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2002년 10월 16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장쩌민(江澤民)은 후진타오(胡錦濤)에게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직을 넘겨줬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직마저도 물려주면서 후진타오 시대를 열어줬다.
하지만 장쩌민은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은 내놓지 않았다. 장쩌민이 군사위 주석직을 유지했던 표면적인 명분은 대만문제해결과 정국안정 등 두가지였다. 내면의 이유는 퇴임후의 신변보장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이후 장쩌민은 권력교체가 원만히 이행된다고 판단되던 2005년 3월 군사위 주석직을 후진타오 국가주석에 넘겨주었다.
후진타오 주석 역시 장 전 주석의 선례에 따라 총서기직과 국가주석직은 시진핑(習近平)에 물려주면서도 군사위 주석직은 당분간 유지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2007년 차기 후계자로 사실상 시진핑이 내정됐음에도 시진핑이 군사위 부주석에 올라간 것은 3년이 지난 2010년 10월이었다. 그만큼 중국에서 군사권의 승계는 민감한 측면이 있다.
중앙군사위원회에도 새로운 임기에 취임할 때 68세를 넘으면 안된다는 연령제한이 적용된다. 하지만 후진타오가 2012년 이후에도 군사위 주석을 유지한다면 그의 영향력을 유지시켜줄 군사위 부주석이 한명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인사수요가 존재한다. 때문에 관례를 깨고 연로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두명의 군사위 부주석인 궈보슝(郭伯雄)과 쉬차이허우(徐才厚) 중 한명의 연임이 점쳐지고 있다. 게다가 군부내 세대교체는 다른 부분보다 한박자 느리다. 만약 연임이 된다면 그는 후진타오의 군사위 주석직 퇴임과 함께 은퇴할 가능성이 높다. 두명의 부주석중 쉬차이허우의 연임이 유력해 보인다.
◆후로부터 부주석직 물려받아
궈보슝은 군사훈련을 주관하고 있는 부주석이며, 쉬차이허우는 군내 정치활동을 주관하고 있다. 쉬차이허우는 군사위부주석에 오르기 전 총 정치부 주임을 맡아왔고 후진타오의 집권기간동안 군대내 정치공작을 장기간 맡아온 만큼 후진타오의 국가주석직 이임 이후에도 충실히 군대내에서 후진타오의 핵심가치관을 전파할 수 있다. 또한 그만큼 쉬차이허우는 후진타오의 신뢰가 깊다는 평이다.
쉬차이허우는 후진타오의 군부내 오른팔로 불린다. 2002년 말 후 주석이 당 총서기에 취임하자 그는 후 주석과 함께 오지를 시찰하는 등 심복으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2005년 3월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한 뒤 후진타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쉬차이허우에게 넘겨줬다.
쉬차이허우는 그 후 군부의 정치사상과 간부의 인사, 선전 교육을 모두 장악하고 있으며, 군과 당의 다리 구실을 하며 당심(黨心)을 군에 전하고 군심(軍心)을 당에 올리고 있다. 후 주석의 ‘과학발전관’을 군에서 관철하는 것도 그의 임무다.
◆귀족학교에 입학한 평민
쉬차이허우는 랴오닝(遼寧)성 와팡디옌(瓦房店) 출신으로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을 나왔다.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은 당 간부의 자녀들이 많이 다녀 귀족학교로 불렸던 곳이다. 현재 정치국위원인 위정성(兪正聲)이 그의 동기동창이다.
귀족학교를 나왔지만 ‘귀족’이 아니었던 그는 해방군에 사병으로 입대했고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군부대 농장에서 노동자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 3월 27세의 쉬차이허우는 지린(吉林)성 군구의 독립사단 3연대 2대대 6중대에서 말단 병사로 배치받았다. 당시 각 성 군구는 모두 하나의 독립사와 독립2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독립사단은 군 조직체계가 아닌 성 군구 관할의 직속부대에 속했다.
이듬해 그는 사병의 삶을 벗어나 선양군구의 수비 제3대에 배치돼 부지도원을 맡았다. 이때부더 쉬차이허우의 군대정치업무가 시작된다.
이후 쉬차이허우는 이듬해 린뱌오(林彪)사건 발생후 대대적인 인사이동의 물결을 타고 지린성 군구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때 그는 그의 일생의 백락(伯樂)인 조남기(趙南起, 조선족) 장군을 만나게 된다.
