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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건의 심리렌즈 '나는 솔로' 32기 영숙은 왜 영수를 끝까지 몰아붙였을까?
▲ 본 코너는 개인에 대한 비난이나 낙인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연애 예능·리얼리티에 드러난 장면과 선택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심리와 관계 구조를 해석합니다. SBS Plus, ENA '나는 SOLO' 32기 출연자 영숙과 영수의 갈등은 술자리에서 시작됐다. 앞서 영숙은 영수에게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이어진 랜덤 데이트에서 영수는 다른
이동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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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의 자투리 리뷰 당혹스러울 만큼 텅 빈 '호프'의 서사는 무엇을 향하고 있나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고범석 “내가 머릿속이 정리가 안돼. 그냥 내 마음이 이상해서 그래.” 영화를 본 필자의 마음도 그렇다. 정리가 안되고 이상하다. 정확하게 취향 저격을 당한 나홍진 감독의 전작 ‘곡성’ 때문에도 더 그렇다. ‘곡성’은 인간의 생과 사를 한가한 낚시질 한번으로 가르는 악의 무차별한 업을 다뤘다. 무자비한 무차
이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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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의 아는 맛 수박 비켜라…올여름 제철코어 주인공은 '참외'
‘메치니코프' 신제품 '성주참외 그릭' 국내산 참외가 일본에서 디저트와 음료의 주인공으로 변신하며 '제철코어' 트렌드의 중심에 섰다. 도쿄 유명 카페에서 참외 관련 한정 메뉴가 판매되고, 대형 유통매장에서도 시식 행사가 이어지는 등 '코리안 멜론'으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20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국내산 참외는 최근 일본 시장에서 차세대
김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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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기자는 왜 손흥민을 욕했을까?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 손흥민을 향한 취재진의 욕설 파문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훈련을 지켜보던 두 기자가 손흥민에게 여과 없는 말을 뱉었고, 그 음성이 카메라에 고스라히 담긴 것. 해당 영상이 확산되며 논란이 커지자 JTBC 측은 영상을 비공개 처리한 뒤 발언이 삭제된 편집본을 재게시했다. 이번 논란을 들여다보기 전 분명히 해둘 점은, 우리가 두 남성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손흥민에게 열등감을 느꼈는지, 병역 특례에 반발심을 풀었는지, 현장에서 어떤 불만을 겪었는지 단정할 수 없다. 업계 밖에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기자라는 직업을 재판하기 위해 두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려는 것도 아니다. 비슷한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그들의 감정을 추측해볼 뿐이다. 취재 대상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 현장을 안다는 자부심, 팬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모든 게 어느 순간 냉소로 흐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가까이서 보고 평가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마음을, 본인을 포함해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말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에는 그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 자존심을 지키는 습관이 묻어난다. 대화 속 그들은 손흥민의 슈팅이나 경기력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꺼낸 말은 '군대'였다. 손흥민을 향한 취재진의 욕설이 담긴 영상 "주장이라고 소대장 뛰듯이 뛰는 건가." "군대도 안 갔다 온 XX들이." "군대의 '군' 자도 모르는 XX들." 짧은 대화지만 꽤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축구장의 주장을 병영의 소대장으로 바꾸는 시선, 군필 경험을 도덕적 우위처럼 사용하는 태도, 압도적인 스타를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좁은 기준 안으로 끌어들이는 심리, 남성들끼리 서로 으스대며 조롱을 주고받는 문화까지. 단순한 설명을 할 수도 있다. 현장은 덥고, 대기는 길었을 수 있다. 월드컵 현장 취재는 피곤할 수 있다. 낯선 도시, 빡빡한 동선, 제한된 접근, 취재 경쟁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더위와 피로는 말의 문턱을 낮춘다. 평소라면 속으로 삼켰을 짜증이 입 밖으로 새어나올 수 있다. 하지만 날씨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불쾌감이 있었다면 그건 왜 하필 군대의 언어로 나왔을까. 