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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의 재테크루 장보기 절반은 온라인…카드 할인 제대로 받으려면
온라인 장보기가 빠르게 확산하면서 신용카드를 선택하는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온라인 쇼핑 이용액의 최대 10~15%를 할인해주는 카드가 늘었지만 전월 이용실적과 월 할인 한도 등을 따지면 표시된 할인율을 모두 적용받기는 쉽지 않다. 28일 신용카드 플랫폼 카드고릴라가 홈페이지 방문자 398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주로 장을 보는 장소로 네이버·컬리·쿠팡 등 온라인을 선택한 응답자는 54.2
이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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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서의 ‘주‘경야독 코앞으로 다가온 거래소 애프터마켓 개설…달라지는 점은
한국거래소가 다음 달 애프터마켓을 새로 열면서 국내 주식시장의 거래시간이 한층 길어진다. 다만 당초 함께 추진했던 프리마켓 도입은 뒤로 미뤄지고, 상장지수상품(ETP)의 애프터마켓 거래도 사실상 보류되는 등 거래시간 확대에 속도 조절이 이뤄지는 모습이다. 2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거래소는 오는 9월 14일부터 애프터마켓을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운영하는 방향으로 확대 개편한다. 현재 해당 시간대에는 대체거래소 넥스트
송윤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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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희의 SNS 속 세상 "주변에서도 걸렸다는 사람 늘었다"…코로나19 재유행 우려
사진=연합뉴스 중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하고 국내에서도 입원환자와 바이러스 검출률이 상승하면서 여름철 재유행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최근 주변에서 코로나19에 걸렸다는 사람이 다시 늘었다"는 경험담과 함께 개인 방역에 신경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방역 당국은 국내 코로나19 관련 지표가 최근 완만하
정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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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에 4점 준 이동진은 왜 욕먹었을까?이동진 평론가는 또 해명했다. 그는 자신의 평가가 대중의 감상과 엇갈릴 때마다 감독과의 친분, 정치적 성향, 영화계의 이해관계가 평론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평론의 논리보다 평론가의 숨은 동기를 먼저 추궁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번에는 영화 '호프'였다. 이동진은 '호프'에 별점 4점을 주고 "기괴한 난장판 속에서 대담하게 질주하는, 영화 전체가 거대한 크레센도"라고 평했다. 이후 '호프'에 대한 관객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면서, 이동진이 왜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줬는지 의심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나홍진 감독과 친분이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부터 감독의 명성에 눌렸다는 추측, 침체된 한국 영화계를 의식해 점수를 후하게 줬다는 의혹까지 나왔다. 결국 이동진은 나홍진 감독과 사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고, 전화번호조차 모른다고 밝혔다. 한국 영화계의 사정이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자신에게 '호프'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강하게 다가온 영화였다는 설명이다. 평론가의 평가에 반론을 제기할 순 있다. 별점의 근거가 설득력 있는지, 장면에 대한 해석이 타당한지 물을 수 있다. 평론 역시 비평의 대상이다. 이상한 건 사람들이 이동진의 분석을 반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배경까지 의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영화가 별로였다'는 감상이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한 사람은 정직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쉽게 넘어간다. '호프'를 둘러싼 논쟁은 영화의 완성도만을 따지는 게 아니다. 그 밑에는 누가 영화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인지 가려내려는 경쟁이 흐른다. 취향이 의견에 머물지 않고 안목과 지능, 교양의 등급표로 바뀌면서 싸움이 벌어진다. ▲ 취향은 자아다 조나 버거와 칩 히스는 사람들이 음악이나 헤어스타일처럼 정체성과 밀접한 영역에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려는 경향을 확인했다. 특히 실용적인 물건보다 문화적 취향에서 차별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났다. 취향이 선호를 넘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메시지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는 정체성을 담기 쉬운 대상이다. 내가 어떤 서사를 가치 있게 여기고, 얼마나 복잡한 표현을 즐기며, 어떤 감독과 장르에 관심을 두는지 보여준다. '호프'처럼 해석이 여러 방향으로 갈리고 감독의 전작까지 소환되는 작품에서는 이 기능이 더욱 강해진다. 누군가에게 '호프'는 대담하고 독창적인 장르영화고, 누군가에게는 과잉과 허술함을 거대한 규모로 가린 영화다. 갈등은 감상을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작품의 객관적 실체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리 로스와 앤드루 워드는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 경향을 '소박한 실재론'으로 설명했다. 