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스타힐스

중국의 일곱번째 총리 리커창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3-03-15 14:48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아주경제 베이징 특파원 조용성 기자 = 15일 총리로 선출된 리커창(李克强)은 중국의 7번째 국무원 총리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후 초대총리는 중국혁명의 주역인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저우언라이는 1949년 10월 정무원 총리에 올랐다. 이후 1954년 헌법에 의해 전인대는 마오쩌둥(毛澤東)을 국가주석에, 저우언라이를 국무원 총리로 선출했다.

저우언라이는 그가 사망하던 1976년1월까지 27년동안 총리직을 수행했다. 많은 혁명의 주역들이 반대파로 몰려 숙청당했지만 저우언라이는 낮은 자세와 청렴한 생활, 인민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명실공히 중국의 2인자로 활약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속에서도 그는 총리로서 자리를 지키며 더 큰 재앙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가 사망하던 날 중국인민들은 눈물을 감추지를 못했다.

저우언라이에 이어 총리에 오른이는 화궈펑(華國鋒)이다. 그는 1980년까지 총리직을 지켰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은 1978년 11기3중전회 이후 소멸한 상태였다. 그로서는 막아내기 버거운 덩샤오핑(鄧小平)이라는 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궈펑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980년 결국 사임하고 만다.

이어 덩샤오핑이 낙점한 자오쯔양(趙紫陽)이 총리에 오른다.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집정철학에 맞춰 중국의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이 실각하면서 자오쯔양은 1987년 총리에서 총서기로 자리를 이동한다. 하지만 자오쯔양은 1989년 톈안먼사태때 시위학생에 동조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역시 실각하고 만다.

1987년에는 저우언라이의 양자인 리펑(李鵬)이 총리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 총리에 오른 리펑 역시 개혁개방을 가속화했다. 하지만 1989년 톈안먼사태가 발발했고 리펑은 이를 무력진압하는데 동참한다. 리펑은 1998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한 후 전인대 상무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바통을 넘겨받은 이는 주룽지(朱鎔基) 총리다.

주룽지는 1998년 총리에 올랐지만 1993년 상무부총리 시절부터 경제정책 전반을 진두지휘했다. 넘치는 카리스마와 명확한 비전제시, 뛰어난 경제운용능력으로 관료사회를 휘어잡고 개혁개방에 박차를 가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관료들에게 불호령하던 모습은 아직도 중국인민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주룽지 집정 5년동안 중국은 많은 개혁을 이뤄냈으며 향후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이어 원자바오(溫家寶)총리 체제가 들어섰다. 주룽지가 선일 굵고 남성적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총리였다면 원자바오는 옆집 아저씨같은 친근한 인상의 친서민 총리였다. 원자바오 집정 10년동안 중국은 세계경제 G2로 떠올랐고 새로운 세계의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15일 리커창이 중국의 제7대 총리로 선출됐다. 리커창의 어깨에는 안정적인 성장, 경제구조전환, 분배구조개선, 민생복지확충, 글로벌 영향력 확대 등의 과제가 놓여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아주NM&C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