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저우관제묘 춘추루 전경 |
산시(山西)성은 『삼국지연의』 저자 나관중(羅貫中)과 그의 소설 속에서 ‘만고의 충신’, ‘충절의 사표’, ‘난세의 영웅’으로 그려진 관우의 고향이 있는 곳이다. 관우의 영혼이 깃든 윈청(運城) 셰저우(解州) 관제묘와 생가인 창핑(常平)의 관제묘, 그리고 관우를 우상으로 재탄생 시킨 나관중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9척 키에 긴 수염, 봉황의 눈, 누에 모양을 한 눈썹, 익은 홍시 같은 홍안(紅顔). 번쩍거리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1장8척의 적토마를 탄 사나이.”
나관중이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관우의 모습이다. 천민 출신의 ‘살인자’였던 관우는 주군이자 의형제인 유비를 만나 ‘명장’으로 다시 태어났고 오늘날까지 충절의 표상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삼국지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캐릭터 가운데 초인적인 충의와 절개, 누구보다 용맹스럽고 무예가 빼어난 인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관우. 관우는 중국 역대 왕들의 통치 이념에 부합하는 이미지로 사후 관왕(關王), 또는 관제(關帝)로 추앙을 받았다. 때문에 중국 전역에 관우를 기리는 묘와 사당이 설립됐고, 그를 기리는 후대 사람들의 마음이 보태져 관우는 오늘날 재물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김포공항을 출발해 중국 베이징(北京) 서우두(首都)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1시간 남짓 더 날아가 산시(山西)성 타이위안(太原)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대기실을 빠져나가자 후텁지근한 날씨에 석탄 냄새 같은 매캐한 공기가 코끝에 와 닿았다.
고대부터 산시성이 석탄 주산지였음을 감안할 때 그것은 아마 1800여 년 전의 냄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산시성 도처에 산재한 석탄광과 석탄 길을 따라 삼국지의 영웅 관우와 나관중의 이야기를 만나러 나섰다.
◆ 관우의 영혼을 만나다
타이위안시의 출근길 교통 상황은 서울 못지않게 붐비고 복잡하다고 했다. 우리는 러시아워를 피해 이른 아침부터 발길을 재촉 일차 목적지인 관제묘로 향했다. 관우의 고향으로 확인된 윈청(運城)시는 산시성의 중심인 타이위안에서도 약 300㎞나 떨어진 곳에 있다.
때 이른 가을 빗길을 가로질러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5시간 가까이 내달리니 ‘셰저우(解州) 관제묘’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정표를 보고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섰다. 좌우로 붉은 대문이 즐비한 길을 지나다 보니 붉은 색 피부와 무섭지만 영웅적 풍모를 한 관우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여기서부터 비로 질퍽해진 비포장 흙길을 따라 다시 30여분 달려가자 관제묘(關帝廟)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우의 수급은 허난(河南)성의 뤄양(洛陽), 몸은 후베이(湖北)성 당양(當陽)에 안장되어 있고, 이곳에는 관우의 얼이 숨 쉬고 있습니다. 관우 묘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클 뿐만 아니라 보존 상태도 가장 좋죠.”
입구에서 우리에게 셰저우 관제묘를 소개하는 안내원의 목소리에 자부심 때문인지 힘이 실려 있었다. 이곳 관제묘는 수 왕조 시기 처음 지어진 뒤 송, 명, 청 대까지 이어지며 확장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내원은 셰저우 관제묘가 크게 볼 때 전전(前殿)과 후궁(後宮)으로 구분되는 등 그 구조가 중국 왕조의 궁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관제묘 안에 들어가니 제일 먼저 결의원(結義園)이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결의원 안쪽에 자리 잡은 결의정(結義亭)에는 1980년대의 유명한 시인인 왕궈전(王國眞)이 썼다는 금테두리가 화려한 현판이 걸려있었다.
결의정 내부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형제의 뜻을 맺던 순간을 그린 ‘결의도(結義圖)’를 새겨 넣은 석비가 자리 잡고 있다. 세월이 흐른 탓에 다소 흐릿한 모습이었지만 도원결의를 둘러싼 역사적 진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복사꽃잎이 흩날리는 복숭아 나무 아래 결연한 표정의 세 영웅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400년 전 청나라 때 지어졌다는 단문(端門) 앞에는 우리나라의 하마비(下馬碑)와 비슷한 것이 세워져 있었다. 1m 남짓한 철 기둥 세 개를 교차해 놓은 당중(擋衆)이란 것인데, 여기서부터 문무관은 각각 가마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관우가 황제 반열에 올랐으니 그에 걸맞은 예를 갖추라는 뜻이다.