피곤했다면 왜 그 피곤함은 국가대표 주장에게, 그것도 병역 경험을 조롱하는 말로 이어졌을까. ▲ 냉소를 전문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기자는 직업적으로 대상을 가까이서 본다. 훈련장을 보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표정을 읽고, 몸짓을 관찰한다. 반복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평가는 때때로 이상한 착각을 만든다. '나는 팬이 아니다.' '나는 저 사람을 안다.' '나는 저 사람의 민낯을 본다.' 건강한 거리감일 수 있다. 기자는 팬처럼 감탄만 해서는 안 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보고,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감탄하지 않는 태도를 전문성으로 착각하고, 냉소를 통찰처럼 여기게 된다. 팬은 감탄하고 기자는 판단한다고 믿는 것이다. 가까이서 본다는 게 더 깊이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복적인 관찰은 사람을 대상화하기 쉽다. 선수는 사람이 아닌 기사 재료가 되고, 인터뷰이는 코멘트 공급원이 되고, 스타는 취재 동선 안의 자원이 된다. 손흥민 같은 선수는 더 그렇다. 그는 한국 축구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기사와 조회수의 원천이다. 기자는 그에게 기대어 기사를 쓴다. 손흥민이 뛰어야 기사가 나오고, 손흥민이 말해야 멘트가 생기고, 손흥민이라는 이름이 있어야 독자의 눈길이 온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의존하는 존재 아래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취재 대상에게 기대면서도 말로는 그를 낮춘다. 그를 작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작지 않다고 느끼려 할 수 있다. 전문가 의식의 그림자다. 취재권은 권력이 아니고, 접근권은 우월감의 근거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이 자주 보는 사람을 과소평가하고, 익숙함은 존경을 무디게 만든다. 선수와 같은 공간에 있고, 훈련을 보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경기 전후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면 자신도 그 세계의 일부라는 착각을 가진다. 손흥민을 향한 조롱 역시 취재 대상에게 의존하면서도 그 위에 서고 싶은 직업적 이중감정이 드러난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 허세의 본질: 타인을 낮춰야 겨우 서는 자존감 손흥민은 한국 축구에서 너무도 큰 이름이다. 대표팀 주장이자 한국 축구의 얼굴이고, 세계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해온 선수다. 그런 사람을 정면으로 깎아내리기는 쉽지 않다. 축구 실력으로 공격하기도 어렵고, 커리어로 무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다른 기준을 찾는다.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기준, 적어도 자기 안에서는 "그래도 이건 내가 더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 두 기자에겐 그 기준이 군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감은 남을 깎아내리지 않아도 서지만, 허세는 누군가를 낮춰야 선다. "나는 군대 갔다 왔다"는 말이 건강한 자부심이라면 타인을 욕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불안정하면 과시가 된다. 더 세게, 거칠게, 낮잡아 말해야 자신의 위치가 확인된다. 손흥민이 별것 아니어서 조롱한 게 아니라, 너무 큰 사람이라서 조롱해야 했을 수 있다. 누군가를 인정하면 내가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상대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대신 흠집을 찾고, 그 흠집을 확대한다. 그리곤 말한다. "그래도 저 사람은 이걸 모르잖아." 그들은 손흥민을 낮춰서 자신을 높이려 했던 게 아니라, 어쩌면 이미 작아진 자신을 견디기 위해 손흥민을 낮춰야 했을지도 모른다. ▲ 경험 독점 심리 "주장이라고 소대장 뛰듯이 뛰는 건가"라는 말은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말은 손흥민을 축구대표팀 주장으로 보지 않는다. 발화자는 손흥민을 자신에게 익숙한 병영 세계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축구장의 주장은 그의 입에서 소대장이 되고, 월드클래스 선수의 몸짓은 군대식 조롱 코드가 된다. 이어진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은 손흥민의 자격을 빼앗는 말이다. "너는 우리가 겪은 세계를 모른다", "너는 그 고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완전히 인정받을 수 없다"는 식의 서열 의식이 깔려 있다. 손흥민이 축구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뤘든, 이 말 안에서 그는 '군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축소된다. 경험 독점 심리는 내가 겪은 것이 진짜 고생이고, 내가 아는 것이 진짜 세계이며,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것을 모르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태도로 나온다. "군대의 '군' 자도 모르는"이라는 표현은 상대의 무지를 선언한다. 손흥민의 축구 인생, 훈련, 책임감, 압박감, 국가대표로서의 희생은 지워진다. 남는 건 하나다. "너는 우리가 겪은 군대를 모른다." 