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팀은 허난(河南)성 난양(南陽)시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신야로 향했다. 가는동안 넓디 넓은 밀밭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다.
안내원은 “한나라 말 삼국시대에 군주들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했습니다. 특히 중원은 드넓은 평야지대로 이뤄졌기 때문에 군량을 보급하기엔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많이 벌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취재진이 차량이 달리던 길에서는 울퉁불퉁하거나 경사진 둔덕은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원은 장비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 곳 신야에서만 파는 ‘장비판면 (張飛板面) ’ 또한 신야판면(新野板面)이라고 불리는 국수가 있습니다. 먹성이 좋았던 장비가 주방장이 준 국수 양이 작다며 다시 만들어 오라고 행패를 부리며 면을 바닥으로 내팽개 쳤습니다. 주방장은 장비가 내팽개 친 면으로 다시 국수를 삶아 내왔는데 양도 많고 맛도 좋아 사람들에게 많이 팔리면서 유명해졌습니다. 지금은 국가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 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신야판면을 꼭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취재팀은 신야현 차오양루(朝陽路)에 위치한 메이스청(美食城)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해 한국에서 신야판면을 취재하러 왔다고 하니 사장이 직접 나와 취재팀에게 신야판면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주방장은 능숙한 솜씨로 면을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몇 번을 내리 치더니 국수를 삶은 후 접시에 먹기 좋게 담았다. 그리고 육수와 큼지막한 고기 몇 조각을 국수 위에 올리니 먹음직한 신야판면이 완성됐다. 면의 두께가 일반 국수보다 두꺼웠고 맛은 약간 매콤했다.
신야 현지에서 삼국지 시대의 별미를 맛본 취재팀은 안내원을 따라 과졘수(掛檢樹,괘검수) 라는 곳으로 향했다. 괘검수는 신야에 머물
당시 유비가 검술을 연마하며 검을 걸어놨다는 나무다. 괘검수는 신야현 지역 공안국 건물 안에 위치해 있었다. 유비가 검술을 연마하던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했다.
이후 취재팀은 서서와 유비가 이별한 장소로 1시간 동안 달려 한 도로변에 도착했다. 도로변에서 안으로 걸어들어가니 안내원은 숲길인 이 곳이 예전에 서서와 유비가 이별했다는 곳 쳰셴링 (薦賢陵,천현령)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서서가 유비를 발견한 것은 매우 우연이였습니다. 서서는 한 때 유표를 만나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자 했으나 그의 그릇이 작다고 느껴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줄 사람을 찾아 신야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뜻을 펼칠 주인을 찾았죠 그러던 중 이 노래를 듣고 서서의 비범함을 알게돼 그를 등용한 것입니다.”
山谷有賢兮(산곡유현혜) 산골짜기에 현명한 사람이 있네.
欲投明主(욕투명주) 밝은 주인을 찾고자하네.
明主求賢兮(명주구현혜) 밝은 주인은 어진 이를 구한다 말은 하지만
却不知吾(각부지우) 도리어 나를 알아보지 못하네.
유비에게 등용된 서서는 신야를 공격해 온 조조의 장수 조인(曹仁)이 이끈 부대를 물리치고 번성을 차지하는 뛰어난 지략을 보여준다.그 소식을 들은 조조는 분통해하면서도 그의 능력을 흠모해 서서를 자신의 편으로 이끌기를 원한다.
조조의 군사 정욱은 “서서는 효심이 매우 깊은 인물입니다. 그의 어머니를 이곳으로 데리고와서 서서에게 서신을 보내면 필시 어머니를 따라 이쪽으로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정욱의 말을 따라 서서의 노모를 허도로 데리고 온 뒤 서서에게 서신을 보낸다. 효심이 깊었던 서서는 노모를 모시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유비와 이별을 결심한다.
안내원은 “그들이 이별한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특히 당시 유비는 서서가 떠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주변의 나무를 모두 베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집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서는 떠나면서 유비를 위해 자신을 대신할 군사로 당시 난양에 머물고 있던 와룡 제갈량을 천거했고 역사는 바뀌게 된다.
비록 유비는 서서와 아쉽게 이별하게 됐지만 제갈량을 얻게되면서 천하를 호령하는 주인으로 거듭나니 어쩌면 서서와 유비의 이별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취재팀은 이어서 유비가 조조군의 공격으로 후퇴할 당시 관우가 말을 타고 가던 길을 백성들이 막아섰다는 란마차오(拦馬僑,란마교)로 향했다. 마침 신야현은 장날이라서 시끌벅적했다. 취재팀은 곧 골목길에 있는 한 호텔 앞에 멈춰섰다. 호텔 앞에 있는 돌들을 가리키며 안내원은 이 곳이 란마교라며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당시 조조는 10만 대군을 거느렸지만 유비의 병력은 고작 2000명에 불과했기에 후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유비가 후퇴한다는 말을 듣자 불안에 떨면서 관우가 가던 길을 막습니다. 그러자 관우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조조를 기필코 잡을 것이며, 잡아오지 못하면 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라고 하니 백성들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유비는 비록 이 곳에서 서서를 잃었지만 제갈량을 얻었고, 신야에서 후퇴한 뒤로는 손권과의 동맹으로 적벽대전을 통해 조조를 물리친다.
작은 시골마을에 불과한 신야. 그러나 이곳이 없었더라면 유비와 제갈량과의 인연도, 적벽대전의 승리도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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