 등을 병행하고 있다. 일본 역시 반도체와 AI를 국가 안보와 직결된 전략 산업으로 규정하고 대규모 재정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양국 모두 군민양용 기술, 즉 듀얼 유스(dual-use) 기술을 핵심 경쟁력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기술 경쟁이 곧 안보 경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
에너지 정책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나타난다. 단기적으로는 에너지 절약과 수요 관리, 세제 조정을 통해 충격을 완화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원전, 재생에너지, 저장 기술 등 다양한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설계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환경 정책을 넘어 경제 안정과 국가 안보를 동시에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다.
사회정책 역시 중요한 축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물가 부담은 저소득층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양국 정부는 보조금, 세제 지원, 직접 지원을 통해 취약계층 보호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복지 정책이 아니라 경제 안정 정책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사회적 불안을 완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처럼 정책 방향이 유사하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다면, 왜 공동 대응을 하지 않는가. 지금이야말로 한일 양국이 협력을 통해 구조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시점이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분야는 에너지다. 공동 구매나 협상 공조를 통해 가격 협상력을 높이고, 비상 상황에서 공급망을 안정화할 수 있는 협력 체계를 구축한다면 단기적인 물가 압력을 크게 완화할 수 있다. 특히 LNG와 원유 조달에서의 협력은 매우 현실적인 대안이다. 금융과 환율 분야에서도 협력의 필요성은 크다. 통화스와프 확대와 외환시장 정보 공유를 통해 환율 변동성을 줄이고, 금융시장 불안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 금융 위기는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사전적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업과 공급망 협력은 장기적 성장의 핵심이다. 반도체, 배터리, AI, 에너지 인프라 분야에서 협력적 분업 구조를 구축한다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고, 중복 투자를 줄이며,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경쟁과 협력의 균형을 통해 새로운 성장 모델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결국 지금의 한일 공진현상은 단순한 동시적 경기 변동이 아니라 구조적 현상이며, 동시에 협력의 기회다. 두 나라가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를 공유하는 인식과 미래를 함께 설계하려는 의지다. 에너지, 금융, 산업이라는 세 축에서 실질적인 협력이 이루어진다면, 한일 양국은 현재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성장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의 기존의 관성적 정치를 넘어선 ‘성과 중심적 국가 경영’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다카이치 총리의 ‘사나에노믹스’를 통해 잃어버린 30년을 끝내고 ‘강한 일본’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는 한일 양국의 강한 접착제가 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신 한일경제협력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갈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진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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