두 기자는 손흥민의 커리어를 부정하기 어려웠을 테다. 대신 자신들이 독점한 경험을 꺼냈다. 병역 문제는 손흥민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소재였을지 모른다. 축구장에서는 손흥민이 주장이지만, 군대 이야기에서는 자신들이 선임이 된다. ▲ 고생의 권력화 군대는 어떤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말할 만한 고생담이 되고, 자기 정체성을 지탱하는 자부심이 된다. 단 그 자부심이 타인을 내려치는 도구가 될 때, 고생은 기억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군대는 억울함이면서 자랑이고, 고생이면서 훈장이고, 상처이면서 자격증이다. '내가 그걸 견뎠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 '그러니 나는 말할 수 있다'는 권한이 된다. 군 경험이 자기 내부에서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고 느낄수록, 그 경험을 더 세게 붙든다. 내가 겪은 고생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면 너무 허무하니, 그 고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군대를 도덕적 자산으로 만든다. 그런 사람에게 병역 특례를 받은 스타는 불편한 존재일 수 있다. 군대에 오래 가지 않았는데도 사랑받는다. 내가 겪은 시간을 겪지 않았는데도 박수받는다. 그는 국민적 영웅이고, 나는 평범한 군필자다. 이 비교는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한다. 이런 감정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감의 얼굴로 누군가를 응징하려 한다.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은 그렇게 박탈감을 도덕적 비난으로 포장한다. 손흥민은 한국 축구를 위해 뛰었고, 국제대회 성과로 병역 특례를 받았다. 법과 제도 안에서 주어진 혜택이다. 제도적으로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모두가 납득하는 건 아니지만. 특히 군대처럼 개인의 청춘, 시간, 자존심, 억울함이 뒤엉킨 경험에서는 더 그렇다. 누군가의 특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생이 무가치해지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손흥민의 성취를 인정하는 대신, 그를 "군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나온다. ▲ 남성들끼리 주고받는 공모의 말 이번 대화가 혼잣말이 아니라 두 기자의 주고받기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 사람이 "소대장 뛰듯이"라는 군대 농담의 문을 열자, 다른 사람은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로 수위를 올린다. 누군가를 같이 비웃는 동안, 두 사람은 같은 편이 된다. "너도 알지?" "우리끼리는 통하지?" "우리는 저 세계를 알잖아" 이들의 말은 서로를 향해 있었다. 이때 손흥민은 두 남성이 자기들끼리 유대를 확인하는 재료가 된다. 군대 농담은 이런 방식으로 자주 쓰인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 사이에서는 몇 마디만으로도 공통의 기억이 열린다. 소대장, 간부, 뜀걸음, 얼차려, 점호 같은 말들…설명이 필요 없다. 남성들 사이의 빠른 접속 코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부적인 농담에서 그치는 편이 낫다. 사적인 유대 언어가 공적 현장에서, 선수 개인을 향한 조롱으로 튀어나올 때 그건 더이상 농담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식의 공모는 수위를 키운다. 혼자였다면 지나쳤을 말이 옆 사람의 반응을 만나 더 거칠어진다. 첫 발언은 장난처럼 시작됐을 수 있다. 두 번째 발언은 그 장난에 욕설을 얹었다. 농담이 조롱이 되고, 조롱이 모욕이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 무대 뒤의 언어 이 사건이 더 씁쓸한 이유는 발언자들이 그 말을 사담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옆 사람과 툭 던지는 말, 현장 주변에서 흘러가는 농담…하지만 사적인 말이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무대 뒤라고 믿었던 말이 무대 앞으로 흘러나온 이번의 사건에는 손흥민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 국가대표 주장이 아니라 병영 농담의 소재, 세계적 선수가 아니라 군대를 모르는 사람. 영상에 담긴 건 그 시선이었다. 손흥민은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너무 큰 사람이었을 것이다. 너무 멀리 있고, 너무 많은 박수를 받고,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그래서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세계로 끌고 들어왔다. 그 세계의 이름은 군대였고, 어쩌면 현장이었고, 어쩌면 기자라는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두 남성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말은 들을 수 있다. 그 말에는 피로와 불만, 허세가 뒤섞여 있었을지 모른다. 평범한 훈련 장면에서조차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의 자리에 놓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 감정은 손흥민을 깎아내리는 말로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손흥민보다, 그 말을 뱉은 사람들의 세계를 더 많이 드러냈다.
