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 <8>장더장-②이덕수에 발탁돼, 장쩌민에 등용되다

2009년 6월 중국 충칭(重慶)시 우룽(武隆)현에서 산사태재해가 발생한 직후 장더장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일선에서 긴급구조를 하고 있는 소방대원들을 찾아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있다.

(조용성=베이징 특파원) 1946년 11월 랴오닝(遼寧)성 타이안(台安)에서 태어난 장더장(張德江)은 유년시절부터 줄곧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시에서 자랐다. 장더장은 군인집안 출신으로 부친이 공산당 제1세대 군인인 장쯔이(張志毅)다. 지난(濟南)군구 포병 부사령관을 지냈었다. 장더장은 문화혁명 기간에는 홍위병으로 활동했고,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왕칭(汪淸)현의 농장으로 하방(下放)됐다. 인민공사에서 근로활동, 정치적 표현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장더장은 왕칭현에서 일생의 은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왕칭현 당 위원회 상무위원이던 조선족 출신 이덕수(李德洙)였다. 이덕수의 천거로 장더장은 왕칭현 선전조 간사가 됐다. 또한 이덕수는 1972년 장더장을 옌볜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했다. 그는 옌볜대에서 조선어를 전공했다. 이어 1978년 8월엔 교환 유학생으로 뽑혀 북한 김일성종합대에서 2년간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가 유학을 마치자 당시 옌볜자치주 당 서기였던 이덕수는 1983년 3월 그를 옌지(延吉)시 부서기로 발탁했다. 이후 중앙지도부가 그를 눈여겨보면서 승진가도를 달렸고, 부장급(장관급)에 머문 은사(恩師) 이덕수를 크게 앞지르기 시작했다.
◆일생의 은인, 이덕수

1989년 공산당 총서기에 오른 장쩌민은 이듬해 10월 그를 옌볜주 당 서기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장 총서기의 후원 아래 1992년 당 중앙후보위원에 뽑힌 데 이어 1997년부터는 내리 3번 연속 중앙위원으로, 나아가 2002년부터는 연속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됐다.

특히 한중 수교 2년 전인 1990년부터 1998년까지 8년 간 지린성에 있으면서 옌볜 자치주 서기(1990~1995), 지린성 서기(1995~1998)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린성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치협상회의가 열릴때면 매번 빠짐없이 지린성 대표단을 찾아 현지 사정을 경청하고 함께 의논해 왔다.

◆장쩌민시대에 승승장구

장더장은 이후 1998년 저장(浙江)성 서기로 부임했다. 4년동안의 치적 중 가장 손꼽히는 것은 농가소득 증대였다. 당시 연간 농가소득은 물가상승률분을 제외하고도 12.5%씩 성장했다. 장더장은 당시 “저장의 성공은 특색적인 발전방향을 도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촌에 각종 다양한 소유제 경제구조를 도입해 생산작물 다변화를 유도해 농가 생산성을 높이는 한편, 유통망 개선과 판매망 확대 등 공유제의 효과적인 실현형식을 모색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2002년 시진핑(習近平)에게 저장성 서기직을 넘기고 광둥성 서기로 옮겨간다. 장더장의 전임 광둥성 서기는 랴오닝(遼寧)성 출신인 리창춘(李長春)이었다. 리창춘 역시 장더장과 마찬가지로 상하이방의 핵심인사다.


◆쑨즈강 사건을 필두로…

이후 그에게는 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중국이 당시 직면했던 사회모순을 직시하게 된다. 첫번째로 맞닥뜨린 사건은 쑨즈강(孫志剛) 사건이다. 이는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출신으로 광저우(廣州)에서 직장을 다니던 쑨즈강이란 27세의 청년이 2003년 3월 17일 임시 거류증을 휴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랑자로 간주되어 임시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었다가 수용소 직원들의 구타로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 등 언론들은 이 사건에 대해 2개월여 간 끈질기게 문제 제기를 하였으며, 결국 1982년부터 시행되어오던 신분증 미 휴대자에 대한 강제 수용제도를 철폐하는 계기가 됐다.

이 때문에 이를 집중 보도했던 남방도시보는 ‘인민의 진정한 대변자’, ‘여론 감독의 이기(利器)’라며 극히 이례적 찬사를 받았다.