나와 다른 판단을 내린 사람을 보면 그가 다른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편향됐다고 추정하기 쉽다. 이러한 경향은 의견 차이를 불신과 상대 진영에 대한 악마화로 키울 수 있다. '호프'가 재미없었다는 사람에게 영화의 산만함은 취향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결함처럼 느껴진다. 자신에겐 너무나 명백한 단점을 유명 평론가가 지적하지 않으면 이유가 필요하다. '나와 중요하게 보는 기준이 다르구나'보다 '감독 눈치를 봤나'라는 설명이 더 쉽게 떠오른다. 반대편도 다르지 않다.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은 작품의 의미와 장점을 알아본 자신을 통찰력 있는 관객으로 여길 수 있다. 혹평한 사람에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상징을 읽지 못했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감상 역시 객관적 진실이 된다. 한쪽은 상대가 영화에 속았다고 믿고, 다른 한쪽은 상대가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는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서로 다른 요소에 무게를 둔 것이다. 하지만 감상이 자아와 결합하면 차이는 곧 위협이 된다. ▲ 재미없게 본 사람은 왜 호평을 공격할까 '호프'를 호평하는 관객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두고, 타인의 취향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이 호평에 더 날카롭게 반응할 수 있는 상황은 생각해볼 수 있다. 이동진의 평론을 예로 들면 그의 해설은 복잡한 상징과 신화, 장르의 역사, 감독의 세계관을 동반한다. 이런 설명은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돕기도 하지만, 혹평한 관객에게는 다른 메시지로 다가올 수 있다. '당신이 재미없었던 건 이 의미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해석의 언어가 감상 능력의 서열처럼 유통된다면, 영화를 싫어한 사람은 자신의 취향뿐 아니라 이해력까지 평가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면 공격은 선제적인 지위 방어가 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너희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 있다.' '내가 영화의 가치를 놓친 게 아니라, 너희가 유명 감독과 평론가의 권위에 속고 있다.' '내가 교양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너희가 문화적 허영에 빠져 있다.' 상대를 허영에 빠진 사람으로 규정하면 자신이 아래에 놓일 가능성을 피할 수 있다. 호평자의 감상을 무효화함으로써 자신의 안목을 지키는 것이다. 호평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반격할 수 있다. '싫어하는 건 자유지만, 이해도 못하고 욕한다.' 이 말은 작품에 대한 반론처럼 보이지만 상대의 능력을 심판한다. 한쪽은 허세를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무지를 공격한다. 영화에 대한 말은 사라지고 사람에 대한 평가만 남는다. 둘 다 상대가 말한 감상을 믿지 않는다. 상대의 마음속에 더 비열하거나 부족한 동기가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 이동진의 무게 이동진의 별점은 개인의 감상이면서도 개인의 감상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언론은 그의 별점을 기사로 만들고, 팬들은 한 줄 평을 공유하고, 영화 커뮤니티는 그의 평가를 작품의 위치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동진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평가는 사회적으로 큰 무게를 가진다. 권위가 생기면 편리함과 불편함이 함께 생긴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서 전문가의 판단을 참고하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직접 검토할 시간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위신 편향은 이를 잘 설명한다. 사람들이 특정 정보, 제품, 의견 등을 평가할 때 객관적인 내용보다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나 출처의 사회적 지위, 평판, 인지도에 더 큰 영향을 받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인지적 편향이다. 이는 시행착오의 비용을 줄이는 효율적 전략이다. 이동진의 평을 참고하는 것도 내가 놓친 장면을 발견하고, 흐릿했던 감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동진의 해석을 읽고 내 생각이 넓어졌다'와 '이동진이 4점을 줬으니 좋은 영화다'는 다르다. 해석을 빌리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까지 빌린다. 모호한 작품은 판단하기 어렵다. 재미는 있었지만 결말이 납득되지 않을 수 있고, 장점은 분명하지만 좋은 영화라고 말해도 되는지 망설여질 수 있다. 이때 유명 평론가의 높은 별점은 불확실성을 빠르게 없애준다. '역시 좋은 영화였어.' 별점은 판단을 돕는 참고 자료가 아니라 판단을 보증하는 인증서가 된다. 이런 추종이 늘어날수록 반대쪽의 반발도 강해진다.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에게 이동진의 별점은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감상을 수정하라고 요구하는 문화적 압력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때 심리적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의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그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저항하려는 동기다. 물론 이동진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평가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별점 4점은 명령이 아니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평론가의 평가가 기사와 커뮤니티, 팬들의 언어를 거치며 사실상의 정답처럼 자리할 경우 일부 관객은 감상의 자유를 침해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영화가 재미없었다는 자신의 경험보다 전문가의 분석이 우위에 놓인다고 느끼는 것이다. 