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베이징 특파원 조용성 기자 = 2004년 3월 한국타이어 중국 자싱(嘉興)공장은 시진핑(習近平) 당시 저장(浙江)성 서기(현재 국가부주석)가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돌연 분주해졌다. 당시 자싱공장의 기술팀장이던 장맹근 한국타이어 충칭(重慶)공장장 역시 시 부주석과의 만남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해 3월24일 한국타이어 자싱공장을 찾은 시 부주석은 공장의 최첨단 설비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공정을 상당히 면밀하게 관찰하던 시 부주석은 많은 질문을 했고 장 공장장 역시 몇차례의 대답을 해야 했다. 장 공장장은 “시 부주석은 생소한 전문용어가 나오면 이해될때까지 여러 차례 질문을 반복하는 등 상당히 진지한 자세로 공장관계자들의 발언을 경청했고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높은 이해력과 기억력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면서 “마지막에는 도와줄 것이 없겠냐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는 저장성이 외자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때였고, 한국타이어의 공장은 상당히 모범적인 외자기업이었다. 장 공장장은 “시 부주석은 저장성의 외자기업이나 민자기업을 상당히 중시했으며 그의 저장성 서기 재임시절 상당수의 외자기업이 저장성에 둥지를 틀었다”고 말했다.
당시 시진핑 부주석의 겸손하면서도 진지한 태도에 그의 정치적 미래가 밝을 것임을 짐작했다는 장 공장장이 중국땅에 발을 내딛은 것은 2001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미 1992년부터 5년동안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지점에서 마케팅 엔지니어로 일해본 해외경력이 있었다. 해외근무는 그에게 많은 책임감과 함께 창의력을 부여했고 그는 이후에도 해외생활을 동경하게 됐다.
그리고 1996년 중국시장에 진출한 한국타이어는 1998년 장쑤(江蘇)공장과 자싱공장을 준공했다. 그는 그동안 중국 주재원의 문을 지속적으로 두드렸고 2001년 12월 중국으로 발령을 받게 됐다. 그는 “당시 중국 자싱공장 주변에는 고속도로도 완비되지 못했으며 도로에는 자동차가 별로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농촌이었다”며 “우리나라의 1960년대를 연상시켰다”고 회상했다.
이어 장 공장장은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당시 자싱은 1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빠른 발전을 이어갔다”면서 “그 같은 발전상에 가끔씩은 전율마저 느꼈었다”고 소개했다.
그가 중국에 부임받아오던 2001년 한국타이어 중국공장의 생산규모는 연산 632만본이었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생산규모는 2594만본으로 대폭 성장했다. 중국사업 규모가 빠른 성장세를 보여온 만큼 중국전문인력에 대한 수요도 그만큼 늘어났다. 한국타이어의 대표적인 중국통인 장 공장장이었기에 그의 임기는 계속 연장됐고 올해로 12년째를 맞게 됐다.
그는 2008년 한국타이어가 관리자에게 수여하는 ‘프로액티브 어워드’를 해외주재원으로서는 최초로 받았으며 이듬해인 2009년 장쑤공장장으로 승진했다. 장쑤공장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의 고향인 화이안(淮安)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한국타이어는 제3공장 건설을 추진했고 최종입지로 충칭과 우한(武漢)을 두고 고민하다가충칭으로 공장부지를 결정했다. 중국의 생산기지에서 생산팀장, 설비팀장 등을 해 본 경력이 높이 평가돼 충칭공장장으로 장 공장장이 낙점됐다. 그리고 그는 2010년 12월 충칭공장장장 자격으로 충칭에 부임하게 된다.
그는 “13년째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아직도 중국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며 “그동안 가보았던 중국, 만나봤던 중국인은 중국의 광대한 본모습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일 뿐, 더 많은 노력과 경험으로 진정한 중국통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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