중국 정부는 1982년 주거지 행정기관이 발행한 신분증을 휴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수용시설에 강제 수용하거나 원적지로 강제 송환하는 내용의 ‘수용소 강제송환제도’를 실시해왔다.

사건이 확대되자 당시 공안부장이던 저우융캉(周永康)은 여러 차례 지시를 내려 철저한 조사를 당부했다. 광둥성 서기였던 장더장 역시 “반드시 범인을 가려내 엄중한 처벌을 해 법의 존엄을 밝히고 인민들의 권익을 지키고, 쑨즈강과 그 가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20명에 대해 2003년 6월 광저우 법원은 1심 판결에서 사형선고 2명을 포함한중형을 내렸다. 또한 광저우시 공무원 23명도 당정 기율검사위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신화통신은 ‘2003년에 잊지 못한 10대 인물로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와 함께 쑨즈강을 선정하기도 했다.

그해 7월에는 광저우 창저우(常州)의 마약중독자 재활원이 포주들과 결탁해 여성마약사범을 집창촌에 팔아넘겨왔다는 사실이 양청완바오(羊城晩報)에 의해 폭로된다. 이어 난팡일보가 만주사변 기념일인 9월18일(1931년)에 일본인들이 단체로 광저우에서 매춘관광을 한 사실을 보도했다. 이같은 사건사고가 이어지면서 장더장은 궁지에 몰렸다.

이에 더해 11월에 남방도시보는 광저우에 사스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사스 발생사실을 쉬쉬했던 광둥성은 “당국의 허가를 받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의적으로 사스관련 보도를 했다”며 화살을 남방도시보에 돌렸다.

지난 2008년 10월 장더장(張德江)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장쑤(江蘇)성 난징(南京)시에 위치한 장닝(江宁)개발구를 시찰하고 기업들의 기술혁신 성과와 창업정신을 치하하고 있다.



◆사회모순과 경제개발

2005년에는 샨웨이(汕尾)사건이 발생한다. 광둥성 산웨이시에서 벌어진 시위사태에서 인민무장경찰의 발포로 인해 일반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산웨이시 홍하이완(紅海灣)구 둥저우컹(東洲坑) 마을과 스궁자이(施公寨) 마을의 농민들은 둥저우컹 마을 부근에 건설되는 대형 산웨이화력발전소 부지용으로 수용되는 토지 보상금이 나오지 않자 그해 6월부터 시위를 벌여왔다. 사태가 해결되지 않은채 이후 약 5개월동안 주민들은 당국과 대치를 벌여왔고 급기야 무장경찰이 투입됐던 것.

산웨이시는 당시 날이 어두워진 데다 현장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경찰이 경고를 위해 총을 쏜 것이 잘못돼 사망 3명, 중상자 3명을 포함한 부상자 11명의 오사(誤死), 오상(誤傷)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홍콩 매체 명보(明報) 등은 사망자가 8명에 이르며 10여명은 실종상태라고 보도했다. 또한 뉴욕타임스는 현지 주민들은 20명 이상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보도해 국제사회에 큰 파장이 일어났다.

사회적으로는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장더장의 추진력으로 인해 광둥성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어갔다. 그는 2007년말 전국상품품질회의에서 “광둥성의 경제총량은 1998년 싱가포르를, 2003년에는 홍콩을, 2007년에는 대만을 뛰어넘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부인은 건설은행 부행장

장더장의 부인인 신수썬(辛樹森)은 1949년 산둥(산동)성 하이양(海陽)에서 태어났다. 1976년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동북재경대학 투자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부터 일을 했으며 1983년 중국건설은행 길림성 옌지시 분행 부행장을 했고, 1986년 중국 건설은행 인사부 처장을 역임했다. 1986년은 장더장이 옌지 부서기에서 국무원 민정부로 자리를 옮기던 해다.

남편을 따라 베이징으로 직장을 옮긴 것이다. 이후 신수썬은 계속 베이징에 머물며 건설은행 부행장까지 올라간다. 반면 남편인 장더장은 다시 지린성으로 부임받아갔으며, 이후 저장성, 광둥성에서 약 20여년을 근무했으니 이 기간동안 그들은 주말부부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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