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중국 국무원 교육부 부장에 임명된 위안구이런(袁貴仁)의 취임일성이었다. 그는 농촌지역의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이들 지역에 근무하는 교사들에게 더 많은 교육자원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그는 “교육자원이 도시지역에 집중적으로 배분돼서는 안되며 농촌지역이나 학교에 균형있게 배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육개혁에 대한 연구를 2년여 진행했던 위안구이런은 올해 3월 ‘국가 중장기 교육 개혁 및 발전 계획 개요’의 의견수렴안을 발표했다. 의견수렴안은 22장 70조로 구성돼 있으며 평등한 교육기회 제공, 교육의 질적 개선을 기본방침으로 하고 있다. 2012년까지 교육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4%까지 늘린다는 방침도 함께 발표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최초로 교육평등을 국책사업으로 책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어 올 4월에는 주룽지(朱鎔基) 전 중국 총리가 모교인 칭화(淸華)대를 방문, 중국의 교육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위안구이런의 개혁안에 힘을 실어주었다. 주 전총리는 중국 대학에 만연해 있는 가짜 논문과 부실한 기초교육문제를 언급했다. 특히 주 전 총리는 농촌교육 문제와 관련해 “상하이 모터쇼에서는 1억위안이 넘는 초호화 승용차가 팔리고 있는데 수많은 농촌의 어린이들은 아직 무상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칭화대 행사에 참석해있던 위안구이런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위안구이런의 개혁안에 대한 주룽지의 공개적인 지지와 조속한 실행에 대한 촉구로 받아들여지며 위안구이런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평가됐다.
중국 교육개혁을 책임지고 있는 위안구이런은 중학교 선생님을 지내다가 대학에 들어가 학자의 길을 걸었고 결국 대학총장까지 올랐으며 이어 관료사회에 진입해 교육부 부장까지 오른 자타공히 교육분야의 중국최고 전문가다.
1950년 11월 안후이(安徽)성 구전(固鎭)에서 태어난 위안구이런은 지역의 소문난 수재였다. 모든 과목에서 1등을 달렸으며 그의 작문은 모범작문으로 꼽혀 선생님들이 전교생에게 돌려보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65년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정상적인 학업이 불가능해졌다. 그는 고향마을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당시 그의 마을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은 단지 4명에 불과했으며 성적이 탁월했던 위안구이런은 당시에도 이미 유명인사였다.
그가 19세이던 1969년 왕좡(汪庄)중학교의 한 관계자는 위안구이런을 찾아갔다. 당시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교사들이 대부분 하방당했기 때문에 교육인력이 부족했다. 그들은 위안구이런에게 중학교 교사가 되줄것을 부탁했다. 위안구이런은 제안을 수락해 중학교 어문교사가 된다.
그와 함께 당시 교편을 잡았던 가오정성(高政勝)은 “위안구이런은 안후이성에서 우수교사로 수차례 선발됐었던 우리학교의 자랑”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1978년 대학입시가 부활하자 교사였던 그는 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베이징사범대학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취득했고 1984년부터는 베이징사범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독서가 유일한 취미였다. 그는 학교주변의 서점을 즐겨찾았으며, 매주 학생들에게 신간소개를 해주면서 도서추천을 했다고 한다.
톈안먼(天安門)사건이 발발한 1989년 많은 교수들이 대학에서 해임됐다. 그해 위안구이런은 사범대학 사회과학처 처장에 올랐고 1995년에는 상무부총장에 올랐다. 중국의 교육계에 관한 논문을 여러편 발표했던 그를 베이징시에서 1998년 시 교육위원회 주임으로 영입한다. 교육위 주임으로 1년여 근무한 후 그는 베이징사범대 총장에 올랐다. 그리고 2001년에는 국무원 교육부로 특채됐으며 8년간을 부부장으로 근무한 후 2009년 교육부 부장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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