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성장가도를 달리던 한국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주가는 폭락했다. 중소기업들은 줄도산했다. 평생 직장이라 생각하고 십수년을 충성했던 이 땅의 가장들은 순식간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 통화 기금)는 한국에서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만큼 국내의 모든 경제 질서를 뒤흔들었다.
1996년 글로벌 제조기업 76위였던 초대기업 삼성도 IMF의 파고에 자유롭지 못했다. 순위는 1년새 138위로 폭락했다.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졌다. 그해 11월 21일 삼성은 발 빠른 대처에 나섰다.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구조조정위원회'를 발족했다. 삼성의 구조조정은 눈 깜짝할 사이 진행됐다. 위원회 설립 5일 만인 26일 구조조정위원회는 △조직의 30% 감축 △총비용 50% 절감 △임직원급여 10% 삭감 △투자규모 30% 감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경영체질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1998년 시무식에서 "우리는 엔화 강세라는 호황의 착각 속에서 세계의 흐름을 외면해온 우물안 개구리였다"며 그 동안의 안일함을 자책했다. 대기업 삼성도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삼성은 뼈를 깎는 몸집 줄이기에 들어갔다. "실패는 없다"는 삼성의 자신감도 전 국가적인 재앙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알토란 같은 계열사들도 포기해야 했다. 삼성중공업은 건설기계 부분을 5억 달러라는 헐값에 볼보에 매각했다. 심혈을 기울였던 방위산업도 팔았다. 주요 대형마트인 홈플러스 경영권도 테스코에 넘겼다. 자동차 산업도 결국 2000년 르노에 매각했다. 이 밖에 수많은 사업들이 정리됐다. 65개에 달했던 계열사는 45개로 축소됐다. 성대하게 치를 예정이었던 1998년 그룹 창립 60주년 행사는 결국 취소됐다.
직원 수도 크게 줄었다. 계열사 매각과 구조조정을 통해 17만명을 육박했던 임직원 수는 11만명으로 크게 줄었다. 임직원들은 보너스는 커녕 기본급도 삭감당했다. 해외 연수에 나선 인력들도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IMF 여파로 삼성은 많은 것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삼성은 국내 기업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적은 타격을 입었다. 이는 이 전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은 수치 위주의 '양 경영'에 빠져있었다. 대부분의 사업이 승승장구 하는 동안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덩치를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반면 삼성은 수년 전 부터 이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1993년 이 전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질 경영'을 선언했다. 이 전 회장 역시 "우리는 지금 땅에서 10cm 정도 떠있다"며 '거품 경계론'을 누차 강조했다. 1995년 이후 성장 주도형 인재를 경영 이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관리형 인재를 대폭 기용한 것도 당시 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울러 삼성의 '버림의 미학'도 그룹의 생존과 위기 이후의 재도약을 가능케 했다.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 및 핵심 전자 계열사와 삼성생명을 제외한 모든 회사도 구조조정 대상"이라며 '선택과 집중'을 독려했다.
자동차 사업 포기는 이 전 회장의 이같은 의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 전 회장은 삼성의 자동차 사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대중에 알려진대로 이 전 회장은 자동차 애호가이자 스피드 광이다. 비자금 재판이 진행중인 지난해 5월에도 병환 중이었던 이 전 회장은 간호사까지 대동하고 경기도 용인 스피드 웨이에서 카레이싱을 즐겼다.
하지만 단순히 이 전 회장의 취미 때문에 삼성이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이 전 회장은 자동차는 '기계 산업'에서 '전자 산업'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현재 자동차 부품 가운데 40%는 전자 산업에서 생산된다. 갈수록 자동차 산업에서 전자 부문의 비중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급발진 문제도 '전자제어시스템'이 원인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자 부문에서 최고의 기술을 갖고있는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1998년 삼성의 첫 작품인 SM5는 생산 초기 부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삼성의 기술력이 결합된 SM5는 3년여가 지나서야 입소문을 통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섰다. 자동차 산업 진출 당시 이 전 회장의 판단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IMF 금융위기와 겹치면서 결국 삼성은 4조원을 투자한 자동차 사업마저 포기했다.
'실패하지 않는 삼성' 신화 역시 자동차 사업 포기와 함께 무너졌다. 하지만 삼성은 자동차 사업을 정리하는 대신 기존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제조업과 삼성생명 등의 금융업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전 회장은 "해서는 안되는 사업, 하지 않아도 되는 사업은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전자 산업 대부분에서 일류기업으로 성공한 종합전자 기업으로 부상했다. 삼성중공업 역시 건설기계 산업을 포기하는 대신 조선업에 집중함으로써 세계 조선업 1위에 올랐다.
이같은 삼성의 변신은 외신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미국 뉴스위크는 2003년 11월 "삼성은 금융위기를 넘긴 유일한 재벌"이라며 "한국 기업들의 모범이 됐다"고 극찬했다. 국내에서 삼성의 독주는 계속됐다. IMF 이후 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이 곧 한국 경제"라는 인식도 2000년 이후 자리잡았다.
이후 삼성은 재무구조 개선과 핵심 역량 집결로 IMF 이전 수준을 넘어서는 성장을 일궜다. 당시의 경험도 이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예방주사 역할을 했다. 이 전 회장은 기록을 중요시 여겼다. 자신의 지시사항도 모두 녹음하도록 할 정도였다. IMF 당시 삼성의 대처 역시 세세하게 기록됐다. 10년 후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적절하고 빠르게 대응해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을 수 있던 것도 당시의 경험과 이를 활용하는 문화이 있기에 가능했다.
아주경제= 특별취재팀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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