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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중에서도 시청률이 높은 건 아침 9~10시, 저녁 8~9시대 가족 드라마다. 이 시간대에 드라마가 집중 편성되는 이유가 있다. 출ㆍ퇴근 할 필요가 없어 한가한 비활동 경제 인구들인 노ㆍ장년층들이 편안하게 TV 앞에 모이기 좋은 시간대가 딱, 이 때이기 때문이다.
물론 젊은 실업자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은 나가 노느라 바쁜 데다 집 안에서도 인터넷을 끼고 놀며 TV는 고물 취급한다. 5·7·9·11 번 채널은 아예 곰팡이 낀 식빵 정도로 여기고 그나마 케이블 방송사들이 제작한 퓨전 드라마에만 가끔 눈길을 줄 뿐이다.
스포츠 신문이나 인터넷 매체가 우왕떨며 호들갑스럽게 꾸며대는 드라마 시청률 관련 뉴스는 비현실적이라고 봐야 한다. 시청률 퍼센티지를 들먹이며 배우들이 대단한 인기를 끄는 줄 착각하도록 꾸며대지만 사실 TV는 이제 시간이나 때우려는 노ㆍ장년층들의 전유물이 돼 가고 있다.
그나마 디지털 케이블 TV나 IP(Internet Protocol·인터넷 프로토콜) TV 설치가 용이한 서울 등 대도시에 거주하는 시청자들은 다채널, 다매체 방송 정책에 따라 시청률 조사가 무의미할 정도로 분산돼 가는 중이다.
이런 환경에서 방송 종사자들이 택한 돌파구가 다름 아닌 막장 드라마다.
'아내의 유혹의 내조의 여왕의 유산'이라는 모 케이블 TV 드라마는 지상파 드라마 중에서 대표적인 막장 드라마 3가지를 칵테일해서 패러디한 신종 코믹 드라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막 나가는 스토리 전개가 황당한 웃음을 유발하는 데 정작 주인공들은 심각한 표정연기로 '비현실감'을 배가한다.
비현실과 현실을 오락가락하는 막장 드라마의 스토리라는 건 한마디로 'X판 5분 전'이다. 비정상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이복 남매의 사랑, 점도 안 찍고 다른 사람이라고 우겨대는 죽었다가 살아난 아내, 사각 관계를 풍기다 극적인 갈등을 유발하며 분출하는 쌍방 불륜 스토리, 빈번한 불치병 발병과 사망이나 기억상실증을 유발하는 교통사고, 뜬금없는 음모와 배신, 정신질환자 같은 시어머니와 하는 일도 없는데 '생고생 한다'고 울상 짓는 며느리,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갑자기 귀국해 갈등을 유발하는 옛 애인이나 입양 자녀, 가끔 기획서나 던지고는 대낮에도 연애질이나 일삼는 직장 남녀, 정상인이라면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을 사람 죽고 사는 이슈로 증폭시키는 특이 체질의 괴기녀(怪奇女), 심지어 비싸 보이는 협찬 의상을 멋지게 차려 입고 살인과 살인교사, 절도, 강도, 납치와 협박, 폭행, 여신금융업법 위반, 조직폭력, 공사문서 위조, 명예훼손, 사기 등을 일삼는 20~30대 젊은 남녀 캐릭터 등. 상상 초월 막장 스토리텔링이 중구난방 안방에서 펼져진다.
이런 막장 드라마들은 주로 출퇴근 시간 직후나 직전에 방영된다. 드라마 리얼리티를 좀 알고 비평을 일삼을 만한 사람들이 안보는, 딱 그 시간대다.
이유가 뭘까?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보면 그 이유는 방송국 조직 내부에 꼬질꼬질 묵은 때처럼 쌓여 있는 내부 모순 때문이다. 하릴없이 멍하게 시간을 때우는 고액연봉자들이 많아 제작비를 제대로 책정할 수 없으니 저예산에도 달려드는 하청에 하청을 주게 되고, 정작 TV 앞에는 잠재 고객들이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미처 모르는 광고주들에게 엉터리 시청률 데이터를 들이밀어서라도 광고비는 빼내야겠고, 해서 순간적으로 마음을 잡아 끄는 발작적인 스토리를 쪽대본 처리로 그날 그날 찍어 대면서 마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양 언론 펌프질을 해대는 메카니즘이라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 속에 막장 트렌드가 방송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건 요즘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종사자들만 애써 모르쇠, 모럴해저드의 늪에 빠져 헤엄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먹이사슬의 탄탄한 그물망 속에서 낮잠을 즐기다 배고프면 끔벅끔벅 고급스런 구걸에 나서는 오래된 저들의 버릇을. 원래 선민이라서 그런 줄 알고 특권 의식 속에 파묻혀 사는 천성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지상파 방송 종사자들의 행태가 괘씸한데, 어찌할 도리가 없어 무력감을 느끼며 푸념이나 할 뿐이다.
<트렌드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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