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2>리커창-①중국 구조조정 민생개혁 총감독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2010년 6월 리커창(李克强) 상임 부총리가 윈난(雲南)성에 현지시찰을 나갔을 때다. 리커창 일행은 주무콩(竹木孔)촌의 사회보장제도에 따라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한 빈민가정을 예고없이 방문했다. 집 마당에서 여기저기 둘러보던 리커창은 갑자기 주방과 내실에 들어가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물이 잘 나오는지, 수질은 어떤지를 살폈다. 갈라져 있는 벽을 만져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당의 개가 아무렇지 않게 안방을 들락거렸고, 가옥 옆에 바짝 붙어있는 외양간에서는 악취가 진동했다. 리커창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동행한 현지관료를 쳐다보며 “이렇게 주거환경이 열악한 가정이 이 현에 얼마나 되냐”고 쏘아붙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집은 생활의 최소한의 필요사항이다. 가난한 계층에 속한 인민들의 주거는 바람을 피하고 비를 막아내지도 못한다. 주거문제는 민생문제의 최우선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리커창의 찌푸린 미간을 찍은 사진은 각 매체를 타고 전국에 전파됐다. 또한 TV방송으로도 반복 방영됐다. 이 광경은 중국사회에 잔잔한 파장을 낳았다. “리커창의 잔뜩 찌푸린 미간에서 그의 진심을 읽었다” “찌푸린 미간에 감동을 받았다”는 댓글이 인터넷을 뒤덮었고, “그의 미간에 중국인민의 미래가 있다”며 대중들은 환호했다.

2009년 12월 중국에 폭설이 내렸을 때도 리커창은 현장으로 달려갔다. 산시(山西)성 다통(大同)현에 간 그는 폭설현장을 진두지휘했다. 당시에도 그는 가정집에 들어가 밀가루 항아리를 열어 밀가루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체크했고, 난방기를 손으로 만지며 따뜻한지를 직접 점검했다. 그는 다통시에 찾아가 실업자들과 빈민층을 찾아가 끼니를 거르고 있지는 않는지를 꼼꼼히 살피며 따뜻하게 인민을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관료사회 호령할 민생 전도사

2012년말 개막될 중국 제5세대 지도부에서 시진핑(習近平)과 함께 10년을 주도할 인물인 리커창상임 부총리는 유력한 차기 국무원 총리 후보다. 국무원 총리는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중국을 이끌어가는 두개의 축 중 하나이며, 리커창 현 상임 부총리는 2009년말부터 부쩍 자신감있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리커창은 이변이 없는 한 2012년 10월 열릴 제18대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 공산당 서열3위로 지명된 후 201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중국 국무원 총리에 올라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는 총리로서 중국경제의 구조조정과 신성장동력 확보, 내수확대와 서부대개발에 매진하면서 빈부격차 축소, 부동산거품 해소, 물가안정 등 중국의 경제정책 전반을 총지휘하게 된다. 특히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이어 공청단파의 수장에 올라서 과거 어느 총리보다 더 막강한 권한을 쥐고 중국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예상이다. 미국과 함께 G2에 올라선 중국경제를 잘 리드해 나갈 충분한 역량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따뜻하고 살뜰하게 민생을 챙기면서도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복지부동에는 불호령을 내리고 있다.

2011년 2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전국보장성주택공정업무회의에서 리커창은 “부동산가격을 안정시키고, 내수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보장성주택 1000만호 건설은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지상명령”이라고 강조했다. 수석 부총리가 공개석상에서 군사작전을 연상케 하는 ‘지상명령’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사실상 회의에 참석했던 지방정부 공무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보장성주택은 ‘저가형 임대주택(廉租房)’과 상업용 주택보다 저렴하게 분양되는 ’경제실용주택(經濟實用房)‘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최근 몇 년사이 급등한 집값으로 인한 서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부동산 규제책으로 인한 경기불황을 막기위해 중국정부가 야심차게 벌이고 있는 공공사업이며, 리커창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또한 국무원의 보장성주택 건설목표는 서부 내륙지역에 중점을 두고 있어 서부대개발정책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보장성주택건설은 토지분양가가 저렴해서 지방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지방정부들이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리커창은 이 자리에서 “보장성주택 1000만호는 반드시 올해 10월전에 모두 착공에 들어가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향후 10년이상 경제 전반을 책임질 차기 총리의 질타였기에 중국의 관료들은 리커창의 발언에 신속하게 반응했다.

◆2년여 슬럼프를 딛고

자신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이지만 2007년말부터 2년여동안은 슬럼프기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2007년 10월에 열린 17대 당대회에서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한 후 2008년 3월 국무원 상무부총리에 임명됐을 때 그에게 주어진 첫번째 임무는 국무원 대부제(大部制) 개혁이었다.

