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며칠 전 새로 출시된 갤럭시26 스마트폰을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최신 기술이 집약된 기기답게 화면과 카메라, 배터리 성능, 디자인까지 모두 인상적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하드웨어 기술이 한 손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서 자부심도 느껴졌다. 한국 기업이 만든 스마트폰이 글로벌 시장에서 여전히 강력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과연 진짜 ‘AI(인공지능) 강국’이 될 수 있을까. 갤럭시26은 분명 뛰어난 제품이다. 그러나 이 스마트폰의 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한국 기술의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 스마트폰을 만든 기업은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다. 하드웨어 설계와 제조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운영체제는 구글의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최근 스마트폰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능인 AI 역시 구글의 제미나이(Gemini) 같은 글로벌 플랫폼 기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조 기술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플랫폼과 핵심 AI 기술에서는 해외 기술에 기대고 있는 구조다. 갤럭시 26은 한국 기술의 경쟁력과 동시에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처럼 느껴졌다.
일본 재무성의 국제수지 통계에 따르면 디지털 분야의 적자는 2023년에 5.5조엔(약 55조원)에 달해 불과 5년 만에 두 배로 증가했다. 2024년에도 증가 속도는 더 빨라져 6.6조엔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의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제공하는 디지털 서비스는 이제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프라가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상당한 부가 해외로 이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경제신문은 이 문제를 두고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해외 디지털 서비스에 대한 의존이 커지는 현실을 당장 바꾸기 어렵다면 일본은 무엇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결국 일본 내부에서 새로운 혁신과 산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디지털 적자는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한국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자.
최근 중동에서 이어지는 전쟁을 지켜보면서 또 하나의 변화가 분명해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전쟁의 양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전쟁은 화력 중심의 경쟁이었다. 더 많은 병력과 더 강력한 무기가 승패를 좌우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드론이 전장을 누비고 AI가 표적을 분석하며 위성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군사 작전을 결정한다. 전장의 핵심 자산이 점점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약의 시대가 저물고 ‘비트(Bit)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전쟁의 변화는 국가 경쟁의 방식도 바꾸고 있다. 군사력뿐 아니라 기술력, 공급망, 금융 시스템, 에너지 자원까지 모두가 전략 자산이 되는 시대다. 지정학과 지경학, 그리고 기술 전략이 하나의 체계로 결합되고 있다. 미국의 아마존을 비롯한 빅테크와 팔란티어, 앤트로픽 같은 AI 벤처들이 전장(戰場)에 대거 포진되어 있는 모습이 그 상징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최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던진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미들파워 국가들이 협력하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메뉴에 올라갈 것이다.”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중견 국가들이 아무 전략 없이 움직인다면 결국 국제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그는 또한 미들파워 국가들의 연대(middle power coalition)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카니 총리는 현재 국제 질서는 ‘단순한 변화의 과정(transition)이 아니라 단절(rupture)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기존의 글로벌 질서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진단은 지금 국제정치와 경제 질서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 글로벌 공급망 재편, 첨단 기술 패권 경쟁, 에너지와 금융을 둘러싼 갈등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세계 질서의 구조 자체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분명 세계적인 산업 강국이다. 경제 규모와 산업 경쟁력, 군사력 모두 세계 상위권에 속한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디스플레이, 전기차 배터리 등 여러 산업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제조 기반 산업에서 한국의 경쟁력은 매우 강하다. 메모리 반도체와 조선 산업 등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 미국이나 중국처럼 국제 질서를 주도하는 패권국가와는 다른 위치에 있다. 한국은 ‘미들파워 국가’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한국 전략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특히 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위치는 매우 상징적이다. 한국은 기술 강국이지만 동시에 기술 패러다임 전환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기술 경쟁의 중심에는 AI가 있다. 많은 국가들이 AI 전략을 국가 차원의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국 역시 AI 강국을 목표로 다양한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조금 더 냉정하게 보면 한국은 지금 디지털 전환(DX)에서 인공지능 전환(AX)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 DX는 데이터를 디지털화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자동화하는 단계였다. 이에 비해 AX는 조직의 의사결정과 운영 자체를 AI 중심으로 재편하는 단계다. 단순한 기술 도입이 아니라 기업 구조와 산업 구조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이다. 한국 기업들은 DX 단계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AX 단계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전환이 시작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틱 AI로 이어지는 기술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AI가 단순히 콘텐츠를 생성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 업무를 수행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산업 경쟁의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 여기서도 한국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기술 강국이지만 동시에 기술 중간지대에 서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갤럭시 26이 보여준 모습도 바로 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초강대국과 동일한 방식으로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기술 경쟁에서 주변 국가로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이 가진 강점을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바로 제조 기반 산업과 첨단 기술을 결합하는 전략이다. 반도체, 배터리, 로봇, 자동차, 조선 등 한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에 AI와 데이터 기술을 결합하면 새로운 산업 경쟁력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것이 한국형 기술 미들파워 전략의 현실적인 방향일 것이다. 이 얘기도 실은 귀가 닳도록 듣고 있다.
전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실행력이다. 최근 정부와 기업의 발표를 보면 ‘AI 강국’, ‘디지털 강국’, ‘첨단 산업 선도국’과 같은 거창한 목표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선언적 구호에 머물러서는 의미가 없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화려한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이다.
과학기술 정책과 산업 정책이 실제 기업과 연구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개발 투자, 인재 양성, 규제 혁신, 산업 생태계 구축 같은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특히 AI와 반도체, 배터리, 로봇 같은 전략 산업에서는 정책의 속도와 실행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갤럭시 26을 사용하며 떠올린 질문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과연 어떤 기술 국가가 될 것인가. 이 질문을 생각하던 중 며칠 전 폐막한 중국의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회의에서 중국 정부가 가장 강조한 정책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기술과 AI였다.
중국은 이번 전인대에서 AI, 반도체, 양자기술, 첨단 제조를 국가 경쟁의 핵심 분야로 다시 한번 분명히 언급했다. 특히 ‘AI+’ 전략을 통해 AI를 제조업, 의료, 교통, 금융 등 산업 전반에 빠르게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동시에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구축과 데이터 활용 확대, 핵심 반도체 기술 자립을 위한 국가 차원의 투자를 계속 확대하겠다는 방침도 확인했다.
눈에 띄는 점은 정책의 방향이 매우 분명하다는 것이다. AI를 단순한 기술 산업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 개발과 산업 적용, 데이터 정책과 컴퓨팅 인프라를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묶어 추진하고 있다. 물론 중국의 방식이 그대로 한국에 적용될 수는 없다. 정치·경제 체제도 다르고 산업 구조도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는 있다. 기술 경쟁의 시대에는 정책과 실행의 속도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기술 질서를 만드는 국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나라가 만든 기술 질서를 따라가는 국가가 될 것인가. 갤럭시 26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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