이동건 기자 -
'디스클로저 데이'는 왜 "Listen"으로 끝날까?외계 생명체의 존재, 비밀 조직의 은폐, 내부 고발, 추격전, 전 세계 생중계, 인류의 운명을 바꿀 폭로. 재료만 놓고 보면 당연히 거대한 SF 스릴러여야 한다. 관객은 숨겨진 파일이 열리고, 정부와 민간 권력이 무너지고, 외계인의 진짜 목적이 드러나고, 폭로 이후 세계가 어떻게 재편되는지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거대한 폭로를 준비하는 척하다가,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세계의 격변을 보여주지 않는다. 외계인의 정체도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폭로 이후 사회가 어떤 혼란에 빠졌는지도 다루지 않는다. 단지 인물들을 뉴스 스튜디오 앞으로 데려간 뒤, 한마디를 남긴다. "Listen." 관객의 입장에서는 허탈할 수 있다. 여기까지 끌고 와놓고 고작 그 말이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럴 만하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미스터리를 걸어놓고 미스터리를 해소하는 영화가 아니다. 음모론 구조를 빌려왔지만, 음모론의 쾌감을 주는 영화도 아니다. 폭로를 소재로 삼았지만, 폭로 전후의 세계를 정교하게 그려내는 정치 스릴러도 아니다. '디스클로저 데이'의 진짜 관심은 외계인도, 진실도 아니다. 진실이 드러났을 때 인간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다. 외계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침입자가 아니라, 인간이 오래 외면해온 진실의 형상이다. 그 진실이 문을 두드릴 때 인간은 환영하지 않는다. 먼저 숨긴다. 부정한다. 통제한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 역할을 맡는 게 비밀 조직 워덱스다. 워덱스는 인간의 방어기제가 조직의 형태를 얻은 모습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깊숙한 곳에 가두고, 그 진실이 밖으로 새어나오려 할 때마다 폭력적으로 봉합한다. 노아 스캔런(콜린 퍼스)은 그 방어기제의 관리자다. 그는 진실을 숨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를 보호한다고 믿는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무의식적 전략을 뜻한다. 부정, 억압, 합리화, 투사 같은 방식이 대표적이다. 방어기제가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너무 큰 충격을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음에도 완충 장치가 필요하고, 모든 진실을 즉시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방어가 오래 지속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처음에는 자아를 보호하던 장치가 어느 순간 현실을 왜곡하는 감옥이 된다. 노아가 그렇다. 그는 외계인의 존재를 숨기고, 통제하고, 가두고, 폭력으로 막는다. 그의 언어는 언제나 보호와 책임이다. 그는 자기 확신에 갇혀 있다. "당신은 당신이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스필버그는 이 질문을 너무 순진하게 밀어붙인다. 그래서 영화는 아름답고도 헐겁다. 좋게 말하면 동화고, 나쁘게 말하면 아이들 이야기다. 늑대 배를 가르면 아이들이 멀쩡히 튀어나오고, 마녀의 과자집을 탈출하면 숲이 끝나는 세계. 현실의 폭력과 권력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데, 스필버그는 끝내 해피엔딩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어쩌면 그게 노년의 스필버그가 붙들고 있는 마지막 신앙일지 모르겠다. 세상은 엉망이지만, 인간은 아직 서로를 들을 수 있다는 믿음. 마거릿(에밀리 블런트)과 다니엘(조쉬 오코너)은 진실이 공개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구도만 보면 영화는 '더 포스트'의 SF 버전처럼 보인다.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사람들, 그 진실이 불러올 혼란을 걱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알 권리와 질서 사이의 충돌. 영화는 이 어른스러운 딜레마를 끝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 폭로가 왜 인류에게 그렇게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지, 공개 이후 어떤 파장을 낳는지,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충격이 어떤 방식으로 번져가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폭로를 걱정하던 다니엘 연인의 시선은 중반 이후 힘을 잃는다. 처음에는 중요한 균열처럼 제시되지만, 어느 순간 영화는 그 질문을 접어두고 마거릿과 다니엘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스필버그는 세계의 붕괴보다 개인의 붕괴에 관심이 있다.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재편되는가보다, 한 인간이 방어를 어떻게 내려놓는가에 눈길을 보낸다. 그래서 영화의 중심은 외계인 엑스파일이 아니라 마거릿과 다니엘의 마음속이다. 