줄곧 차기 국가주석감으로 꼽혀오던 리커창으로서는 17대 당대회에서 시진핑(習近平)에 밀린 순번으로 상임위원에 진입하자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18대 당대회까지는 5년이 남아있으며 반전을 꾀할 수 있다는 계산에 초기부터 적극적인 드라이브를 걸고 나섰다는 게 현지반응이다. 때문에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던 대부제개혁에 도전한 것.

대부제개혁은 미국의 행정부는 15부, 일본은 12부, 프랑스는 18부인데 비해 중국은 28개 부처 체제였고, 이를 20개 안팎으로 축소해 국무원 조직을 효율화시킨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관료집단의 반발과 정치세력간 갈등에 밀려 부처 수는 종전 28개에서 27개로 단 1개 순감하는 데 그쳤다. 리커창으로서는 첫출발에서 체면을 구긴 셈이었다.

2009년에는 중국 인민들이 갈망하던 의료개혁의 첫 깃발을 올려졌다. 중앙정부는 16개 부처로 구성된 의료개혁영도소조를 조직했고 리커창이 조장을 맡았다. 당시 리커창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었다는 이야기마저 나올 정도로 그는 필사적이었다. 의료개혁의 목표는 시장지향적인 요소을 버리고 공익성을 강조한 공공의료를 도입해 대부분 인민들이 의료혜택을 보게끔 하는 것이 취지다. 3년내 8500억위안을 투자해 기본의료보험제도가 성(省)향(鄕)민을 커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이 계획 역시 초반의 의욕에 비해 내세울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시장경제개념을 배제한 개혁이었기에 의료서비스의 질적 업그레이드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
당시 관료사회에서는 “TV에서 리커창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보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고, 공문상에서 리커창의 지시를 보지만 그가 지향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목소리가 일었고 급기야 그의 신상에 대한 숱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베이징 정가에서는 리커창의 대안으로 왕치산(王岐山) 부총리가 떠올라 리커창을 제치고 차기 총리에 올라설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또 리커창이 베이징대 법대 출신인 만큼 총리직이 아닌 전인대 위원장 자리로 갈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전인대 위원장은 공산당 서열 2위로 총리보다 1단계 위지만, 그 영향력은 총리에 비할 바가 못된다. 게다가 그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임된 후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그의 능력에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리커창은 2009년말부터 슬럼프를 벗어나 자신의 역량을 불태우며 차기 총리로서의 입지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준비된 총리의 자신감 있는 행보

2010년 2월초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개최한 토론회에서 리커창은 “중국은 이미 경제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리커창이 중국의 거시적인 경제상황을 내다보고 있으며 전략적인 판단을 내림으로서 총리직을 넘겨받을 충분히 준비가 돼있음을 만방에 알린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그는 이어 “경제구조조정을 단행하는 것은 경제발전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함이며. 과거의 성장모델로는 지속이 어렵기 때문에 과학기술혁신과 산업구조 업그레이드를 이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회의에는 공산당 핵심인 25명의 정치국위원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경제는 물론 과학, 민생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이 중 많은 부분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해야 할 성격의 발언이었기에 리커창의 차기 총리로서의 입지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어 2010년 2월 국무원은 15개 부처가 참가하는 식품안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 구성은 당시 중국의 분유업체들이 멜라닌첨가제품을 판매한 사실이 적발되면서 분유파동이 일어난 데 대한 후속조치중 하나였다. 특이한 점은 리커창이 위원회 주임을 맡았으며 후이량위(回良玉) 부총리와 왕치산 부총리가 부주임을 맡았다는 것. 보통 부총리가 세명이나 한 위원회에 포함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만큼 식품안전문제에 대해 중국정부가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도 되며, 이 역시 리커창에 대한 공산당지도부의 변함없는 신뢰를 다시 한번 공표한 것으로도 해석됐다. 특히 리커창이 주임, 왕치산이 부주임을 맡은 것은 왕치산과 관련된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한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리커창은 위원회 1차회의에서 왕치산 부총리가 있는 자리에서 “철저히 조사해서 범법행위를 엄단하고 엄격하게 법적용을 하라”며 강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이는 리커창이 왕치산보다 서열이 높고 흔들림 없는 총리후보임을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리커창이 흔들린다는 소문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리커창은 그 후 부동산, 물가, 12차5개년규획, 빈부격차, 경제구조조정 등 전방위에 걸친 정책을 총괄하며 중국인민들과 관료들의 신임을 얻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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