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9>장가오리-②시멘트 운반공 출신의 경제영웅

(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1946년 11월 장가오리는 푸젠(福建)성 진장(晉江)시의 시골마을인 판징춘(潘俓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농민이었다. 장가오리는 관료의 길에 들어선 후 거의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장가오리는 4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10세도 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정은 몹시 가난했으며 장가오리가 소학교를 다닐 때 주로 먹은 것은 말린 고구마였다. 그는 학업성적이 빼어났으며 진장시 차오성(僑聲)중학교에 합격한 후에는 학생회 주석을 맡았었다.

장가오리에게는 딸이 한명 있으며, 사돈은 진장시의 이웃인 스스(石獅) 출신의 거상으로 홍콩지구 전국정치협상위원이자 신이(信義)유리의 주석인 리셴이(李賢義)다.

◆시멘트 운반공으로 사회 첫발

1965년 샤먼(廈門)대학 경제과에 입학한 장가오리는 5년후 1970년 8월 졸업한 후 석유부 광둥 마오밍(茂名) 석유공사에 근로자로 입사했다. 광둥성의 서부에 위치한 마오밍은 1950년대 후반기에 석유로 우뚝선 공업도시였다. 그는 처음에 운반공이었으며 매일 50㎏의 시멘트를 운반해야 했다. 그 후 그는 회사 비서, 정치부 공청단 총지부 서기, 회사 공청단 위원회 부서기, 정유공장 작업장 당총지부 서기, 공장 당위원회 부서기, 서기로 착실히 승진했다. 1980년에는 마오밍석화공사 계획처장과 부경리로 승진했고, 1984년에는 중국공산당 마오밍시 위원회 부서기, 중국석화총공사 마오밍석화공사 경리를 맡아 이 석유 대기업을 주관했다.

장가오리는 15년여를 석유기업에서 근무했다. 그는 스스로 "15년의 경험은 내 성격에 많은 영향을 줬으며, 당시의 경험에 따라 나는 매사 성실하고 진실된 말을 하고,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5년 장가오리는 당시 광둥성 성장이었던 량링광(梁靈光)의 도움으로 광둥성 경제위원회 주임에 발탁됐다. 1988년 42세의 장가오리는 광둥성 부성장으로 승진했다.

◆선전시 탈바꿈 주역

1997년 선전(深천<土+川>)시 서기를 맡으면서 그의 정치인생은 일취월장하게 된다. 장가오리는 선전을 국제적인 하이테크 도시이자, 첨단 그린도시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국제하이테크전람회를 기획했으며, 도시계획을 새로 마련해 친환경도시로 탈바꿈시켰다.

당시 선전은 이미 중국내에서 가장 현대화된 도시였지만 상대적으로 인근도시인 홍콩에 비해 많은 도시의 면모들이 낙후해 있었다. 장가오리는 부임후 1년동안 빈하이대로(濱海大道), 선난대로(深南大道)를 건설했으며 동문보행도로 개조사업 등 3가지 건설공사를 했다. 이중 선난대로는 아직까지 선전시를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황소, 우산, 돌멩이가 되겠습니다"

장가오리는 2001년12월 산둥(山東)성 부성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취임식에서 그는 "황소가 돼 인민을 위해 경작할 것이며, 우산이 돼 인민을 보호할 것이며, 돌멩이가 돼 인민들을 위한 도로와 교량이 될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후 2002년 성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산둥성 서기는 정치국위원이던 우관정(吳官正)이었다. 2002년 10월 우관정이 중앙기율위원회 서기 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라서자 장가오리는 산둥성 서기로 올라선다.

당시 중국에는 '80년대에는 광둥을 보고, 90년대에는 푸동(浦東)을 보고 21세기에는 산둥을 보라'는 말이 있었지만 산둥은 21세기 초 완만한 성장을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산둥성은 장가오리를 만나면서 경제성장에 가속페달을 밟게 된다. 2002년 산둥의 경제는 11.6%, 2003년에는 13.7%, 2004년에는 15.3%, 2005년에는 15.2% 성장했다. 2006년 산둥성의 GDP는 14.5% 성장했고, GDP총량은 처음으로 2조위안을 넘어서 광둥성에 이은 2위에 올랐다.


◆이임식장에서 떨군 눈물

2003년6월 장가오리는 산둥성 공작회의를 개최하면서 대담한 조치를 내놓았다. 2일간의 공작회의를 TV에 전체 공개하기로 한 것. 성내 최고위층의 공작회의는 전체 9000만명 성민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공개됐다. 지난(濟南)시의 한 기층간부는 당시의 사정을 “당시 충격적인 느낌을 받았다. 입에서만 맴돌던 개혁이 생활로 체화됐다”고 회고했다.

생방송을 한 이외에도 장가오리는 산동인에게 의외의 조치를 취한다. 당시 쑤저우(蘇州)시 서기인 왕민(王珉)과 원저우(溫州) 서기 리창(李强) 등을 데려와 어떻게 기회를 잡았으며 민간기업을 육성시켰으며 자원을 역동적으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강의를 공무원들에게 하게 했다.

2007년3월 장가오리는 톈진시 서기로 발령받았으며 이임식에서 "내가 어디를 가든지 산둥을 사랑하며 산둥을 생각하겠다. 산둥에서 많은 성취를 이룬 데 대해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빈하이신구 개발 박차

장가오리가 텐진에 온 이후 두가지 임무는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지역내의 부패청산이었다. 이 두가지 항목은 중국공산당의 난제였다. 장가오리는 취임식에서“무른 중앙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단호히 하지 않겠습니다. 중앙이 하라고 독려하는 일은 가장 먼저 하겠습니다. 인민이 요구하는 것은 열심히 하고, 각급 당 조직과 당원간부들의 감독을 스스로 받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장가오리는 부임한 이튿날 아침 일찍 빈하이신구(濱海新區)에 시찰을 나갔다. 둘러보고는 “빈하이는 톈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전국적인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빈하이신구는 제조, 물류, 금융, 첨단산업을 주력으로 하는 경제중심지다. 중국 현 지도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베이징과 허베이(河北), 산둥(山東), 랴오닝(遼寧) 등을 포괄하는 환보하이(環渤海) 지역의 핵심 경제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다.


◆"부패는 공산당 집권기초를 약화시켜"

그가 취임하기 전부터 톈진은 부패의 온상으로 지적돼 왔다. 2006년 천즈펑(陳質楓) 톈진(天津)시 부시장을 포함한 톈진시 관리들이 대거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으며, 톈진시 검찰원장인 리바오진(李寶金)을 구속시켰다.

2007년6월에는 쑹핑순(宋平順) 톈진시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이 신화(新華)로의 정협 건물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쑹 주석은 자살 전 관계당국으로부터 비리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톈진시 공안국장과 정법위 서기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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