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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모태 선경직물을 창립한 고 최종건 회장. |
SK 창업주인 고 최종건 회장이 처음 수출을 성사시킬 당시 내걸었던 원칙이다. 지금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SK가 해외시장에 첫발을 디딜 때 선대 회장의 이 같은 노력이 있었다.
내수가 힘들면 수출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지금의 SK가 그러하다. SK의 모태인 선경직물 때도 그랬다. 이론은 간단했다. 수출 가능한 1등 제품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기적에 가까웠다. 전쟁 후 폐허에서 국내 첫 직물 수출을 일궈낸 공전의 히트작을 만들어낸 선경직물과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국내에서 석유제품을 수출 1위 품목에 올려놓은 SK의 역사가 평행선을 긋고 있다. 여기엔 불가능을 가능케 만든 불굴의 리더십이 있었다.
◆폐허에서 만든 1등제품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주둔했던 선경직물공장은 미군의 폭격을 맞아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 최종건 회장은 고철이 되다시피 한 직기를 수리하기 위해 폐허가 된 공장터를 뒤져가며 나사못과 부품을 찾았고, 공장 한편에 군용침대를 마련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장난 직기를 재조립했다. 그 결과 직기 100대 중 20대를 조립 가공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선경직물이 오늘날 SK로 성장하게 된 밑바탕에는 최종건 회장의 불굴의 의지와 패기가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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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경직물의 히트상품인 '닭표안감'의 상표. |
그 속에도 선경직물만은 제품이 창고에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갔다. 선경직물의 인조견 ‘닭표 안감’은 ‘지누시(양복을 만든 후 안감이 변형되지 않게 하기 위한 재단 전 세탁·다림질)’를 하지 않고도 재단이 가능한 유일한 안감이었다.
선경직물이 이처럼 좋은 품질의 안감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최종건 회장이 강조한 ‘품질 제일주의’ 덕분이었다. 최종건 회장은 선경직물을 국내 제일의 직물공장으로 키우기를 원했고, 그 실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최고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종건 회장은 양복 안감 생산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열처리과정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지누시가 필요 없는 안감을 생산할 수 있었다.
◆품질이 수출길 열다
닭표 안감은 1955년 산업박람회에서 부통령상(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는 일부 수요자들 사이에서만 인기를 누려오던 이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전국적인 브랜드로 각인시켰다. 가짜 닭표 안감이 심각하게 범람할 정도였다.
5·16 발발 전후 선경직물과 직물업계는 또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정부의 외환 부족으로 인한 원사 수입 감축, 시중의 자금경색 등으로 경영난이 심각해졌다. 이 또한 위기 해법의 열쇠는 '1등 제품'이 쥐고 있었다. 최종건 회장은 닭표 안감을 앞세워 불황 탈출의 돌파구를 수출에서 찾았다.
수출은 쉽지 않았다. 무역회사의 반응은 대기업 계열의 직물회사들도 못하는데 선경직물 같은 중소기업이 무슨 수출이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선경직물은 해외 무역회사를 상대로 수출상담을 직접 추진했다. 홍콩 무역회사 주소록을 확보해 닭표 안감의 견본을 보냈다. 발송한 지 한 달 뒤 홍콩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1962년 4월 8일 한국은 비로소 인견직물 수출국이라는 이름을 올렸다. 선경직물이 이뤄낸 결과다. 당시 선경직물의 한 임원은“가장 기뻤던 일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경이 직물류의 수출을 시도해 첫 선적을 해놓고 회장 이하 전사원이 환성을 올렸을 때”라며 “처음으로 선경이 세계 속의 선경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닭표 안감은 홍콩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선경직물은 곧 홍콩 바이어들과 직거래를 틀 수 있었다. 1962년 한 해 동안 선경직물은 4만6000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한편 선경은 1970년대 중후반 최종현 회장대에 이르러 급격한 사세확장으로 대기업반열에 들게 된다. 최종현 회장은 섬유에서 석유까지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천명하고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최종현 회장은 특히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부응해 강력한 수출 진흥책을 구사한다. 1976년 선경은 창립 이후 최초로 매출액 1000억원을 돌파하고 1970년대 후반 국내 10대 기업으로 도약하게 된다.
◆대를 이은 수출전략
지금의 SK도 비슷한 역사를 쓰고 있다. SK그룹은 지난해 세계적인 불황에도 사상 최대 규모인 600억 달러(한화 약 64조2000억원)의 수출실적을 달성했다. 국가 전체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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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 회장. |
이 같은 성과는 최태원 회장이 꾸준히 강조해온 수출 드라이브 전략의 결실이란 평이 지배적이다. 실제 최 회장 취임 전인 1997년 SK의 수출비중은 30.8%에 그쳤으나, 최근 수년 동안 사상 최대 수출 기록을 잇따라 경신했고, 지난해 수출비중은 74%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사업화를 목적으로 하는 신개념 R&D를 내세워 시장 차별화에 성공했다. SK 각 계열사들의 수출이 늘어난 데는 R&D 성과들이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염분이 함유된 원유에서 염분을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고염분의 원유는 정제가 어려워 일반 원유보다 싸게 거래되지만 기술력이 없는 정유회사는 상대적으로 비싼 일반 원유를 수입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SK이노베이션은 원유 수입처를 다변화할 수 있는 만큼 높은 수출경쟁력을 갖게 됐다.
최태원 회장은 “M&A나 투자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경쟁사보다 더 큰 수확을 기대하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면서 “기술 지향적 회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SK가 위기 속에도 수출 활로를 뚫게 만든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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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 직원들이 수출할 석유제품을 선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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