단문과 당중 사이는 4마리의 용이 새겨진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안내원은 “외부에서 들여다볼 수 없도록 중국 궁궐 입구에는 이러한 벽이 세워진다”라고 귀띔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벽에 새겨진 4마리의 용이 그려졌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황궁(皇宮)에는 ‘구룡(九龍)’을 그려 넣어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고 한다. 관우가 관제(關帝)로 추앙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비석에는 구룡이 아닌 사룡만이 그려진 이유가 자못 궁금해졌다. 정통 황제가 아니고 후대에 의해 추존된 황제였기 때문이리라.
단문과 치문(雉門), 오문(午門), 어서루(御書樓)를 거쳐 관제가 집무를 보는 곳이라는 숭녕전(崇寧殿)에 다다랐다. 숭녕전 앞에는 관우가 생전 청룡언월도를 갈았다고 하는 마도석(磨刀石)이 있었다.
‘큰 사람’이 썼던 물건답게 육중해 보이는 마도석 가운데에 날카로운 칼자국이 눈에 띄었다. “관우가 칼을 갈고 잘 드는지 시험해 볼 때 남은 흔적”이라고 안내원은 소개했다.
금세라도 관우가 나타나 번쩍거리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떠나갈 듯 호탕한 웃음소리를 낼 것 같았다.
숭녕전 내부에서 문턱을 넘어 첫발을 딛게 되는 곳 즈음에는 ‘관우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람의 발 모양이라고는 믿기 힘든 거대한 흔적이었다.
“왼발 같은데. 오른쪽 발자국은 어디에 있어요?”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안내원은 “오른발은 저 앞에 보이는 중조산(中條山) 근처에 가면 있어요.”라며 100m도 넘은 앞쪽의 산을 가리키며 답했다.
“이곳 관제묘 최고의 볼거리는 후궁에 해당하는 춘추루(春秋樓)입니다” 관우의 발자국에 정신이 팔려있던 취재진을 재촉하며 안내원은 춘추루로 향했다. 숭녕전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춘추루를 중심으로 한 관제묘의 ‘후궁’(後宮)’이 나온다.
‘기숙천추(氣肅千秋,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인 관우)’ 네 글자가 새겨진 목패(木牌)방 문턱에 서니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고목(古木)사이로 춘추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패방을 들어서면 ‘도루(刀樓)’와 ‘인루(印樓)’가 좌우에 나란히 서 있는데, 이곳은 관우가 아꼈다는 ‘청룡언월도’와 권력의 상징인 도장을 보관하는 곳이다.
산시성 윈청셰저우관제묘 사룡벽 |
춘추루는 전국의 많은 관제묘 중 이곳 셰저우 관제묘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물로, 관우의 침궁(寢宮)에 해당하는 곳이다. 전장에서도 공자의 사서(史書) 중 하나인 춘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관우의 문관적인 성품을 기리 위해 마련한 공간으로, 춘추루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춘추루 앞에는 두 그루의 고목나무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뿌리는 용의 입, 나무 기둥은 용의 몸, 가지들은 용의 꼬리를 닮았어요. 누가 특별히 다듬은 적도 없죠. 모두 관제묘에 감도는 영험한 기운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한 걸음 멀리서 바라본 춘추루는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로 기둥 끝을 건물 바깥쪽으로 빼고 천장과 건물 벽 사이에 기둥을 가로로 엇갈리게 놓으면서 착시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관제묘뿐만 아니라 이러한 구조는 중국에서 유일무이하다고 한다.
명대에 처음 지어진 춘추루는 셰저우 관제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1층의 굳게 닫힌 나무 문 사이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관우상이 보였다. 이곳의 벽면은 관우가 생전 애독했다던 춘추 전문이 새겨져 있었다. 컴컴한 벽면을 향해 손을 뻗어 더듬으니 손끝으로 음각의 글자가 전해져 왔다. 복과 재물을 가져다준다는 관우를 생각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넣었을 후대의 정성이 함께 느껴졌다.
2층에서 춘추를 읽고 있다는 관우를 만나기 위해 오른쪽에 마련된 계단을 올랐다. 36개의 지방정부를 상징한다는 계단을 딛고 올라가니 손에 춘추를 들고 침대에 걸터앉은 관우상이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매, 호탕한 표정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마치 자신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취재진을 반기며 막 일어설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안내원은 “다른 관제묘의 관우상은 키나 외모가 과장되어 있다”라며 “춘추루의 관우상이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깝다”라고 자랑했다.
가늘게 흩날리는 빗방울과 짙은 안개에 가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춘추루. 취재진은 그곳에서 충의와 절개의 화신으로서 많은 이의 가슴에 살아 숨 쉬는 삼국 또 다른 ‘황제’ 관우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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