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 = 조용성특파원) 기획과 재정분야에서 정통관료의 길을 걸어온 마카이(馬凱) 국무원 비서장은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강력한 신임과 지원을 바탕으로 정치국위원에 재도전하고 있는 인물이다.
마카이의 커리어는 중국의 거시경제 분야에 집중돼 있다. 그는 국가 물가국, 국가 체제 개혁위원회, 국가계획위원회, 국무원 판공청, 발전개혁위원회 등 국무원 핵심부처에서 잔뼈가 굵었다. 특히 2003년에는 초대 발전개혁위원장에 보임돼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2007년 중앙위원에서 정치국위원으로 승진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올라서지 못했다.
내년이면 66세인 마카이로서는 이번 18대 전국대표대회(당 대회)가 정치국위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는 거시경제 분야에서의 실력은 이미 인정받았다. 다만 정치력과 조정력에서 약점을 보인다는 평가다. 지난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위원에 승진하지 못한 것도 이같은 약점 때문이었다.
이후 원자바오 총리의 비서장을 맡으면서 철저히 자기관리를 해 온 만큼, 그리고 확고한 원 총리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만큼 내년에 있을 당 대회에서는 충분히 정치국위원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는 정치국위원에 올라선 뒤 이듬해인 201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산업, 에너지, 교통, 통신을 관장하는 부총리자리로 영전해 갈 것이라는 가설이 유력한 상황이다. 현재 이 자리는 장더장(張德江) 부총리가 맡고 있다.
◆문혁때 사회모순에 눈떠
조적(조상의 고향)이 상하이(上海) 금산(金山)인 마카이는 1946년 6월 산시(山西)성이 싱(興)현의 한 8로군 후방 병원에서 태어났다. 항일전쟁이 끝나던 시기에 잉태했다고 해서 ‘개선(凱旋)장군’에서 이름을 따 마카이(馬凱)로 작명했다.
1955년 마카이는 부모와 함께 베이징에 왔고 1959년에는 혁명원로들의 자제들이 다니던 베이징시 제4중에 입학했다. 1965년 졸업당시 몸이 약해 대입경쟁에 뛰어들지 못했고, 제4중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1971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는 베이징 교외의 57간부학교에서 노동교화를 받는다. 갓 서재에서 나온듯한 창백한 얼굴의 인텔리였던 마카이는 그 곳에서 2년동안 논밭을 갈고,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분뇨를 처리하던 일을 하게 된다.
1973년 마카이는 베이징시 시청(西城)구 위원회 당 간부학교로 이동해 교직을 다시 맡는다. 철학과 정치경제학강좌를 담당했다. 그러던 그는 1979년 많은 나이에 중국 인민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한다.
1982년 발표한 석사논문 ‘가격형성을 계획하는 요소분석’은 중국사회과학이라는 정기간행물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웨이싱화(衛興華)는 “마카이의 논문은 교수라도 쓰기 어려운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웨이싱화는 마카이가 학교에 남길 원했지만 문화대혁명 시절 사회모순을 뼈저리게 느낀 마카이는 관료의 길을 선택한다.
◆베이징에서 천위안의 좌장
1983년 37살의 그는 북경시 시청구의 부구장 겸 계획위원회의 주임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당시 시청구의 서기는 천윈(陳雲)의 아들인 천위안(陳元,현재 국가개발은행 행장)이었다. 천위안은 마카이의 베이징제4중 1년 선배였다. 시청구에서 학력이 가장 높았고, 게다가 경제를 전공한 유일한 간부였던 마카이는 매일 여섯시반에 출근해 저녁 10시에 퇴근하면서 천위안이 시청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마카이는 1985년 베이징시 체제개혁위원회 부주임으로 옮겨갔으며, 이후 1986년 베이징시 물가국 국장으로 승진했다. 1988년 중앙으로 옮겨와 국가물가국 부국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마카이는 본격적인 중국 거시정책 전문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 국가계획위원회를 거친 마카이는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눈에 들어 1998년 장관급인 국무원 부비서장에 발탁된다. 당시 국무원 비서장은 왕중위(王忠禹)였다.
