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생전의 운보 김기창화백의 모습을 서울미술관 전시장에서 만나볼수 있다.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였다. 그런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신에게 선택받은 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곱살이란 어린 내가 열병을 앓아 귀가 먹었겠는가.
어쨌든 나는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소리와 단절된 적막의 세계로 유기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버려진 인간이란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소외된 나를 찾기위해 한가지 길을 택했다. 그것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며, 나는 화가가 되었다."
구멍난 빨간양말과 흰 고무신. '바보 산수'로 유명한 고(故)운보 김기창 화백(1914~2001)이다.
무언(無言)과 불청(不聽)의 결함에도 왕성한 창작활동과 폭넓은 작품세계를 펼친 운보는 80~90년대 '한국인 사랑하는 화가' 로 꼽히는 인기작가였다. 하지만 사후 2만여점이나 된다는 작품수만큼이나 등장하는 위작 등으로 평가절하되며 현대미술이 대세인 미술계에서 잊힌 듯 했다.
태어난지 100년, 운보 김기창 화백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이 오는 17일부터 '예수와 귀먹은 양'을 타이틀로 운보 김기창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연다.
이번 전시는 특히 운보의 주요 걸작으로 평가받는 '예수의 생애' 연작 30점을 선보여 화제다. 1951년 6.25 전란시 군산으로 떠난 피난처에서 그린 '예수의 생애'는 조선시대 풍속화로 그려낸 성화다.
천사는 선녀로, 한복입은 예수와 마리아 등 전통 한국 문화를 배경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사후 11년만에 다시 전시된 '예수의 생애'는 K아트의 원동력이라고 할 만큼 새롭고 뭉클함을 전한다.
![]() |
김기창.수태고지. |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수태를 알리는 장면, 보티첼리의 '수태고지'로 유명한 수태고지는 김기창 화백에 의해 가장 한국적인 장면으로 재탄생됐다.
노란저고리와 초록 치마를 입은 마리아로 보이는 여인은 물레를 멈추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서양의 천사와 달리 구름을 타고 온 선녀가 앉아있는 방은 한옥이며 앞쪽에는 대청마루가 깔려있다.
첫번째 수태고지 그림을 시작으로, 아기예수의 탄생,동방박사들의 경배등으로 이어지는 예수의 생애는 1년만에 29점으로 완성됐다. 일년후 이 작품을 본 독일 선교사의 제의로 '부활'을 추가로 제작, '예수의 생애'가 총 30점으로 완결됐다. 운보 나이 40세였다.
그는 전쟁통에, 어떻게 '예수의 생애'를 담은 성화를 그린 것일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운보는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미국인 선교사 앤더슨 젠슨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오래전부터 운보에게 성화작업을 권유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계에는 많은 성화가 있습니다.예수는 어느 한 나라를 위해서 탄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온 인류의 구세주인 탓으로 많은 나라가 가장 믿음을 갖기 쉬운 방법으로 자기들의 모습을 본따서 그리고 있습니다.일본이나 중국에도 제각기 다른 모습의 성화가 있지요."
운보는 어려서부터 감리교인이었던 어머니 한윤명 여사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녔다.
미술평론가 서성록씨는 "기독교인인 그가 성화를 제작화게 된 것은 종교화를 그린다는 차원보다는 신앙의 연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 |
14일 서울미술관 이주헌관장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김기창 화백의 성화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박현주기자 |
피난시절이라 미술재료를 구하기 힘든 여건속에서 "나는 다른 모든 일을 전폐하고 이 성화제작에 내 온 심혈을 다 쏟았다"는 '예수의 생애'는 기독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우리 한국식 성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화이자 이후에도 없는 성화로 알려지고 있다.
1954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첫 선을 보인후 세간에 알려지지 않던 '예수의 성화'는 운보 팔순기념 대회고전이 열린 1993년 10월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인바 있다. 운보 작고 1년후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바보천재 운보 그림전'에 전작이 출품됐고, 판화로 제작되어 널리 보급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30점의 진품 성화 '예수의 생애'는 서울미술관의 소장품이다.
서울미술관 이주헌 관장은 "운보의 '예수의 생애'는 한국회화사와 세계 기독교 미술사를 통틀어 매우 독창적이며 중요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면서 "한국현대회화사에서 독창적인 화풍으로 우뚝 선 그는 동양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자유로운 조형정신으로 동양화의 혁신을 이룬 우리 미술의 진정한 거장"이라고 말했다.
'예수와 귀먹은 양'을 제목으로 펼치는 이번 전시는 '예수의 생애'연작외에 운보의 걸작인 바보산수와 청록산수, 운필의 묘가 생생한 문자도등 30여점의 작품과 붓 벼루 낙관등 100여점에 달하는 운보의 물품들이 소개된다.
전시기간중 11월 2일 오후 2시부터 미술평론가 서성록(안동대)교수의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를 주제로 한 강연회가 열린다. 전시는 2014년 1월19일까지. 관람료 일반 9000원. 학생 5000원~7000원.(02)395-0100
![]() |
김기창.승천. |
![]() |
서울미술관'예수와 귀먹은 양'전에 소개된 김기창 화백이 몽롱체로 그린 미인도. 선은 가늘고 색채가 부드러워 몰서체화로 불리는 이 작품은 이당 김은호 화풍의 영향이 짙게 베어있다. |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