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기행 21 안후이성편> 5-1 조조, 과연 난세의 간웅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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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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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강경록 기자) 조조의 고향 보저우(亳州)는 안후이성에서 북서 방향의 평원에 위치해 있다. 취재진은 안후이성의 허페이(合肥)를 출발해 북서 방향으로 차를 타고 4시간 이상 평야를 달렸다. 가을걷이가 끝난 드넓은 평야에는 볏짚태우기가 한창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볏짚을 태우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안개가 짙어지는 대륙의 11월, 안개와 연기가 뒤섞여 하늘의 햇빛을 완전히 가릴 정도였다.

1800년 전, 이곳 농부들 또한 볏짚을 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식량이 전쟁에 있어 병사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평야가 많은 보저우는 전략적 요충지중의 요충지였을 것이다. 때문에 삼국시대 영웅들은 이곳 보저우를 포함한 안후이성을 차지하기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전투를 치뤘으리라.

회하(淮河)의 지류인 와하(渦河)가 박주 시내 중심부를 흐르고 있다

조조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조조는 과연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가 묘사하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옹졸한 간웅이었을까? 유비의 촉나라를 중심으로 쓰여진 삼국연의는 유비를 영웅으로 묘사한 반면, 그와 대립한 조조를 간웅(奸雄)으로 묘사했다. 조조폄하엔 다분히 촉한정통론에 얽매인 나관중의 주관이 강하게 베어 있다. 이렇듯 나관중에 의해 그려진 조조의 이미지는 약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간웅으로 각인시켰다. 지금도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해 굳어진 조조의 부정적 이미지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사 ‘삼국지'는 조조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위대한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 그리고 뛰어난 문장가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조조의 고향 보저우는 조조의 업적을 재평가해 이를 알리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취재진을 안내하던 여유국 직원 또한 조조에 대한 재평가 필요성에 대해 강하게 어필했다.

“조조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아요. 조조는 정치, 군사, 문학적인 측면에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겼어요. 나관중에 의해 소설화된 조조의 이미지로 인해 그가 저평가되고 있는 것은 분명 바로잡아야합니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역신(逆臣)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권모술수에 능한 악인으로 전락했지만, 최근에는 시대를 선도한 영웅이라는 재평가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안휘성 박주 도심의 모습. 도심 내 조조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역사적으로도 보저우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3,500년전 상나라 제 1대 왕인 성탕(成湯)이 도읍지로 정했던 곳이 바로 이곳 보저우다. 보저우는 명의 화타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 상점가에는 한약 재료상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중국 4대약도(四大藥都)다운 느낌을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회하(淮河-하남성 동백산에서 발원하여 안휘성, 강소성을 거쳐 황화로 흘러 들어가는 강)의 지류인 와하(渦河)가 시내의 중심부를 흐르고 있는데, 그 수량이 많아 장강(長江)이나 황하에 버금가는 위세다. 게다가 이곳은 옛부터 특산물이 많고 풍부한 토지여서, 한방(漢方)의 백작약 뿌리나 국화꽃 따위의 약재, 담배, 술 등이 유명하다. 백작약의 생산량은 중국 제일로, 꽃이 피는 시기에는 성밖 50리까지 아침 안개가 끼인 듯하다고 ‘보저우지’는 말한다. 또한 아주 널리 알려진 명주 ‘고정공주-古井貢酒’도 이곳에서 만든다고 한다.
화타의 고향답게 박주에는 다양한 한약재로 만들어진 음식들이 발달해 있다.

조조기념관은 보저우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해 있다. 조조기념관은 조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최근에서야 만들어졌다. 조조의 고향이자 주변에 조조의 행적이 남아있는 유적지가 특히 많기 때문이다. 조조기념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조조의 동상이 우둑커니 서 있다. 기념관 내부는 별 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조조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재조명되어 있었다.

조조의 업적 중 가장 높게 평가 받는 것은 바로 둔전제다. 둔전제는 전란으로 버려진 농토를 나라에서 모아 백성들에게 농사용으로 빌려주어 수확량의 6할을 징수하는 국영 소작제도였다. 이를 통해 부족했던 세수를 채우고 땅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던 백성들에게 땅을 내주어 농사를 짓게 했다. 이 외에도 조조는 인재 등용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세제를 개편하기도 했다.
허페이성 박보저우 시내에 위치한 조조기념관앞에 서 있는 조조의 동상

조조의 일생은 우리가 알고 있던 간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조조는 환관의 자손으로 그의 할아버지는 후한 시기에 십상시중 한명이었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환관이자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후 조조에게는 환관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후대까지 전해지게 됐다. 이는 조조의 가장 큰 콤플렉스였다. ‘삼국지연의’ 또한 젊은 시절의 조조나 이후의 조조를 평가할 때 이를 종종 이용했다.

우리 '걸어서 삼국지 기행' 취재팀의 안내를 맡은 보저우 여유국의 직원은 "어린시절 조조는 매우 총명하고 기지가 뛰어났다"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

“어린 시절 조조의 이름은 길리(吉利), 또 다른 이름은 아만(阿瞞)이었어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매우 총명했지요. 소년 시절 매 날리기와 사냥과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조조에게 숙부가 종종 조조의 아버지 조숭에게 충고를 하곤 했다고 해요. 이에 화가난 조조는 숙부를 놀리기로 작정했었죠. 어느날 조조는 숙부를 만나자 입이 마비된 듯한 시늉을 냈어요. 이를 보고 깜짝놀란 숙부는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에게 급히 알렸어요. 조조의 상태에 깜짝놀란 조숭이 뛰쳐왔지만 조조는 아픈 기색없이 태연하게 책상에서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이에 조숭은 더이상 숙부의 말을 신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조가 진정한 영웅이었는지, 간사한 간웅이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아무렇든 그는 천고의 역사에 길이 남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여기 보저우에 이를 말해주는 일단의 행적들이 남아있다. 보저우를 찾아 조조의 숨결을 느끼고 잠시나마 삼국시대의 영웅들을 떠올릴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가슴벅찬 일이었다.
조조기념관에 보관된 조조의 인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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