그들이 무엇을 밝히는지보다, 그들이 무엇을 마주하게 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선택이 호불호를 가른다. SF 스릴러를 기대한 관객에게 이 영화는 배신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지와의 조우', 'E.T.', '우주전쟁'을 만든 스필버그가 다시 외계인을 들고 왔다면 경이와 공포, 스케일과 미스터리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디스클로저 데이'의 외계인은 장르적 쾌감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외계인은 '거울'이다. 인간이 외면해온 것을 비추고, 인물들이 눌러온 감정을 흔들고, 방어기제 뒤에 숨은 상처를 바라보게 만든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시선이다. 다니엘은 사슴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말한다. 눈을 돌리지 않는다고. 그러나 사진을 찍으려 하면 도망간다. 이 이미지는 영화 안에서 반복된다. 동물이 사람을 바라본다. 외계인이 동물의 형상을 빌려 나타난다. 그들은 공격하지 않는다.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이 시선은 심리적으로 중요한 메타포다. 누군가를 진짜로 바라보는 일은 그 사람의 방어를 건드린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을 꾸미고, 숨기고,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하지만 말없이 오래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는 설명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그때 남는 건 자아가 애써 밀어냈던 감정이다.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상실감, 외로움 같은 것들…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외계 존재는 인류를 정복하러 온 침략자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회피하지 못하게 만드는 응시의 존재다. 말하자면 우주에서 온 상담자다. 마거릿과 다니엘은 세상의 비밀을 폭로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자기 안의 봉인을 풀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외부의 음모를 파헤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접근한다. 반복되는 두 사람의 호흡곤란은 그 반작용이다. 불안은 호흡으로 돌아오고, 억압은 떨림으로 새고, 상처는 어느 날 아무 상관없는 장면에서 불쑥 올라온다. 스필버그는 이 과정을 지나치게 친절하게 보여준다. 방어기제, 상처, 회피, 각성, 연대. 심리 상담의 단계처럼 인물들을 배치한다. 그래서 어떤 관객에게는 감동적이고, 어떤 관객에게는 설명 과잉처럼 느껴질 것이다. 영화가 다소 산만해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국제 문제, 종교, 음모론, 내부 고발, 외계 생명체, 핵전쟁의 위기, 개인의 트라우마, 공감과 연대.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스필버그는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공감 능력은 어디로 갔는가." 이 물음은 '디스클로저 데이'의 심장이다. 스필버그가 외계인을 다시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같은 종끼리도 서로를 듣지 못한다. 종교, 인종, 국가, 계급, 이념, 두려움, 자기 확신. 자신과 다른 존재를 만나면 이해하기보다 분류한다. 분류한 뒤에는 방어한다. 방어한 뒤에는 공격한다. 이 영화의 워덱스가 외계인을 가둔 방식은 현실의 권력이 낯선 존재를 다루는 방식과 닮아 있다. 먼저 이름 붙이고,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격리하고, 통제한다. 그 모든 폭력은 언제나 '인류를 위해'라는 말로 시작된다. 스필버그는 그 반대편에 경청을 놓는다. 경청은 착한 태도의 문제는 아니다. 심리적 용기의 문제다. 듣는다는 건 내가 가진 세계관이 흔들릴 수 있음을 허락하는 일이다. 내가 옳다고 믿어온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그래서 사람은 잘 듣지 못한다. 듣는 척은 쉽다. 반박하기 위해 듣고, 공격하기 위해 듣고, 내가 이미 정한 결론에 맞추기 위해 듣는다. 진짜로 듣는 순간, 자아는 안전하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 "Listen"은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면서, 인물들의 마음을 통과한 결론이다. 마거릿은 누군가의 종교가 되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진실의 주인이 아니라 전달자라는 것을 안다. 현대사회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둘 다 타인을 제대로 듣지 않는 방식이다. 위험하다. 숭배는 상대를 인간 이상으로 만들고, 혐오는 상대를 인간 이하로 만든다. 둘 다 인간을 지운다. 마거릿은 그 투사의 자리를 거부한다.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 통로다. 모세와 아론을 떠올리게 하는 두 주인공, 파라오처럼 진실을 독점하는 노아, 12명의 내부 고발자, 성흔을 연상시키는 상처, 방언과 오순절을 떠올리게 하는 클라이맥스까지. '디스클로저 데이'는 기독교적 상징을 노골적으로 흩뿌리지만, 그 모든 상징이 도달하는 말은 하나다. "Listen." 