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KDI 비화-1] “이승만 시절, 10달러 이상 사용은 대통령 재가 사항”

  •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개발5개년계획

(아주경제 이상준 기자) 한국개발연구원(KDI) 개원 40주년을 맞았다. 대한민국의 내일을 설계하는 KDI(원장 현오석)는 3월 10일 서울 홍릉 본원 대회의실에서 개원 4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 김황식 국무총리를 비롯해 김만제 초대 KDI 원장, 허태열 국회 정무위원장, 조순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 등 국내 경제학자들이 다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아주경제는 많은 축사와 치사 등이 나온 가운데 특히 큰 호응을 받은 김정렴 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의 기념연설을 4회에 나누어 싣는다.

(1회)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개발5개년계획

# 1961년 5.16군사혁명 직후, 혁명정부는 자유당 정부의 부흥부를 경제기획원으로 개편하고, 부흥부의 경제개발3개년계획을 참고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하 5개년계획)수립에 착수해 7개월 만인 1962년 1월 5일에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무실 옆방에 상황실을 마련하고, 비닐로 포장한 부문별 계획표를 회전식으로 설치해 수시로 직접 진도를 점검할 만큼 5개년계획을 중시했다.

또한 5개년계획 추진상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과학심의회의를 설치하고 평가 교수단을 구성·운영하기도 했다.

# 본인(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상공부차관으로 재직 중이던 1964년 6월, 5개년계획 상황판을 점검하던 박 대통령은 경비전화를 통해 상공부 소관 공장의 진도 부진을 여러 번 힐책했다.

이에 본인은 “자유당정부 부흥부의 경제개발 3개년계획은 집행계획이 아니라 Vision과 Forecast로 작성한 것으로 혁명정부는 여기에 각 부처의 개발계획을 받아 보완 집대성해 5개년계획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본인은 “이승만대통령 시절 10달러 이상의 외화사용은 대통령 재가 사항으로서 공무원의 해외공장 시찰은 전혀 없었고”라며 “상공부의 경우, 국·과에서 5개년계획에 한 개의 프로젝트라도 올리지 못하면 존폐가 우려된다고 생각하여 외국 엔지니어링 회사의 국내주재원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해 계상한 것인데, 기초가 되는 투임-산출(input-output) 산업연관 통계도 1963년에 들어서야 작성되기 시작한 바, 5개년계획안은 집행할 수 있는 계획이 아니라 Vision과 Forecast“라고 설명했다.

이후 상황실이 철폐되고, 평가 교수단의 임무도 5개년계획의 진행 평가가 아니라 인플레, 환율, 미곡 매상정책 등 현안을 연구 보고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차 5개년계획 기간 중 경제성장률이 계획차를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5개년계획이 잘 되어서라기보다는 1963년 1월부터 64년 8월까지 총 2500만 달러(1만 달러 이상 반입은 21건, 1100만 달러)에 달하는 재일동포의 재산도입, 즉 중고시설의 도입 설치로 의류, 봉제품, 가발, 전기제품의 생산과 수출 증대에 기인한 바가 컸다.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은 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한 후 주일대사를 사임한 80년까지 약 2년간의 공백을 빼고는 24년에 걸쳐 대한민국 중앙은행과 행정부에서 공직을 역임했다. 재무부, 상공부 장관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김정렴 前 대통령비서실장은 경제개발정책의 수립과 집행 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며 한국경제 발전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9년 3개월의 재임기간으로 역대 최장수 대통령비서실장의 기록을 세운 김정렴 前 비서실장은 주일대사직을 마지막으로 말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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