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언은 국내 1위에 머물러 있던 삼성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도화선이 됐다. 아울러 삼성의 도약은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으로 이어졌다.
제2의 창업 당시 이건희는 47세에 불과했다. 상대적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그는 1987년 12월 신임회장에 취임한지 3개월 여만에 그룹 경영에 일대 혁신을 예고했다.
제2의 창업을 통해 삼성은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연관성 있는 사업을 하나로 묶어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한 것. 이를 계기로 삼성의 가전·반도체·휴대폰 계열사들이 삼성전자 지붕 아래 하나로 묶였다. 특히 삼성반도체는 제2의 창업 선언 이후 그동안의 극심한 적자행진을 멈추고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또한 이는 현재 삼성전자의 조직체계의 모태가 됐다. 반도체·LCD·휴대폰·TV·가전에 이르기 까지 각 사업부 별로 상호교류와 협력을 통해 경쟁력을 키웠다. 계열사 별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조직이 유기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 이를 통해 2010년 현재 삼성전자는 전 부문에 걸쳐 세계 1위 그룹에 속한 유일한 종합전자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이는 현재 삼성전자의 조직체계의 모태가 됐다. 반도체·LCD·휴대폰·TV·가전에 이르기 까지 각 사업부 별로 상호교류와 협력을 통해 경쟁력을 키웠다. 계열사 별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조직이 유기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 이를 통해 2010년 현재 삼성전자는 전 부문에 걸쳐 세계 1위 그룹에 속한 유일한 종합전자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업 진출 역시 천명했다. 우주산업과 유전공학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 청년 회장인 이건희는 1세대 삼성이 이뤄놓은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새로운, 그리고 유망한 미래산업에 대한 관심과 도전은 이건희 자신이 노년이 된 지금까지 삼성의 경영 문화로 정착했다.
회장 자리에 오르자마자 이건희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것은 10년 동안 경영수업을 받으면서 파악한 그룹의 부족한 모습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선친인 이병철 회장 아래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룹의 수장이 되자마자 본격적인 행보에 나선 것.
이는 이건희의 핵심 측근이었던 손병두 전 전경련 부회장의 회고에서도 나타난다. 손병두는 삼성 내에서 이건희의 위상이 흔들리던 1980년대 초반 사표 제출 압박을 받고 결국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이건희는 손병두의 가족 생계를 책임졌지만 그 이상의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당시 이건희는 손병두에게 “당신도 고생했지만 나도 고생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이 참았다”며 선대 회장 당시 경영 전반에서 한발 물러서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했음을 시사했다.
삼성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비교하면 이병철과 이건희의 경영 스타일은 비슷한 부분보다 상이한 부분이 더 많다. 선친인 이병철이 카리스마를 앞세워 한국 경제와 사회의 이슈를 끌어왔다면 이건희는 대체로 말을 아끼고 은둔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런 그를 두고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은둔자적 황제’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다만 이건희는 결정적인 순간 몇마디의 화두를 던지는 과감성을 함께 보였다. 필요하다면 장시간의 릴레이 회의와 호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그를 두고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은둔자적 황제’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다만 이건희는 결정적인 순간 몇마디의 화두를 던지는 과감성을 함께 보였다. 필요하다면 장시간의 릴레이 회의와 호통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병철은 그룹의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직접 챙기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왔다. 당시 태평로에 위치한 삼성 본관 외벽의 소재부터 시작해 신라호텔의 문고리 결정까지 이병철의 결제를 받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상명하달’ 식의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수십년 동안 지속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미 10만명 이상의 거대 조직으로 성장한 삼성의 의사소통 체계에도 과부하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완벽주의자인 이병철의 스타일에 맞추다 보니 실질적인 부분보다는 수치.형식적인 부분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이건희는 효율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대 개혁을 추진한 것도 이러한 경영 스타일 때문이었다. 이건희는 각 부문별로 전문경영인을 키워내는데 주력했다. 이병철 당시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권 직책을 맡은 인사들이 비서실에 치우쳐 있었다. 반면 이건희 체제에서는 각 계열사 사업부 수장들의 의사결정 범위를 더욱 넓혔다.
최근 삼성 내에서 ‘테크노 CEO’라 불리는 공대 출신 경영자들의 비중이 늘고 있는 것도 이건희의 인사방침의 영향을 받은 것.
최근 삼성 내에서 ‘테크노 CEO’라 불리는 공대 출신 경영자들의 비중이 늘고 있는 것도 이건희의 인사방침의 영향을 받은 것.
제2의 창업과 이후 이어지는 개혁작업을 통해 이건희는 국내 1위에 머물러 있던 삼성을 글로벌 일류로 성장시켰다. 실제로 이병철 체제 당시 삼성은 ‘글로벌 플레이어’의 격(格)을 갖추지 못했다. 그룹의 간판인 전자산업도 국내에서만 1위에 머물렀을 뿐 해외에서는 여전히 3류 브랜드를 벗어나지 못했다.
국내에서도 현대, 대우 등과 함께 3강체제를 구축했지만 현재 삼성의 독보적인 위상을 갖추지 못했다. 1988년 당시의 삼성의 모습 그대로였다면 지난 2월12일 이병철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토록 많은 국내외 정재계 인사들이 기념 추모식에 참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을 불러모은 힘은 이병철의 창업 뿐 아니라 이건희의 성공적인 수성(守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희 체제의 삼성은 ‘수성’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삼성의 대표 주자격인 반도체 산업의 태동도 이건희로부터 시작됐다. 1974년 삼성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산업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는 이건희 개인의 사재를 털었기에 가능했다. 이병철과 삼성 비서실은 반도체 산업은 위험이 크다는 판단 때문에 당시 사업 진출을 꺼렸다. 그리고 반도체 산업을 흑자로 전환시킨 것도 이건희의 삼성 당시부터 가능했다.
이밖에 휴대폰과 TV, LCD, 중공업, 건설 등에 이르기 까지 삼성이 월드 베스트 반열 등극은 모두 이건희 시대 이후에 이뤄졌다. 기존 사업을 유지하기도 어려운 경영 환경 속에서 오히려 글로벌 프론티어로 성장하는 첫발을 내딛은 것이 바로 1988년 제2의 창업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병철을 ‘지지 않는 경영인’이라고 부른다.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작은 부분 하나하나 검토하고 준비하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이병철 시대의 삼성은 실패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사업 진출 시기가 늦춰지고 의사소통 과정이 길어지면서 효율성도 다소 떨어졌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상존한다.
반면 이건희의 삼성은 ‘크게 이기는’ 경영을 지속하고 있다. 자동차 사업 등 간혹 실패하는 사업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업에서 실패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일본 등 선진국을 따라가는 추격자에 머물러 있던 그룹 위상도 크게 변했다. 2010년 현재 삼성은 선진국들이 벤치마킹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시장 트랜드를 주도하고, 신기술을 소개하는 역할도 이제 삼성이 도맡고 있다.
이건희 체제 20여 년 동안 구세대의 체질을 개선한 삼성은 앞으로도 이러한 개척자의 길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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