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미군이 2차 대전용으로 건조했던 전시표준형 선박과 군용선인 LST 등 몇 척을 빌려 근대 해운업을 시작한 대한민국. 지금은 선복량 기준으로 세계 6위 해양강국의 위용을 뽐내고 있다.
이제는 '글로벌 빅5 진입'이라는 목표 아래 일본·중국·노르웨이 등 해양 선진국들의 뒤를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는 상황. 이는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현영원 현대상선 고문, 이맹기 대한해운 창업주 등 한국 해운업의 든든한 버팀목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운왕' 꿈꾸던 청년 조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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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1977년 5월 16일 한진해운을 설립하고 컨테이너 운송 시대를 열었다. |
"나는 해방 전이던 1940년 초의 청년 시절에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해운왕(海運王)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자서전에서 한 말이다. 그 청년은 3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운 회사를 설립한다. 한진해운의 시작이었다.
1977년 5월 16일 문을 연 한진해운은 컨테이너 전용선사를 표방했다. 이는 대한해운공사에 이어 원양 컨테이너 선사로는 두 번째로, 본격적인 컨테이너 운송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후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미국 시랜드와의 합작을 통해 선진 해운경영 기법을 도입, 도약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1979년과 1983년에 각각 북미서안항로와 북미동안항로를 개설, 미주항로의 단독선단도 구축했다. 이로써 한진해운은 북미항로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시련도 있었다. 한진해운은 1985년부터 시작된 북미항로의 구조적 불황으로 심각한 경영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조중훈 창업주는 전사적 차원의 지원과 조직의 축소 운영, 운송서비스 혁신 등 자체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87년 경영 정상화를 이뤘다.
결국 1988년 대한선주(구 대한해운공사)를 합병, 명실상부한 국내 1위 해운사로 도약했다. 현재 한진해운은 세계 9위 선사로 수리조선소·3자 물류·터미날 운영 등 사업다각화에도 성공, 글로벌 종합물류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영원한 해운인' 현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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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원(왼쪽에서 여섯번째) 현대상선 고문이 지난 1994년 현대유토피아호 명명식에 참석해 관계자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현영원 고문은 한국은행, 신한제분 전무를 거쳐 지난 1964년 신한해운을 설립하며 해운업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해운사간 국제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며 신한해운을 총 선복량 8만5172GT(총t수), 203명의 임직원 둔 중견해운업체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세계적인 해운불황이 현 고문의 발목을 잡았다. 각국 정부는 해운업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구조조정에 나섰다. 우리 정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1984년 해운사업합리화 조치를 발표, 해운사 통폐합에 나섰다. 이 조치로 신한해운은 결국 현대상선으로 합병됐다.
평소 현 고문과 친분을 유지하던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그의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 현대상선 대표이사 회장으로 전격 발탁한다. 이후 1995년 고문으로 자리를 옮겨 일선에서 퇴임할 때까지 그는 현대상선을 세계적인 컨테이너선사로 이끌었다.
또한 현 고문은 영국 P&I(선주상호보험)클럽 이사, 선박검사기관인 미국 선급협회(ABS) 한국위원회 위원장, 해운국인 파나마 공화국 명예 총영사 등 국제 해운분야와 관련한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며 한국 해운업의 위상도 빛냈다.
해운업계의 한 원로는 "그가 없이는 한국의 해운업계가 방향타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한국을 해운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영원한 해운인"이라며 그를 추억했다.
◆이맹기 "해운입국은 평생의 신조"
이맹기(가운데) 대한해운 창업주는 1968년 12월 12일 코리아라인을 설립했다. 사진은 창립총회를 마치고 발기인들과 함께 기자 회견을 하는 모습. |
해군참모총장 출신인 이맹기 대한해운 창업주에게는 해운업에 대한 그의 애정을 보여준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한해운공사의 민영화가 진행되던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난 것.
이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은 대한해운공사를 경영하던 경험을 살려 이맹기 창업주에게 다른 국영 기업체 사장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맹기 창업주는 "나는 바다에서 뼈가 굵었고 바다밖에 아는 것이 별로 없다"며 "해운입국이라는 평소의 신조가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유를 사양했다"고 밝혔다.
이맹기 창업주는 결국 1968년 12월 12일 대한해운의 전신인 코리아라인을 설립했다. 비록 사업 초기에는 자금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재는 국내 4위 선사로 도약, 한국 해운업 발전을 이끌고 있다.
이와 함께 해성 장학회를 설립해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대한해운은 우수한 인력이 해운 및 조선업계로 영입돼야만 한국 해운업이 국가경쟁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이맹기 창업주의 뜻에 따라 1985년부터 해성 장학회를 통해 학자금과 장학금, 연구비 등을 지원해고 있다.
아주경제= 김병용 기자 ironman17@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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