◆조남기장군을 만나다
총후근부장, 정협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는 지린성 군구 정치부 주임일 당시 군간부의 지식화를 강조하며 명문 하얼빈 군사공정학원 출신인 쉬차이허우를 발탁, 정치부 간부처 부처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조남기 장군은 1980년 쉬차이허우를 해방군 정치학원에서 2년간 정치학습을 받도록 했다. 이 것의 쉬차이허우의 오늘을 있게 한 기반이 됐다.
쉬차이허우는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에서 군사과학기술과 해방군 정치학원에서의 정치학습을 통해 중국 군대 내에서 엘리트양성코스를 모두 밟게 됐다. 당시 이같은 경력은 군대내에서 상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정치학원에서 원대로 복귀한 쉬차이허우는 조남기 장군의 추천으로 39세에 지린성 군구 정치부 간부처 처장으로 진급했다.
1984년 쉬차이허우는 지린성 군구의 상급기관인 선양(瀋陽)군구 정치부 군중업무부 부장(부군단장급)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양군구는 해방군 7대군구 중 하나로 동북지구의 병력을 관할한다. 이외에 중국의 육군에는 베이징(北京)군구, 란저우(蘭州)군구, 지난(濟南)군구, 난징(南京)군구, 광저우(廣州)군구, 청두(成都)군구 등의 대군구가 있다. 이 밖에 해군, 공군, 제2포병(미사일부대)부대가 존재한다. 선양군구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쉬차이허우는 곧바로 1985년 지린성 창춘(長春)일대에 주둔하는 육군 제16집단군 정치부 주임(부군단장급)으로 이동한다.
이와 동시에 조남기장군이 그해 지린성 군구 정치위원에서 해방군 총병참부 정치위원겸 부부장으로 수직 상승해 중앙으로 이동했다. 조남기장군은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총병참부 부장을 맡아 쉬차이허우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특히 조남기 장군이 총후근부 정치위원으로 진출하면서 쉬차이허우를 중앙에 추천해 군단급 정치위원으로 성장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쉬차이허우는 1990년 집단군 정치위원으로 발탁된다.
중국은 정부가 아닌 공산당이 인민해방군을 지휘한다. 해방군은 설립초기부터 공산당의 엄격한 정치지도와 군사지휘 하에서 성장해 왔으며, 아직도 당내에 군최고 사령부인 중앙군사위원회가 공산당 내부조직으로 설치돼 있다. 또한 7대군구를 포함한 대군구에도 사령원과 함께 정치위원이 존재한다. 사령원과 정치위원은 계급이 같으며 각자 업무를 분담한다.
◆장쩌민시대에 승진 가속페달
1992년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겸 총정치부 주임이던 양바이빙(楊白氷)이 장쩌민에 의해 실각된다. 라이벌로 여겨지던 양바이빙을 제거하고 군권을 장악한 장쩌민은 그들의 심복들에 대해 대숙청작업을 가한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인사수요가 발생했고 엘리트군인이면서도 청렴하다는 평을 받고 있던 쉬차이허우는 총정치부 주임조리에 올라서게 된다. 1993년 쉬차이허우는 총정치부 조리로서 해방군보사 사장을 겸임했다.
쉬차이허우는 장쩌민이 해방군보를 장악할 수 있도록 확실히 도왔고, 장쩌민의 활약을 두드러지게 보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장쩌민이 신뢰하는 장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1996년 쉬차이허우는 지난(濟南)군구 정치위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곳에서 그는 지난군구를 장악하며 대군구 업무를 주관하는 경험을 하게 됐다.
1999년 9월 공산당 15기4중전회에서 당시 국가부주석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올랐다. 이와 함께 쉬차이허우는 당시 란저우군구 사령관 궈보슝과 함께 중앙군사위원회에 보임됐다. 이후 쉬차이허우는 총정치부 상무부주임에 기용된다.
2003년 8월 북핵관련 6자회담을 앞두고 인민해방군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한 경험도 있다.
지인들은 그에대해 ‘결코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전한다. 그만큼 신중하고 냉정하며 판단력과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는 그를 현대적인 군의 인물로 나무랄 데 없는 명성과 정치적 배경을 지닌 군 지도자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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