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이광효 기자) 초여름 더위가 한창인 지난 28일 밤 서울 노량진의 한 공무원 시험 학원.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이 학원의 한 강의실에선 수십 명의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온 신경을 집중해 강의를 들으며 강의 내용을 노트에 열심히 적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남아공 월드컵 응원 열기로 전국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지만 이들에게 있어 월드컵 응원은 주제에 맞지 않은 사치일 뿐이다.
오후 10시 10분까지로 예정됐던 강의는 10시 30분이 넘어서야 끝났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벌써 2년 넘게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A씨(남, 29세)는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독서실로 직행했다.
초여름 더위 속에서 밤 늦게까지 강의를 듣느라고 온 몸이 매우 피곤한 상태이지만 남들보다 한 자라도 더 공부해 하루라도 빨리 합격해야 한다는 마음에 도저히 쉴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벌써 내년이면 30대에 접어들어 일반 기업체에 취업하기도 매우 어려워진다는 생각이 독서실로 향하는 A씨의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A씨는 지난 2008년 2월 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직장 생활은 해 본 적 없고 오로지 9급 공무원 시험 준비에만 열중해 왔다.
A씨는 “공무원 외에 다른 직장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고용 안전성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공무원 시험 열풍은 취업 준비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지난 2007년 2월 전문대를 졸업한 B씨(남, 25세)는 현재 9개월째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B씨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네트워크 업계에 취직해 1년 정도 재직했다.
하지만 그는 경찰 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기약없는 경찰 공무원 시험 준비생 생활을 하고 있다.
고용 안전성이 악화되면서 실업률은 낮아져도 비경제활동인구는 늘어나는 역설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많은 구직자들이 고용 안전성 등을 이유로 일반 기업체 취업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열중하면서 대거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실업률은 3.2%로 지난해 5월보다 0.6%포인트 내려갔고 고용률은 60.0%로 0.7%포인트 올라갔다.
그런데 비경제활동인구는 1543만4000명으로 지난해 5월보다 6만5000명이 늘었는데 이 중 취업을 위한 학원·기관 수강 등을 포함하는 ‘재학·수강 등’은 434만명으로 3만4000명이 늘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실업률은 하락해도 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치솟고 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 3일부터 7일까지 실시된 2010년도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 응시원서 접수 결과 선발예정인원 446명에 총 5만1452명이 지원해 평균 115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05년도 117대 1 이후 가장 높은 경쟁률이다.
지난해 경쟁률은 80대 1이었다.
이렇게 실업률이 하락해도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치솟는 이유는 최근 몇 년 동안 고용 안전성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고용 안전성이 높은 직장에 대한 선호도가 급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세청이 발표한 ‘2008년 퇴직소득 원천징수 자료’에 따르면 퇴직자 256만5595명 중 근속연수가 5년 미만인 자는 그 중 86.7%인 222만4755명이었다.
이 비율은 지난 2003년 80.6%에서 2007년 86%, 지난 2008년 86.7%로 급증했다.
이에 대해 국세청은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근로자의 직장이동이 잦아진 것과 경기침체 여파로 인한 기업의 상시 인력 구조조정 등으로 근속기간이 짧아졌다”고 말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 관계자는 “기업 등에서 일해야 할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내몰리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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