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華 초대석- 1> 중국의 자존심 장이머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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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1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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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체제 예술인, 상업주의 감독 엇갈린 평판

중국이 제조왕국에서 문화 소프트파워가 중심이 되는 '인문 중국'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고 있다. 과거 강성했던 중국 왕조는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예외없이 찬란한 꽃을 피웠다. 중국굴기의 시대를 맞아 중국 문화의 글로벌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수교 20년'으로 성년을 맞은 한중 관계는 문화예술 분야 교류에서도 양적 질적으로 심도를 더해가고 있다. 바로 이런한 때 본지는 중국 '문화 소프트파워'의 현주소를 엿보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와 연극 출판 드라마 가요 공연및 각종 문화 오락 예술 분야에 걸쳐 걸출한 중국 문화 명인(작품)을 심층 조명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장이머우 감독이 지난 해 12월 26일 출간한 신간 '장이머우의 과제'.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지난 12월 중순 중국 대륙에서 개봉한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신작 ‘진링의 13소녀(金陵十三钗)’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진링의 13소녀’는 1937년 일본군의 중국 난징 대학살 당시 각기 다른 신분의 소녀 13명과 탈출한 부상병 6명의 이야기를 다룬 장이머우 의 또 다른 블록버스터 대작이다. 4년동안 6억 위안을 들여 만든 이 영화는 지난 해 12월 중순 개봉해 순식간에 4억5000만 위안의 흥행수익을 기록하며 2011년 최고 박스오피스를 기록했다.

이 영화는 특히 30만명의 민간인을 무도하게 살해한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속에 중국에서 반일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인기몰이 중이다.

반면 서양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는 “사실이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영화가 어수선하다” “일개 상업용 영화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평가도 나오고 있다.

사실 장이머우처럼 ‘논란의 중심’에 선 감독도 드물다. 과거 서구 영화 평론가들에게 '반체제 예술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초기 작품에서 일반 소시민의 삶의 애환을 다루며 리얼리즘으로 어두운 현실을 비판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의 앞에는 ‘상업화’ ‘흥행보증’ 심지어 ‘중국 공산당 선전 감독’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예술과의 인연

장이머우 감독은 중국영화를 대표하는 5세대 감독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국민당 장교출신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문화대혁명 시절 그의 가족은 ‘지식분자’로 찍혀 시골로 쫓겨났다. 장이머우 역시 18세 되던 해에 산시(陝西)성으로 하방됐다.

그는 고졸 학력으로 21세 되던 72년에 시골 한 방직공장에서 취업한다. 장이머우의 본명은 본래 장이머우(張詒謀)였다. 그러나 공장 사람들은 장이머우 한자를 잘못 읽어 장이모의 ‘이(詒)’를 ‘즈(治)’라고 발음하기 일쑤였다. 이에 장이머우는 아예 가운데 글자를 예술을 뜻하는 ‘이(藝)’로 바꿨다. 이때부터 어쩌면 장이머우는 예술과 인연을 맺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장이머우의 한달 월급은 고작 30.2위안. 그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토종 브랜드 하이어우(海鷗)의 카메라를 한 대 샀다. 일하고 남는 시간에 그는 밖으로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일하는 동료들은 그의 작품 사진을 서로 돌려보기 바빴다. 공장 홍보부서에서는 가끔씩 장이머우에게 홍보물 제작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 때부터 이미 그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질을 보였던 것이다.

78년 중국 대학교에 휴교령이 풀리면서 그는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하기 위해 베이징영화학교에 지원했지만 당시 나이 28세였던 장이머우는 22세의 나이제한에 걸려 입학을 거절당한다. 그러나 그는 40개의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문화부부장에게 보내 결국 입학을 허가 받는다.

△반체제 예술인

졸업 후인 1988년 그는 중국 빈농출신 한 여인의 기구한 생애를 그린 영화 ‘붉은 수수밭’의 감독겸 연기자로 데뷔해 제 38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다.

또 중국 농촌 사회현실상을 다룬 ‘귀주이야기’로 1992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다.

이어 중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살아가는 한 남자의 40여 년에 걸친 인생역정을 그린 영화 ‘훠저(活着 인생)’으로 1994년 제47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는 등 장이머우는 중국 사회현실을 반영한 영화로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우뚝 선다.

그는 휴머니즘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소시민에 연민을 가지면서 그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영화에 담아내 중국 현실을 비평했다.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휴유증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과거를 반성하면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그래서 서구 영화평론가들은 그를 ‘반체제 예술인’으로 불렀다.

△상업주의에 물든 감독

그러나 영화계에 입문한지 15년째 되던 2002년. 장이머우는 스타급 화려한 캐스팅과 수억위안대의 제작비를 쏟아부어 제작한 영화‘영웅’을 시작으로 ‘황후화’ 등 각종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과거 그의 초기 작품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장이머우를 ‘정부와 타협한 변절자’ ‘상업주의에 물든 감독’이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이러한 비평에 대해 장이머우는 의연하게 대처한다. 그는“할리우드 영화로 중국 영화 관객이 줄고 있는 게 중국 영화계의 현실이다. 할리우드와 경쟁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할 수 밖에 없다”며 “나는 시대가 요구하는 영화를 제작할 뿐”이라고 말한다.

끊없는 논란 속에서도 장이머우는 세계 무대에서 평가받는 영화계 인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때는 중국 5천년 문화의 정수를 소재로한 개막식 행사를 성공적으로 연출함으로써 국내외에 장이머우의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 5세대 감독이란?
장이머우는 천카이거(陳凱歌)와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5세대 감독이다. 보통 중국 5세대 감독이라면 문화혁명 당시 베이징영화학교가 12년간 휴교하고 1978년에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입학한 ‘베이징 영화학교 78학번’ 졸업생을 일컫는다. 5세대 감독은 문화대혁명 때 젊은 시절을 보내 현실비판적인 성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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