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못하겠습니다.” 1960년대 후반 조선소 건설을 위한 투자금을 얻으러 일본과 미국을 돌아다녔으나 실패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청와대를 방문해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은 “내 앞에서 절대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이 일은 나라를 위해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오”라며 아산에게 무조건 해내라고 호통을 쳤다. 아산은 죽기살기로 조선소 건설에 매달렸고, 허허벌판 울산조선소 사진 1장과 바지 속에 있던 500원짜리 지폐로 버클레이은행을 설득해 차관을 얻는데 성공했다.
국가 최고 권력자와 대기업 오너의 관계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긴장관계’가 유지돼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과 호암 박근혜 대통령은 대기업과의 ‘소통’ 방법은 현재까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불가능’을 이야기했다가는 언제 목숨이 사라질지 알 수 없는 군사쿠데타 직후의 긴장된 상황. 절대 권력자였던 박 대통령은 그러나 기업인들이 목숨을 걸고 ‘내뱉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책으로 지원했다. “혁명은 군인이 했지만 경제인은 경제인이 부흥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65년부터 정례화 된 ‘수출진흥확대회의’는 기업 지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결되는 장소였다. 회의가 힘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은 박 대통령이 직접·간접적으로 기업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대기업 회장은 물론 한창 커나가고 있던 중소기업인들과도 ‘소통’을 시도했다. 호암과 아산은 물론 심지어 중소기업인들도 박 대통령 앞에서는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독재 시대에 경제는 가장 자유로웠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2013년 박 대통령의 장녀인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기업인들을 만나고 있다. 지난 1일 청와대에서 개최한 ‘무역투자회의’에도 기업인들이 참석했고, 국무총리와 산업통상자원부 장차관 등 국무위원들도 기업인들과의 접촉을 늘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나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만나 의견을 전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아니 대기업 회장들과의 만남 소식 자체를 접할 수 없다. 중소·중견기업에게만 치우쳐진 만남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다 보니 새 정부가 추진중인 대기업 관련 정책은 일방통행적이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 모두 박근혜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면서 “‘대기업=재벌’이라는 등식이 각인된 현재로서는 그저 상명하달식 지시에 불과하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박근혜 대통령만의 문제로 치부해선 안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현재 재계 얼굴 마담은 호암과 아산의 자녀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등 창업주의 2세, 3세들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이들 가운데 누구도 나서서 면담을 청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힘을 보태지 않으니 재계 대표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의 의견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겠느냐”, “괜히 나서봤자 찍히기 밖에 더하겠느냐”는 핑계로 경제사회적 측면에서의 리더로서의 역할에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뭐든지 만나서 해결하고자 한 아버지 시절과 서로가 눈치만 보고 있는 자식 세대간의 차이로 인해 양측간 소통은 답답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달 초 예정된 미국 방문 때 사상 최대 규모의 경제사절단을 수행한다. 이건희 회장 등 주요 대기업 오너들이 함께 참가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번이 집권 후 첫 만남이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과 첫 상견례를 가질 예정이다.
이 자리에서 대화의 물꼬가 터져야 한다. 문제는 아산처럼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용기있는 기업인이 나올 것인지,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귀를 기울일 수 있겠냐는 기대감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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