가장 쉬운 자유 회복 방법은 평론가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저 사람도 객관적이지 않다.' '친분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저런 평가를 했다.' '감독의 이름값에 눌렸다.' 평론가의 동기를 의심하면 그의 판단을 검토할 필요가 사라진다. 자신의 감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권위의 압력만 제거할 수 있다. 출처 폄하의 장점이다. 반대 의견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하지 않아도 된다. 말한 사람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면 메시지 전체를 기각할 수 있다. 이동진이 나홍진 감독과 커피를 마신 적이 있는지, 전화번호를 아는지까지 해명해야 했던 이유다. 논쟁의 중심이 영화의 장단점에서 평가자의 순수성으로 옮겨갔다. ▲ 이동진을 공격하는 사람과 추앙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한쪽은 이동진의 권위를 부정하고, 다른 한쪽은 이동진의 권위에 기댄다. 행동만 보면 정반대지만, 둘은 같은 불편함에서 출발할 수 있다. 내 감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렵다는 점이다. 공격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신뢰성을 떨어뜨려 자신의 판단을 지킨다. 추앙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판단을 확정한다. 한쪽은 '이동진이 틀렸으니 내가 맞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이동진과 같으니 내가 맞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영화와 자신의 관계보다 이동진과 자신의 거리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 ▲ 시네필의 허영과 시네필을 조롱하는 허영 영화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는 문화적 구별 짓기도 숨어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취향이 개인의 순수한 선호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 지위와 집단의 경계를 구분하는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내면화된 문화적 취향(아비투스)와 교육이 문화 자본으로 작용해 기득권을 세습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어려운 영화를 즐기고 복잡한 상징을 해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허영이 아니다. 영화에서 발견한 의미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해석이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봤다'는 자기 증명으로 바뀌면 문제가 달라진다. 상징과 신화, 영화사의 맥락을 설명하는 언어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관객을 나누는 자격증이 된다. '호프'를 좋아했다는 말보다 '호프'를 이해했다는 말이 앞에 놓인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점차 자신이 평범한 관객과 다르다는 증거로 쓰인다. 거들먹거리는 시네필의 모습을 과장한 조롱 밈이 반복해서 만들어지는 이유도 이 이미지 때문이다. 영화를 즐기는 사람보다 어려운 용어와 감독의 이름을 이용해 우월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네필을 조롱하는 쪽에 허영이 없는 건 아니다. '재미없는 건 그냥 재미없는 것이다.' '나는 어려운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유명 감독이 찍었다고 무조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 말에는 문화 엘리트의 권위에 속지 않는 현실적이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자기상이 담길 수 있다. 복잡한 해석을 허세로 규정하면서 자신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다. 한쪽은 '나는 이 영화를 이해했다'며 우월감을 얻고, 다른 한쪽은 '나는 이 영화의 허세를 간파했다'며 우월감을 얻는다. 하나는 문화적 속물주의고 다른 하나는 반속물주의처럼 보이지만, 상대를 발판 삼아 자신의 안목을 증명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이속에서 '호프' 논쟁은 '호프를 좋아하는 사람'과 '호프에 속지 않은 사람'이라는 집단정체성으로 번졌다. 영화를 평가하는 일이 어느 순간 자신이 속할 집단을 고르는 일이 된 것이다. ▲ 영화는 해석해도 타인의 마음까지 해석할 수는 없다 "나는 재미있었다"는 말은 반박하기 어렵다. 그 관객이 실제로 느낀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미없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논쟁거리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어떤 장면이 왜 효과적이었는지, 서사의 빈틈이 의도된 모호함인지 설명 부족인지, 상징이 작품 안에서 충분히 뒷받침되는지 등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작품에 대한 논쟁을 건너뛰고 상대의 마음부터 해석한다. '호프'를 둘러싼 논쟁에서 사람들이 지키려 한 건 영화에 대한 의견만이 아닐 수 있다. 자신이 영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믿음, 유명한 권위에 속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 남들이 놓친 의미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평론도 정답을 배급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영화를 본 방식과 근거를 전해 다른 관객의 감상을 넓히는 일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되고, 반박해도 된다. 다만 별점에 반대하기 위해 평론가의 인격과 동기까지 발명할 필요는 없다.