이 종교성은 영화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기독교적 전통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영화가 꽤 풍성한 알레고리로 보일 수 있다. 외계인은 신의 대체물이 아니라 계시의 매개체처럼 다가온다. 인간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가 먼저 다가와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은 그 계시를 감당해야 한다. 심리적 각성의 측면에서 봤을 땐 무의식에 가둬둔 진실이 의식의 문턱까지 올라와 말을 거는 이야기다. 계시든 자각이든, 내가 만든 세계 바깥에서 무언가가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디스클로저 데이'는 그려낸다. 이 코드에 익숙하지 않거나, 보다 세속적인 SF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영화가 지나치게 설교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잘 들으세요"라는 한마디는 어떤 이에게 영화를 관통하는 아름다운 초대지만, 어떤 이에게는 거장이 칠판 앞에 서서 생활지도를 하는 장면처럼 느껴질 수 있다. "스필버그 선생님, 외계인이 뭐라고 했는지는 알려주셔야죠" 하며 따지고 싶을 수도 있다. 영화는 궁금증을 남겨둔다. 외계인이 어디서 왔는지, 왜 인류 앞에 나타났는지, 무엇을 경고하려 했는지, 공개 이후 세계는 어떻게 변했는지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의 욕망은 다르다. 문이 열리면 방 안을 보고 싶다. 스필버그는 문을 열어놓고 말한다. 이제 네가 들어라. 관객은 대답한다. 그 전에 방 안 조명부터 좀 켜주세요. 젊은 시절의 스필버그는 외계인을 통해 경이를, 가족을, 공포를 말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를 통해 경청을 말한다. 그의 외계인은 이제 하늘에서 내려오는 스펙터클이 아니다. 인간의 닫힌 마음 앞에 놓인 질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주보다도 타인의 목소리를 두려워한다. 타인의 목소리를 들은 뒤 이전의 나로 남을 수 없다는 사실도. "너희는 아직 서로 들을 수 있는가." 노년의 슬픔이 묻어나는 질문이다. 세상을 오래 본 사람이 가지는 피로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고집이 있다. 스필버그는 인간을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순진하고, 장황하고, 설교적이다. 세상이 냉소를 보일 때 동화적인 언어로 인간에게 말을 건다. 늑대의 배를 가르면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노인. 촌스럽다. 하지만 그 촌스러움이야말로 갖기 어려운 태도다. 그래서 영화는 심리적 여정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외계인의 존재는 억압된 진실, 워덱스는 방어기제, 노아는 자기 정당화다. 마거릿과 다니엘은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려는 내면의 목소리다. 사슴의 시선은 회피할 수 없는 자기 응시다. 추격전은 진실이 드러나기 전 자아가 벌이는 마지막 저항이다. 마지막 생중계는 고백이다. 타인에게 던지는 말이기 전에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다. 들어라. 네 안에서 오래 도망치던 목소리를, 네가 통제라는 이름으로 가둬둔 두려움을, 네가 신념이라고 불러온 방어를, 네가 안전을 위해 지워버린 타자를… '디스클로저 데이'의 폭로는 세계를 향한 폭로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폭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 진실은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 먼저 개인의 내부에서 들린다.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파일이 열려도 달라지지 않는다. 외계인이 눈앞에 서 있어도 그는 새 증거를 찾고, 새 통제 장치를 만들고, 새 감옥을 설계할 테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스필버그는 외계인의 말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오래 외면해온 인간의 말을 다시 들려줬을 뿐이다. "Listen."
이동건 기자 -
단 1초 만에 300조가 움직인다…26일 밤 펼쳐질 증시판 '지옥의 이삿날'생성형 AI 이미지. 글로벌 금융시장의 시선이 태평양 건너 미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역대급 자금 대이동의 서막이 올랐기 때문입니다. 미국 현지 시간으로 오는 26일 금요일 장이 끝나기 직전(한국 시간으로는 27일 토요일 새벽), 글로벌 금융 시장에는 1년 중 가장 거대한 '의자 빼앗기 게임'이 시작됩니다. 단 1초 사이에 수백조원의 주인이 바뀌는 이 날의 정체는 바로 미국의 주가지수인 '러셀(Russell) 지수 리밸런싱(정기 변경)' 날입니다. 특히 올해는 지난 40여 년의 역사 중 가장 혹독하고 예민한 이삿날이 될 전망입니다. 