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교훈은 효율성의 시대가 가고 안보와 신뢰가 자본의 흐름을 결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포루하에 따르면 과거 30년의 세계화가 '가장 싼 곳에서 생산하는 효율성'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곳에서 생산하는 회복력'의 시대로 변모했다. 중동의 갈등은 글로벌 공급망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다. 이제 자본은 가장 저렴한 곳이 아니라 가장 믿을 수 있는 곳, 즉 지정학적으로 안전하며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동맹의 울타리 안으로 파고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 시장이 한국을 보는 눈은 다면적이다. 한국은 북한 리스크와 대중국 의존도라는 고질적인 위기 요인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미국 중심의 새로운 공급망(Friend-shoring)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반도체, 배터리, 방산 분야의 핵심 파트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한국의 가계 부채나 내수 부진 같은 단기적 거시경제 지표보다,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이 확보한 '대체 불가능한 전략적 가치'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있다.
특히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축과 세제 혜택 등 강력한 지원책은 시장의 기대를 자극한다. 시장은 민간 부문의 위기보다 정부와 대기업이 주도하는 산업 정책이 만들어낼 미래 수익성에 베팅하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경제가 어렵다'는 신호는 정부의 더 강력한 지원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이어져 주가를 떠받치는 동력이 되고 있다. 투자자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주가가 강세를 보이는 것은 단순히 근거 없는 낙관론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위기를 계기로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되고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기업과 국가에 자금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에너지 안보의 변화는 시장의 내성을 키운 결정적 요인이다. 포루하는 미국이 셰일 혁명을 통해 에너지 자립도를 높인 결과, 중동발 석유 쇼크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괴력이 1970년대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음을 강조한다. 이는 개인 투자자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이 투자한 기업이나 국가가 외부의 지정학적 충격에 얼마나 견딜 수 있는 맷집, 즉 자급자족의 역량이나 대체 불가능한 기술적 해자(moat)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단순한 수익률보다 훨씬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안보가 경제의 최우선 순위가 된 시대에는 방위 산업과 에너지 자립 기술이 더 이상 특수 섹터가 아닌 포트폴리오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이는 한국의 방위 산업(K-방산)과 원전 산업에는 엄청난 기회로 작용한다. 전쟁 위기가 고조될수록 한국 기업들의 수주 잔고가 늘어나는 기묘한 구조 속에서, 위기 요인이 특정 섹터에는 강력한 호재가 되어 전체 지수를 견인하는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시적 흐름 뒤에 숨겨진 개인 투자자들의 위험한 자세에 대해서는 엄중한 경고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관측되는 것처럼 정부의 부양 의지만을 믿고 빚을 내어 시장에 뛰어드는 행태는 대단히 우려스럽다. 정책이 시장 심리를 일정 기간 지탱할 수는 있지만, 전쟁이라는 블랙 스완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파도를 끝까지 막아낼 수는 없다. 정부가 주가를 경제 성과의 핵심 지표로 삼고 있다는 믿음이 과도한 확증 편향으로 이어질 때 시장은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인다. 부동산 규제의 반사 이익으로 흘러들어온 유동성은 기업의 미래 가치를 보고 들어온 '똑똑한 돈'이라기보다 갈 곳을 잃은 '불안한 돈'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자금은 작은 충격에도 쥐떼처럼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시장 붕괴를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현명한 투자자라면 중동의 포화 속에서 냉정함을 유지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군중 심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들이 모두 대열에 합류할 때 소외되는 것에 대한 공포(FOMO)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나, 투자의 세계에서는 그 본능에 굴복하는 순간 파탄이 시작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수'가 된 시대에는 언제든 시장이 급변할 수 있음을 상정하고 자산을 지리적으로, 그리고 자산군별로 분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국내 시장의 정책적 호재에만 매몰되지 말고,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을 쥐고 있는 우량 자산이나 금, 국채와 같은 안전 자산으로 포트폴리오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생존의 열쇠다. 둘째, 레버리지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상승장에서는 빚이 수익을 극대화하는 마법처럼 보이지만 하락장에서는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악마로 돌변한다. 전쟁은 불확실성의 극치다. 내일 아침 어떤 뉴스가 들려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변동성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자기 자본으로 투자하는 여유에서 나온다. 강제 청산의 공포 없이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 있는 투자자만이 결국 시장의 결실을 맛본다는 경험칙이 있다.
마지막으로 국가와 금융 당국의 역할을 매섭게 감시하고 요구해야 한다. 시장이 광기에 휩싸일 때 당국은 달콤한 구두선이 아니라 뼈아픈 경고를 날릴 수 있어야 한다. 가계 부채의 위험성과 시장 과열의 징후를 가감 없이 알리고 투명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이 무모한 도박에 빠지지 않도록 파수꾼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중동전쟁이 투자자에게 주는 최종적인 교훈은 명확하다. 지금은 수익률 극대화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라, 만약의 사태에 내 삶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안전 마진'을 확보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젊은 층과 서민들이 '역전의 기회'로 주식을 선택한 절박함은 이해하지만, 그 절박함이 눈을 가려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다면 그 결과는 더욱 가혹할 수 있다. 모든 호황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리스크가 도사리고 있다는 엄중한 진실이다. 지금의 주가 강세는 우리가 새로운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치러야 할 비용과 기대가 뒤섞인 복합적 결과물이다. 투자자들은 이 포화의 연기 속에서 기업의 본질적 가치와 지정학적 생존 능력을 분별하는 선구안을 길러야 한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신뢰할 수 있는 자산에 뿌리를 내리는 능력은 오직 투자자 본인의 냉철한 자세에 달려 있다. “위기는 기회의 얼굴을 하고 오지만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리스크의 무게를 아는 자뿐이다”라는 시장의 유명한 금언이 있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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