이동건 기자 -
박위, KTX 낙상사고 CCTV 공개 후폭풍…왜 그랬을까?박위를 돕던 사회복무요원의 발에 휠체어 바퀴가 걸렸다. 휠체어를 탄 박위는 KTX에서 내리다 넘어졌다. 자칫 크게 다칠 수 있는 사고였다. 논란은 사고 이후 시작됐다. 박위가 낙상사고 당시 상황이 담긴 CCTV를 확보해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것. 사회복무요원이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며 현장에서 사과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러면서도 "발을 경사로 위에 올려놓은 것 자체로 화가 났다"고 회상했다.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자신을 도와주다 실수한 사람을 수많은 사람이 보는 곳에 공개할 필요까지 있었느냐는 지적이다. 논란이 커지자 박위는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박위는 왜 CCTV까지 공개하며 이번 일을 공론화했을까. 박위 자신이 아닌 이상 정확한 속마음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그동안 해온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몇 가지 심리는 짐작해볼 수 있다. ▲ 내가 겪은 세상이 진짜라는 믿음 박위에게 이 사건은 '누군가 나를 돕다 실수했다'는 사고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해석한다. 똑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과거 경험에 따라 무엇을 중요하게 보는지가 달라진다. 박위는 2014년 사고 이후 휠체어를 타고 생활해왔다. 이후 유튜브 채널 '위라클'을 통해 장애인의 일상을 보여주고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등한 사회 구성원이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전했다. 서울시는 이러한 활동을 장애 인식 개선과 인권 증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해 2022년 서울시 복지상 장애인 인권 분야 대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박위에게는 비장애인이 쉽게 알지 못하는 위험이 수없이 보였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발 하나 잘못 디딘 실수지만,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사고가 된다. 박위는 CCTV를 보며 바로 이 장면을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말로 해서는 모른다. 직접 봐야 안다.' CCTV는 누군가를 망신주기 위한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현실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 돌봄 윤리와 '내가 알려야 한다'는 책무 여기에 일종의 책무감도 더해졌을 수 있다. 돌봄 윤리는 인간을 홀로 완결된 존재로 보기보다 서로 의존하고 돌보는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누군가의 취약함을 알아차리고, 필요한 돌봄에 응답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박위에게 장애인의 안전 문제 역시 이런 관계의 문제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장애인 유튜버로 살아온 그에게 자신이 겪은 일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일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알리지 않으면 다른 휠체어 이용자도 같은 일을 당할 수 있다.' 문제가 개인의 불쾌함이 아니라 장애인의 안전이라고 받아들였다면, 공론화는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 선의가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여기서 선의가 뜻밖의 함정이 된다. 도덕적 확신이 강해지면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도 강해지고,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질 수 있다. '다른 장애인이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 목적만 놓고 보면 반박하기 어렵지만, 자신의 목적이 옳다는 확신 때문에 다른 문제에 대한 생각은 흐려질 수 있다. 사회복무요원은 박위를 도우려고 그 자리에 있었다. 사고는 고의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사과까지 했다. 박위는 수많은 구독자를 가진 유명인이고, 사회복무요원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개인이다. 사고 순간에는 박위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였다. 하지만 CCTV를 유튜브에 올리는 순간 두 사람의 힘은 뒤집힌다.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과 사회적으로 강한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약자와 강자는 사람에게 영원히 붙어 있는 명찰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박위가 자신의 취약함에 집중하는 동안 자신이 상대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까지는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 같은 CCTV, 전혀 다른 장면 박위와 대중은 똑같은 CCTV를 보고 전혀 다른 장면을 봤다. 박위가 본 건 어쩌면 '작은 실수가 장애인을 얼마나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가'였을 것이다. 반대로 많은 사람은 '장애인을 돕는 사람이 얼마나 쉽게 곤욕을 치를 수 있는지'를 봤다. 이후 사과문에서 박위는 "저를 돕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를 제가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며 "생각이 짧았다"고 밝혔다. 이번 일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도 박위의 이 문장일지 모른다. ▲ 공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박위는 오랫동안 비장애인에게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한번 바라봐달라고 이야기해왔다. 계단과 문턱, 경사로가 휠체어를 탄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해달라는 요구였다. 필요한 이야기다. 하지만 공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봐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자리로 건너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동건 기자 -