도대체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이 왜 이토록 긴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투자자들은 주말 새벽에 터지는 이 거대한 돈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들여다 보겠습니다. '러셀 지수'가 뭐길래? 11조 달러 대청소의 서막 러셀 지수는 1984년 미국의 러셀 인베스트먼트가 창안하고 현재는 런던증권거래소그룹(LSEG) 산하 FTSE 러셀이 발표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주가지수입니다. 쉽게 말해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들을 시가총액 순으로 1등부터 3000등까지 일렬로 줄 세워 놓은 미국 증시 등급표입니다. 미국 시장 전체를 아우르는 이 등급표의 이름이 '러셀 3000'입니다. 여기서 1등부터 1000등까지의 대형주가 모인 방을 '러셀 1000'이라 부르고 나머지 1001등부터 3000등까지의 중소형 기업 2000개를 모아놓은 방을 '러셀 2000'이라고 부릅니다. 흔히 시장에서 "러셀 지수가 올랐다"고 말할 때는 보통 이 중소형주 중심의 '러셀 2000'을 의미합니다. 체급을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흔히 미국 증시라고 하면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빅테크 공룡들만 떠올리기 쉽지만 러셀 2000에 속한 기업들은 철저하게 미국 본토의 내수 시장을 지탱하는 알짜 중소기업들입니다. 전체 미국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은 약 10% 수준에 불과하죠. 지수 산출 기관인 FTSE 러셀의 분석에 따르면 대형주 중심의 러셀 1000 기업들은 전체 매출의 39.39%를 해외 시장에서 벌어들이는 반면, 러셀 2000 중소기업들의 해외 매출 비중은 그 절반 수준인 19.78%에 불과합니다. 즉 매출의 80% 이상이 미국 국내 경제 안에서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글로벌 거대 기술주들은 전 세계적인 지정학적 긴장이나 세계화 둔화(탈세계화) 리스크에 부딪혀 흔들릴 수 있지만 러셀 2000 기업들은 철저하게 미국 현지 실물 경기와 고용, 내수 소비의 흐름에 따라 움직입니다. 전문가들이 이 지수를 미국 실물 경제의 가장 순수한 바로미터라고 부르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학교에서 성적에 따라 우열반을 나누듯 지난 1년간 덩치를 키운 중소형 기업은 대형 리그(러셀 1000)로 승격하고 시총이 낮아진 대형 기업은 중소형 리그로 강등되는 성적표가 최종 적용되는 날이 바로 이번 주말입니다. 문제는 이 등급표를 그대로 복사해서 투자하는 전 세계 패시브 펀드(기계적 자금)의 규모가 무려 11조 달러, 우리 돈으로 자그마치 약 1경7000조원에 달한다는 점입니다. 이 거대한 기계적 자금들은 등급표가 바뀌면, 바뀐 명단에 맞춰서 기존 주식을 팔고 새 주식을 무조건 사야 합니다. 여기에 올해 펀드매니저들을 멘붕에 빠뜨린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세계적인 파생상품 거래소인 CME 그룹의 지난 달 보고서에 따르면 러셀 지수는 2026년 올해부터 재편성 주기를 기존 연 1회(6월)에서 반기별(연 2회, 6월과 12월)로 변경했습니다. 1년에 한 번 하던 대청소를 이제 6개월마다 두 번씩 하라는 지침이 떨어진 것이죠. 주식 시장의 최신 변화를 빠르게 반영하겠다는 취지이지만 1년에 한 번 겪던 대규모 자금 재편성을 6개월마다 치러야 유지가 됩니다. 자금을 조정할 때마다 매니저들이 감내해야 하는 운영상의 난관과 추적 오차 리스크, 그리고 장 막판의 극심한 유동성 수요가 구조적으로 배로 증가하게 된 셈입니다. 피 말리는 1분…단 1초에 터지는 335조원의 전쟁 이 이벤트를 증권가에서 '의자 빼앗기 게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리는 딱 2000개로 한정돼 있고 누군가 새로 자리를 차지해 앉으면 기존에 앉아있던 기업은 튕겨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장 마감 버저가 울리는 단 1초의 찰나에 바뀐 의자를 정확히 찾아 앉지 못하면 수백억원의 손실을 보는 타임어택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지수가 바뀌는 최종일, 전 세계 펀드매니저들의 목표는 대박 수익이 아닙니다. 오직 '러셀 지수의 종가'와 '내가 주문을 체결시키는 가격'을 소수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맞추는 것, 즉 추적 오차의 최소화가 최우선 과제입니다. 문제는 대규모 자금을 한꺼번에 집행하다 보면 시장에 일시적인 유동성 충격이 발생해 처음 의도했던 가격보다 불리한 가격에 주문이 체결되는 슬리피지 현상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주문 집행이 단 찰나의 순간이라도 매끄럽지 못해 원하는 가격을 놓치고 매매 단가가 미끄러지면 수조원을 굴리는 매니저들에게는 소수점 단위의 오차만으로도 수십억원의 거대한 추적 오차 손실로 이어집니다.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싸움입니다. 이 때문에 패시브 자금들은 장중 매매를 극도로 자제하면서 눈치싸움을 벌이다가 당일 종가로 전량 체결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장 마감 동시호가 세션에 수백조원에 달하는 매물을 기계적으로 집중 집행하게 됩니다. 그 엄청난 체급은 숫자로 고스란히 증명됩니다. 세계적인 파생상품 거래소인 CME 그룹이 집계한 나스닥과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과거 리밸런싱 당일 거래 대금 데이터를 살펴보면 그 흐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먼저 지난 2023년 6월 리밸런싱 날에는 장이 끝나기 직전 동시호가 타이밍에 두 거래소를 합쳐 약 1344억 달러의 거래가 터졌습니다. 