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 살구나무 아래서 흘러간 세월을 아련하게 읊조리는 노랫 가락이 무대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3ㆍ4조 운율에 맞춘 가사가 국악과 오케스트라 선율에 어우러진다.
창작 뮤지컬 '피맛골 연가'는 이처럼 우리 전통문화를 뮤지컬이라는 서양식 틀에 맞춰내는 데 성공한 듯하다.
'피맛골 연가'는 서울시와 세종문화회관이 서울을 상징하는 뮤지컬을 만들겠다며 제작비 18억원을 들여 야심차게 내놓은 토종 뮤지컬이다.
무엇보다 흡입력 있는 줄거리와 중독성 있는 노래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배삼식 작가는 금오신화 이생규장전을 모티브로 마치 전래 동화를 들려주는 것처럼 피맛골에 서린 사랑 이야기를 때로 장엄하게, 때로는 아기자기하게 펼쳐낸다.
조선 시대 서자 출신인 '김생'과 양반집 규수 '홍랑'이 신분 차이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헤어졌다가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살구나무 혼령 '행매'의 도움으로 300년 뒤 경성에서 짧게나마 재회한다는 게 대략적인 얼개.
장소영 작곡가는 해금, 피리, 태평소, 가야금을 가미한 30인조 대형 오케스트라를 진두지휘하며 관객에게 퓨전 국악의 진수를 선보인다.
특히 행매(양희경)가 구성지게 뽑아내는 '한 천년'과 김생(박은태)ㆍ홍랑(조정은)의 애절한 듀엣곡 '아침은 오지 않으리'는 시쳇말로 '귀에 꽂힌다'. 극장을 떠나는 관객들이 따라부를 만큼 중독성이 강한 노래가 등장한 것은 토종 뮤지컬로는 꽤 오랜만이다.
한국무용과 재즈댄스를 넘나드는 조연들의 군무도 무대를 압도한다. 김생과 홍랑의 재회를 돕는 상징 동물로 등장하는 '쥐떼' 40마리가 마이크를 거꾸로 쥐고 랩을 선보이거나 두편으로 나뉘어 힙합 대결을 펼칠 때는 객석 분위기도 달아오른다.
유희성 연출은 무대 연출에도 한국식 화법을 적용했다.
첫 장면에서는 1천600년대 조선의 피맛골을 표현한 오두막 골목이 회전 무대에 실려 커다란 원을 그리며 등장하고, 300년 뒤 경성의 피맛골은 무대 아래에서 위로 서서히 떠오른다.
조선 시대 유가 행렬 등 우리 고유의 세시 풍속도 다채롭게 재현된다.
그러나 극의 긴장감을 응축시켰다가 정점에서 터뜨리는 폭발력은 다소 약해보인다.
김생과 홍랑이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충분히 묘사되지 않은 데다가 2막을 시작할 때 쥐떼의 군무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극적인 재회 장면에서는 살짝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의도대로 외국인 관광객이 '피맛골 연가'를 보고 서울을 떠올리게 될지도 의문이다.
수백년 세월 피맛골에 서린 서민들의 삶을 담아내겠다는 게 제작 의도였지만 피맛골을 상징하는 공간적 장치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점이 아쉽다.
극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입체 영상을 이용해 대형 빌딩에 파묻혀 버린 피맛골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지만 재개발 정책 때문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피맛골의 정취를 그리워하는 향수를 달래기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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