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상컬럼]최태원 회장의 'AI 지휘봉'과 아르고호

  • - AI 항해를 감당할 기업가정신의 조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르고호(Argo)는 당대 최고의 영웅들이 모여 탄 배였다. 헤라클레스의 힘, 오르페우스의 음악, 각자의 능력은 모두 뛰어났다. 그러나 이 배가 끝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를 젓는 영웅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하늘의 별을 읽고 항로를 정하는 사람, 즉 방향을 아는 항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술과 재능은 충분했지만, 그것을 어디로 이끌 것인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지금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산업을 둘러싼 경쟁 구도도 이와 닮아 있다. 메모리(HBM), 패키징, 전력, 데이터센터, 소프트웨어까지 개별 기술의 수준은 이미 세계 정상급에 가깝다. 문제는 어느 하나가 아니라, 이 자원들이 어떤 순서와 방향으로 결합돼야 하는가다. AI 경쟁은 기술의 총량이 아니라 항로를 읽는 능력에서 갈린다.

이런 맥락에서 SK하이닉스가 AI 투자를 전담할 자회사를 설립하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글로벌 빅테크와의 접촉면을 넓히는 행보는 의미심장하다. 흩어진 기술과 투자를 하나의 항로로 묶어, AI 시대의 목적지를 분명히 하겠다는 시도로 읽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오른쪽 사진최태원 링크드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오른쪽). [사진=최태원 링크드인]
기술은 도구일 뿐, 지휘는 사람의 몫

시장은 냉혹하다.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어도 지휘자가 박자를 놓치면 교향곡은 소음이 된다. SK의 이번 결정은 AI 경쟁의 본질이 ‘개별 기술의 우위’에서 ‘전략적 지휘’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을 선점한 SK하이닉스의 성과는 엔지니어들의 공이지만, 그것을 AI 시스템의 병목을 푸는 해법으로 규정하고 투자를 결단한 것은 경영의 영역이었다. 이제 AI는 반도체를 넘어 소프트웨어, 전력, 인프라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시스템 산업이 됐다. “기술은 도구지만, 방향은 사람이 정한다”는 명제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이 점에서 최태원 회장은 국내 대기업 총수 가운데 AI 논의를 가장 이른 시기부터, 그리고 가장 전면적으로 끌어올린 기업인에 속한다. AI를 단순한 신사업이나 유행어로 소비하기보다, 반도체·전력·인프라·글로벌 기술 질서가 동시에 재편되는 구조적 변화로 인식해 왔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직접 글로벌 빅테크와 접촉하며 판을 읽어왔다. AI 분야에서 ‘앞장선다’는 평가는, 적어도 관망자의 태도는 아니라는 점에서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컨트롤타워’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저절로 항로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 기업사에는 옥상옥(屋上屋) 조직을 만들어 놓고 책임만 회피했던 수많은 ‘식물 컨트롤타워’의 기억이 남아 있다.
 

CEO의 이해력이 곧 리스크 관리
그래픽노트북LM
[그래픽=노트북LM]

결국 관건은 지휘봉을 든 사람의 ‘이해력’이다. AI 시대의 CEO에게 필요한 덕목은 코딩 기술이 아니다. 엔지니어가 “기술적으로 어렵다”고 보고했을 때, 그것이 예산 부족 때문인지, 물리적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전략적 방향 설정의 오류인지를 구분해낼 수 있는 해상도 높은 시야다.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휘자는 유행어만 되뇌이다 조직을 엉뚱한 절벽으로 몰고 간다. 반면 기술의 맥락을 꿰뚫는 리더는 엔지니어의 ‘안 된다’는 답변 속에서 새로운 기회의 지도를 그려낸다. 최 회장이 HBM을 단순한 메모리가 아니라 AI 아키텍처의 일부로 이해했듯, 앞으로의 투자 성과 역시 그 이해의 깊이에 비례할 것이다.

시장은 결과로만 대답한다

경제학자 요제프 슘페터는 기업가를 ‘새로운 결합(New Combination)’을 수행하는 존재로 정의했다. 흩어진 자원을 묶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기업가정신이라는 뜻이다.

SK의 새로운 투자 자회사가 단순한 옥상옥으로 남을지, 아니면 영웅들의 역량을 하나의 항로로 엮어 목적지에 도달하게 할 전략 플랫폼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원칙은 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지휘자가 별자리를 잘못 읽은 대가는 고스란히 기업과 주주가 치러야 한다.

최 회장의 미국 출장 가방 속에는 기술 제휴 계약서보다 더 무거운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 항로의 전체를 보고, 그 위험과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각오다. 시장은 화려한 지휘 동작이 아니라, 그 끝에 도달한 목적지로만 기업을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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