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진출 업체, “베트콩 공격속에 총 들고 외화 벌이”

  • 베트남전 파병 50년, ‘피와 바꾼 한국 경제성장’(중)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K-레이션’ 한국 가공식품 산업 발전 토대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은 현장에서 배급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전투식량을 휴대한다. 베트남에 파병된 우리 국군들은 파월 초기 2년여 동안은 미군의 전투 식량인 ‘C-레이션’을 먹어야 했다. 문제는 미국인의 기호에 맞춘 C-레이션이 우리 군인의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는 것이다. 대규모 작전을 수행할 때에는 한 달 동안 카스텔라, 스테이크, 과일 주스 등이 들어 있는 C-레이션만 먹어야 했다.

우리 정부 차원에서도 장병들에 대한 먹거리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정부는 한국군에게 미국이 공급하는 전투식량(C-레이션)을 한국이 맡는 방안을 궁리한 끝에 김치, 고추장 등 전통음식을 레이션으로 만들어 보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전투부대 파견에 이어 1965년 7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에 설치된 ‘대월남 수출진흥본부’의 건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품목이라면 한국이 독점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안이 보기 좋게 적중했다. 1967년 중반 한국군은 미군 측에 김치를 먹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건의했고,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다.이 레이션은 한국군의 전투식량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깡통표면에 ‘C’ 대신 ‘K’자를 넣어 ‘K-레이션’으로 불렸다. 통조림을 만들기 위해 정부출자로 한국종합식품주식회사가 설립됐다.
덕분에 한국군은 양배추, 김치, 멸치조림, 콩자반, 오징어 젓갈 등의 국산 통조림을 먹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기술수준은 통조림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현지에 도착한 김치는 쉴 데로 쉰데다 김치찌개처럼 물러 터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장병들은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상한 김치를 묵묵히 먹었다. 납품 담당 미군 고문관이 통조림의 변질 사실을 알면 납품 자체를 취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문관들에게 에게 부식 통조림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상한 김치를 먹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다면 이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장병들의 공감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초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K-레이션은 장병들에게 대인기였고 일부는 베트남 현지인들에게 공급되기도 했다. 미국의 까다로운 품질기준을 맞추다 보니 통조림을 만드는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향상됐고 이 경험은 후일 국내업체가 가공식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기반이 됐다.

◆군납·용역으로 진출 분야 확대
베트남 특수는 군납과 용역으로 진출분야가 넓어지면서 본격화 된다.

첫 군납사례는 국제입찰에 의한 정글화 납품이었다. 1965년에 실시된 베트남 정부의 정글화 입찰에서 국내업체인 동신화학이 낙찰 받아 1차로 27만켤레, 44만달러 어치를 납품했다. 참전 3년 전인 1962년에 우리나라의 대 베트남 수출총액이 83만달러 였음을 감안하면 정글화 군납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군납은 납품 자체의 성과 외에 납품과정에서 철저한 완제품 검사를 받게 된다.

당연히 품질과 공정관리기법이 발전하게 되고 이런 경험과 기술축적은 후일 레바논을 비롯한 중동지역과 에티오피아 등 세계를 무대로 군복과 담요 등을 수출하는데 귀중한 경험으로 활용된다.

수출상품으로는 지붕용 함석판이 대종을 이뤘고 우뭇가사리를 가공한 한천 등도 일부 수출됐다. 특히 난민구제용 주택건설에 쓰인 함석판은 베트남전 기간 동안 단일품목으로 1600만달러 어치가 수출됐다. 한국군에 대한 군수품공급과 일반수출 등에 힘입어 대 베트남 수출은 참전 전인 1964년의 631만4000달러에서 참전 첫해인 1965년에 1478만2000달러로 한해 만에 2배 이상으로 늘었고 1966년에도 1384만6000달러에 달했다.

◆한진-빙그레 등 재계 주요기업 베트남서 기반 잡아
한편, 현재 재계의 주류를 이루는 많은 기업들은 베트남 특수에 참여해 창업의 밑천을 잡거나 기반을 다져 오늘날 부의 터전을 닦았다.

한진그룹은 육상운송으로 그룹의 발판을 마련했고, 빙그레의 전신인 대일유업은 트럭 위에서 미군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돈을 벌었다.

한진은 베트남 꾸이년항에서 군수 물자를 하역해 수십 마일에서 200마일까지 떨어진 거리에 주둔한 한국 맹호 사단과 2개의 미군 사단에 군수 물자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수송 트럭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목숨을 건 사업이었지만 위험부담이 큰 만큼 수익성도 좋았다.

당시 꾸이년항에는 군수 물자를 가득 싣고 하역을 기다리는 배가 30여 척씩 대기하고 있었다. 하역 시설이 그만큼 빈약했다.

군수 물자는 부지런한 한진상사 직원들의 손에 의해 신속하게 전선의 각 부대로 전달됐다. 한진상사가 첫 임무로 맡은 1470t의 군수품을 운반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2시간. 미군들은 “예전 같으면 1주일은 족히 걸렸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깔끔한 일 처리 역시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선박 접안 시설이 부족해 늘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꾸이년항은 말끔하게 정리됐고, 군수품을 실은 선박이 외항에서 하약을 기다리는 일도 없어졌다.

한진그룹이 1966년 3월 10일 주월 미군 사령부와 처음 맺은 계약 규모는 790만 달러. 이듬해 5월 성사된 2차 계약은 3400만 달러에 달했다. 한진그룹이 1971년까지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하는 총 1억5000만 달러에 이른다. 깔끔한 일 처리로 한진상사는 미군으로부터 최고 대우를 받았고, 한진상사 때문에 미국 업체들조차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꾸이년항을 넘보지 못했다.

아이스크림 기계를 트럭에 싣고 미군부대 앞에서 제품을 만들어 팔던 대일유업은 국군이 철수한 후 기계를 국내로 들여와 빙과 메이커로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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