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과 CJ 사태 등으로 차명계좌를 이용한 범죄가 이어지자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금융실명제 도입, 20년 평가
금융실명제가 처음 언급된 것은 5공화국 시절이었던 지난 1982년 5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어음 사기사건’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1961년 제정된 ‘예금·적금 등에 대한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차명·가명거래도 일부 법적으로 용인했다.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저축 기반을 넓혀가는 것이 시작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같은 환경과 군부 권력의 비호 아래 이들 부부가 2년간 벌인 어음사기 규모만 6404억원에 달했다.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금융사기 사건’이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이에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이 거론되면서 같은 해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1983년부터 실시될 예정이었던 금융실명제법은 10년간 수면 아래 있었다. 정치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한 정치권의 반발과 금융거래 위축 등의 부작용을 언급하는 여론에 밀려 번번이 좌초됐기 때문이다.
권력형 비리와 부패가 난무하는 가운데 결국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칼을 빼들었다. 그 해 6월, 철통 보안 속에 금융실명제법 추진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
극비리에 작업을 시작한 지 두 달여 만인 1993년 8월 12일, 김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전격 발동하고 당일 오후 8시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비실명계좌의 실명확인 없는 인출을 금지하고 3000만원 이상을 인출할 경우 국세청 통보가 의무화되는 한편 자금 출처 조사도 가능하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시행 직후 혼란을 가져올 것이란 우려가 높았지만 초반의 혼란은 빠르게 수습됐다. 곤두박질치던 주가는 1주일 만에 제자리를 찾았고, 두 달의 실명전환 의무기간 동안 금융기관의 전체 가명계좌에서 96.0%가 실명 전환했다. 전환한 계좌 금액 규모만 2조7500억원에 달한다.
금융실명제법 이후에도 금융회사가 불법자금의 혐의에 대해 확인할 수 있도록 금융정보분석원(FIU)에 보고하는 ‘특정금융거래보고법’과 범죄수익은닉규제법 등으로 꾸준히 실명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왔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 원장은 “금융실명제 시행은 혁명에 가까운 정책적 변화였고 의미 있는 결과들을 낳았다”면서 “지금 불법적 금융 거래들을 잡아낼 수 있게 된 것도 실명제가 아니었음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실명제 도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차명계좌…제도개선의 도화선
2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실명제법을 보완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현재 실명제법은 '차명도 실명'이라는 느슨한 원칙에 따라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는 막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지하경제 양성화와 투명한 금융거래 보장이라는 당초 취지가 퇴색됐다는 게 그 이유다.
정치권에서는 일부 의원들이 이미 차명계좌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하거나 준비중이다.
문제는 이른바 ‘선의의 차명계좌’다. 동창회나 친목 모임에서 만든 계좌나 부모가 자식의 이름으로 만드는 통장 등이 모두 엄밀히 따지면 차명계좌로 분류된다. 자칫 국민 대부분을 잠재적인 범법자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박근혜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국정과제로 내걸고 탈세와의 전면전을 통한 세수발굴에 나선 상태다. 정부는 오히려 강력한 차명계좌 금지가 세수확보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사안을 보고 있다.
그러나 올해만 해도 CJ그룹의 이재현 회장이 임직원 이름으로 636개의 차명계좌를 운영해 주가 조작으로 1182억원의 이익을 챙기고 36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드러나 사회에 충격을 줬다. 현재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심계좌 200여 개도 검찰에서 확보해 조사 중이다.
2010년 대출 부실로 본격적인 퇴출이 시작돼 금융권에 충격을 줬던 저축은행 역시 차명계좌 비리의 온상으로 지적된다. 2006년 이후 올해 2분기까지 차명계좌를 활용한 저축은행 비리로 금융감독원에 적발된 건수는 모두 2383건이었다. 비리 규모만 6조7546억에 달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금융실명제법은 오늘날 차명거래 촉진법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며 "'선의의 차명계좌'는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예외를 허용하는 방법을 통해 법기술적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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