그런데 불과 1년 뒤인 2024년 6월에는 이 수치가 2196억 달러로 그야말로 폭발하듯 급증했죠. 가장 최근인 지난해 2025년 6월에도 장 마감 직전 단 몇 분 동안 무려 2172억 달러의 거대한 자금이 오갔습니다. 매년 장 마감 직전에만 2100억 달러 안팎의 매물이 쏟아지는 구조가 완전히 정착된 셈입니다. 지난해 기록인 2172억 달러를 요즘 무섭게 치솟은 원·달러 환율(1542.7원 선)로 환산해 보면 자그마치 약 335조원에 달하는 거금이 됩니다. 대한민국 정부 1년 예산의 절반을 넘보는 엄청난 돈이 장이 끝나기 직전 단 몇 분, 혹은 1초의 찰나에 기계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주인을 바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최근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은 장 마감 시점에 수천개에 달하는 소형주 현물을 일일이 매매하는 운영상 부담을 덜기 위해 CME 그룹의 러셀 지수 선물 시장이나 종가지수 베이시스 거래(BTIC) 같은 효율적인 체결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의 이러한 움직임을 역이용하려는 수급 역시 치열합니다. 패시브 자금이 지수 편입 종목을 가격과 관계없이 기계적으로 매수·매도해야만 하는 약점을 노리기 때문입니다. 특히 FTSE 러셀은 최종 리밸런싱 한 달 전부터 예비 편입·편출 목록을 매주 업데이트하며 시장에 힌트를 주는데, 헤지펀드 등 투기적 거래자들은 이 예고 기간을 활용해 새로 편입될 소형주들을 미리 선점하며 길목을 지킵니다. 그리고 리밸런싱 당일 장 막판, 패시브 펀드가 종가 체결을 위해 무조건 매수해야 하는 타이밍에 맞춰 물량을 넘기며 이득을 취하는 차익거래 전략을 활발히 가동합니다. 기관들의 정밀한 파생상품 방패와 헤지펀드의 날카로운 차익거래 창이 리밸런싱일 장 막판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셈입니다. 주말 새벽에 터지는 미국 이삿날, 국장(K-증시) 흔들 나비효과는? 여기서 동학 개미들은 당연히 의문이 들 것입니다. "미국 장이 끝나는 건 우리 시간으로 토요일(27일) 새벽인데, 이미 문 닫고 쉬고 있는 한국 증시(국장)에 무슨 수급 교란이 생긴다는 거지?" 아주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 시장은 서로 촘촘히 묶여 있으며 이 후폭풍은 시차를 두고 우리 증시를 타격할 수 있습니다. 첫째, 당장 금요일 낮(26일)의 실탄 확보 매도입니다.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은 토요일 새벽 미국 대이동 때 엄청난 주식을 사들여야 하므로 막대한 현금(실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미국 리밸런싱이 터지기 직전인 26일 금요일 낮(우리나라 정규장 시간)에 한국이나 대만 같은 신흥국 시장에 담아뒀던 주식을 기계적으로 먼저 일부 팔아서 현금을 만듭니다. 금요일 낮 우리 증시에서 외국인들이 유독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식을 던지며 변동성을 키운다면, 이는 미국 야간 시장에서 실행할 대규모 자금 리밸런싱(포트폴리오 재조정)의 선제적인 실탄(현금) 확보 움직임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다가오는 월요일 아침(29일)의 시차 역습입니다. CME 리포트에 따르면 최근 미국 증시에서는 엔비디아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덩치 큰 초대형 기술주 독주 체제에서 벗어나 실물 자산이 탄탄하고 돈을 잘 버는 우량 소형주로 돈이 이동하는 '헤일로(HALO) 트레이드'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미국의 인프라 투자와 공급망 재편(리쇼어링) 수혜를 받는 꽉 찬 알짜 중소기업들의 몸값이 치솟고 있죠. 이번 주말 리밸런싱을 통해 이 우량 소형주들의 지수 내 비중이 대거 상향 조정되고 주말 사이 미국 증시 판도가 요동치면 그 충격파는 주말 동안 그대로 박제돼 있다가 29일 월요일 아침 우리 장이 열리자마자 외국인 수급에 한꺼번에 반영됩니다. 국내 증시에 상장된 미국 소형주 테마 상장지수펀드(ETF)나 관련 인프라·기계·전력주들이 월요일 아침부터 요동치게 되는 진짜 배경입니다. 시장의 일시적 변동성…차분하게 관망하는 지혜 투자자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은 러셀 지수의 재편성으로 인한 기습적인 주가 급등락과 변동성은 해당 기업의 진짜 가치(펀더멘털)가 변해서가 아니라 글로벌 자금들이 기계적으로 자산 비중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기적인 수급 노이즈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기계들의 맹목적인 수급 흐름이 만드는 단기 변동성에 휩쓸려 무작정 뇌동매매에 뛰어들었다간 대형 기관들의 물량 싸움이나 헤지펀드의 차익거래 전략에 휘말려 예상치 못한 투자 손실을 입기 십상입니다. 당장 이번 주말 뉴욕 증시가 큰 폭의 변동성을 보이고, 그 여파로 다음 주 월요일 우리 국장이 다소 불안정하게 출발하더라도 가슴을 졸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글로벌 대형 펀드들이 2026년 첫 번째 반기 지수 재편성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임을 인지하고 시장을 차분하게 관망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양보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