'나는 솔로' 31기 순자는 왜 최고의 아웃풋이 됐을까?ENA·SBS Plus '나는 SOLO'(나는 솔로)에서 뜻밖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화려한 조건으로 주목받은 출연자도,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출연자도 아니다. 31기 순자다. 29일 순자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17만 4000명을 넘어섰다. 31기를 넘어 '나는 솔로' 출연자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패션과 일상, 31기 경수와의 데이트 콘텐츠가 꾸준히 주목받고 있고 광고와 협찬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솔로 최고의 아웃풋'이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흥미로운 점은 순자가 처음부터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출연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방송 당시 다른 출연자들과 갈등을 겪었고, 일부 장면을 두고는 순자가 소외된 것 아니냐는 '왕따 논란'이 불거졌다. 31기 방송 종영 후에는 출연자들의 폭로와 해명이 오가며 잡음이 커졌다. 그런데 갈등의 중심에 있던 순자가 가장 많은 팬을 얻었다. 사람들은 순자에게서 무엇을 봤고, 어떤 마음으로 그에게 이례적인 지지를 보내는 걸까. 순자의 외모나 성격이 좋았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마다 순자를 좋아하는 이유도 다를 것이다. 다만 순자를 지지하는 동시에 다른 출연자들을 강하게 비판하던 반응을 들여다보면, 반복해서 등장한 말이 있다. '사회생활하면서 저런 사람을 꼭 한 번은 겪었다.' '대놓고 괴롭히는 게 아니라 은근히 꼽을 주고 편을 가른다.'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된다.' 이 말들은 순자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다른 출연자들의 행동에서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는 고백이다. 화면 속 순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학교나 직장, 친구 관계에서 느꼈던 소외감과 관계적 긴장을 함께 떠올린 것이다. 과거에 관계 속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됐던 경험은 비슷한 장면을 만나는 순간 다시 활성화된다. 이때 사람은 현재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해석하기 쉽다. 그 결과 실제보다 의도를 더 강하게 추론하거나, 관계의 위협을 더 크게 지각하는 일도 나타난다. 따라서 어떤 시청자에게 순자의 상황은 연애 예능의 한 장면이 아니라, '나도 저런 상황을 겪어봤다'는 몰입의 장치였을 수 있다. 순자를 향한 감정이 강해지는 첫 번째 지점이다. 중요한 건 순자가 실제로 따돌림을 당했는지를 단정하는 일이 아니다. 방송은 편집된 콘텐츠고, 출연자들의 관계 전부를 시청자가 알 수는 없다. 단지 시청자가 그렇게 느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번 순자가 '여럿 사이에서 혼자가 된 사람'으로 읽히기 시작하면 평가 기준도 달라진다. '순자는 어떤 사람인가'보다 '순자에게 벌어진 일이 정당한가'가 중요해진다. 실제로 방송 당시 순자를 지지하는 반응 가운데는 "순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출연자들이 저렇게 대하는 건 잘못됐다", "순자도 미숙한 부분은 있지만 따돌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식의 반응이 적지 않았다. 이는 순자를 완벽한 사람이라고 평가해서 생긴 호감과는 다르다. 순자의 성격에 대한 판단과 그가 받았다고 느끼는 대우에 대한 판단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 순간 시청자는 관찰자에서 '편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바뀐다. 여기에 언더독 효과(underdog effect)가 겹칠 수 있다.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인식되는 대상을 응원하는 경향. 사람들은 때로 압도적인 강자보다 불리한 조건에서 버티는 사람에게 더 큰 호감과 지지를 보인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순자의 폭발적인 인기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불리한 위치에 있는 출연자는 매 기수마다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17만명의 팔로워를 얻지는 않는다. 순자에게는 또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나와 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사람은 자신과 압도적으로 동떨어진 사람을 선망할 수 있지만, 자신을 투영하는 일은 다른 문제다. 처음부터 모든 이성의 선택을 받고 외모와 직업, 인간관계에서도 우위에 있는 출연자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시청자는 그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다. 반대로 선택받을지 불안해하고, 관계에서 밀려날까 걱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갈등하고, 때로는 혼자가 되는 사람은 훨씬 익숙한 감정의 영역에 있다.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지각된 유사성'이 등장인물과의 동일시나 준사회적 관계(대중이 미디어 속 인물과 일방적으로 친밀감을 느끼는 관계)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순자의 소구력은 평범함이 아니라 심리적 접근성에서 나왔을 수 있다. 방송 속 갈등과 소외의 장면들이 시청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겹쳐 볼 자리를 만들어줬다는 뜻이다. 