같은해 양자강 대홍수가 났을때 원자바오 당시 농업, 금융담당 부총리는 국가수해지휘부의 주임이었고, 마카이는 부주임이었다. 이 때 마카이는 원자바오를 도와 수해지역을 돌보며 신뢰관계를 쌓았다.
이 시기 마카이는 총리와 부총리가 직함만 걸어놓고 챙기지 못하는 위원회에 부직무를 맡아 대신 업무를 주관하며 다양한 행정경험을 쌓는다.
◆발개위 초대 주임의 영예
2003년 원자바오 내각이 출범하자 원총리는 과거 국가계획위원회를 확대개편시킨 발전개혁위원회를 만들고 초대 주임으로 마카이를 임명한다. 1952년 설립된 국가계획위원회는 중국이 계획경제체제에서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주룽지 총리가 1998년 국가발전계획위원회로 명칭을 바꿨다. 5년후인 2003년에는 기관명칭에서 ‘계획’을 빼고 ‘개혁’을 집어넣어 국가발전개혁위원회로 전환시켰으며, 이 조직에 국가경제무역위원회의 부분직능과 국무원경제체제개혁판공실을 합병시켰다.
발개위의 초대 주임을 맡은 마카이는 발개위의 주요업무를 중국의 각종 경제개혁 추진 및 감독과 WTO 가입에 따른 중국경제를 국제적 수준으로 맞춰 개혁하는 것으로 맞췄으며, 은행을 포함한 금융개혁과 국유기업 개혁, 실업자 및 퇴직인원에 대한 사회보장제도의 확립 등 광범위한 개혁방향을 설정했다. 원총리의 지원아래 발개위는 환율, 화폐, 무역, 에너지, 외자기업, 국유기업, 물가, 노동, 외교, 지역, 과학기술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마카이는 발개위 주임으로서 지방의 법규를 위반한 여러건의 개발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장쑤(江蘇)성의 톄번(鐵本)강철공사를 강하게 처벌하면서 중국내에서 민영회사에 대한 압박이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카이는 이에 대해 “톄번이 민영기업이기 때문이 아니라 건설용지 사용, 환경심사, 은행대출과 납세 등의 분야에서 법률과 법규를 위반했기 때문”이라고 잘라말랬다.
그가 휘두른 칼이 너무 매서워서였을까. 그는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쓴맛을 본다. 당시 가장 유력한 정치국위원 후보였던 마카이는 지방 표심을 잃어 승진대상에서 제외된다.
◆승진누락의 좌절을 딛고
2007년 9월 초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수행해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마카이는 후 주석으로부터 자신의 승진 탈락 소식을 직접 전해들었다고 한다. 마카이는 APEC 정상회담이 끝난 뒤 얼마 후 허리 통증을 호소해 오는 등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17대 당대회 개막식과 폐막식은 물론 모든 회의석상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의 명보(明報)는 대규모 사업에 대한 승인권과 감독권을 거머쥐고 있었던 마카이가 지방의 불만 세력을 많이 키운 것 같다고 분석했다. 담당 직무 성격상 중앙과 지방 모두의 입장에서 중간자적인 결단을 내리면서 양쪽 모두에 좋은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는 것. 신문은 “마카이 주임의 업무가 많아 중앙과 지방 모두를 아우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며 “지방 세력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결국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대신 국무위원 겸 국무원 비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국가행정학원 원장도 겸하고 있다. 국무원 비서장은 원자바오 총리의 비서실장 격으로 총리를 보좌해 각부의 정책을 조정하고 거시정책을 수립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거부감을 희석시키는 데 주력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중국의 서부대개발영도소조와 국가에너지영도소조의 주임을 맡아 이들 정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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