남성 시청자가 여성 출연자를 볼 땐 '내가 연애하고 싶은 사람인가'라는 기준이 상대적으로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 시청자에게 같은 여성 출연자는 다른 평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떨까.' '저 불안은 나도 안다.' 연애 대상으로서의 매력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은 다른 문제다. 순자의 폭발적인 인기를 이해하는 열쇠도 이 차이에 있을지 모른다. 자신과 멀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 사람이 불리한 상황을 지나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마지막에는 누구보다 큰 관심을 얻는 과정을 보여줬기 때문에 더 강한 애착을 불러일으켰을 수 있다. 시청자가 순자의 처지에 자신의 경험을 겹쳐 보는 '서사적 동일시'를 이뤘다면, 순자가 경수에게 선택받는 장면은 연애의 결말을 넘어선다. 자신이 과거에 받지 못했던 인정까지 대신 돌려받는 보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처음부터 가장 인기 있던 여성이 인기 있는 남성과 이어지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이야기지만, 집단에서 불리하다고 여겨졌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선택되면 의미가 달라진다. '가장 우위에 있지 않아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일부 시청자는 순자의 결말을 일종의 신데렐라 서사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오래 사랑받는 이유는 왕자를 만나서가 아니다. 줄곧 불리한 자리에 있던 사람이 마침내 인정받고, 자신을 둘러싼 평가를 뒤집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마음은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스포츠에서는 약팀의 이변에 환호하고, 영화에서는 무명 복서의 승리에 마음을 빼앗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도 처음부터 완성된 참가자보다 시행착오 끝에 성장하는 참가자에게 더 마음이 가곤 한다. 순자에게도 비슷한 역전의 서사가 만들어졌다. 소외돼 보였던 사람, 갈등을 겪었던 사람, 불리해 보였던 사람. 그런데 누군가에게 선택받았고, 가장 많은 관심까지 얻었다. 특히 SNS 팔로워 수가 출연자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으로 늘고 광고와 협찬이 이어지면서, 순자의 반전은 현실의 성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가장 잘된 사람은 순자였다'는 결론은 순자를 응원했던 사람에게 특별한 만족을 줄 수 있다. 순자의 성공이 순자 개인의 성공으로만 느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응원했던 사람이 결국 인정받았다.' 자신의 판단까지 보상받는다. 나아가 순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투영했던 시청자라면 그 만족은 훨씬 커질 수 있다. 순자의 역전을 통해 과거의 자신이 받지 못했던 결말을 대신 경험하는 것이다. 과거 집단에서 밀려났던 자신, 인정받지 못했던 자신, 더 인기 있는 누군가와 비교하며 불안했던 자신. 순자가 마지막에 선택받고 성공하는 이야기는 그런 기억에 상징적인 결말을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순자를 향한 지지는 '대리적 승리'를 넘어 일종의 '대리적 정의 회복'처럼 경험될 수도 있다. 실제로 정의가 실현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청자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순자를 비판했을 때 일부 팬들이 유독 격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설명된다. 단순히 좋아하는 연예인이라면 누군가 "나는 별로다"라고 말해도 취향 차이로 넘길 수 있지만, 순자에게 자신의 경험과 도덕적 판단까지 겹쳐놓은 사람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순자를 왜 이렇게까지 편드느냐"는 말이 인물 비판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부당하다고 느꼈던 경험까지 부정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면 의견 충돌은 빠르게 도덕적 갈등으로 변한다. 순자 편과 순자를 괴롭힌 사람 편, 피해자를 이해하는 사람과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 순자에 대한 평가가 어느 순간 '인간관계에서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도덕 판단과 붙어버리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순자 팬덤의 강력함과 위험성이 동시에 생긴다.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것과 그 사람을 완벽한 사람으로 만드는 건 다르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구도가 형성되면 사람의 복잡한 면은 지워지고 역할만 남는다. 순자의 행동은 선하게 해석되고, 반대편 출연자의 행동은 악하게 해석된다. 지나친 이상화에는 역설적인 위험도 있다. 사람을 실제 모습보다 높은 도덕적 위치에 올려놓으면 평범한 실수조차 배신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다"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 봤다"로 바뀌는 것이다. 오늘 순자를 절대적인 피해자이자 선한 사람으로 만드는 심리가 내일 순자를 가장 거칠게 비난하는 심리로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사람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과 지나치게 악마화하는 건 반대처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한 사람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강하게 이입될수록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화면 속 사람일까, 아니면 그 사람 위에 겹쳐진 오래전의 나일까.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완벽한 주인공에게 마음을 주지는 않는다. 나와 멀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끝내 잘되는 이야기에 더 오래 마음을 준다.
이동건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