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8시에 아들의 축구 시합이 있어 일찌감치 일어나 준비물을 챙겨 운동장에 데리고 가서는 1시간 동안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그나마 축구는 낫다. 야구하는 아들을 둔 김 씨의 친구 이 모 씨는 언제 끝날지 모를 경기를 지켜 보노라면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난다.
아들의 축구시합이 끝나면 이번에는 딸 아이를 데리고 첼로 레슨을 간다. 맞벌이 부부인 김 씨의 아내는 주중에 하지 못했던 빨래와 집 청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아빠가 맡기로 한 것이다.
레슨이 끝나 집으로 돌아온 김 씨는 잠시 낮잠이라도 자고 싶어 자리에 누워 보지만 장을 보러 가야 한다는 아내의 말에 벌떡 일어나고 만다. 오후에는 아이들 과외 때문에 학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
주말만 이렇게 바쁜 게 아니다. 아들 축구연습 때문에 1주일에 두번씩 퇴근하자마자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서둘러 나가야 한다. 지역 오케스트라 연습이 있는 날은 늦지 않게 데리고 가야 사춘기 딸 아이의 짜증섞인 원성을 피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엄마 아빠는 운전기사가 돼 버리고 만다. 한국 같으면 학원 차량이 다 알아서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데려다 줄텐데 미국은 그런 역할을 모두 부모가 맡아서 하는 것이다.
처음 미국으로 이민 올 때 김 씨는 일찍 퇴근해서 자신만의 취미생활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여유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석양 노을을 바라보며 아내와 함께 멋있게 와인잔을 기울이는 상상도 해 봤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이들 ‘운전기사’를 하고 나면 지쳐서 조용히 책 한 페이지 읽기도 힘들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 나올 때도 있다.
물론 열심히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대견스럽기도 하고 나름대로 보람도 느낀다. ‘이렇게 해야 아이들이 나중에 좋은 대학도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잘 살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금방 힘이 솟기도 한다.
하지만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함께 소주 한잔 기울이던 그때가 그리운 건 사실이다. 미국은 사는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저녁 일찌감치 버스가 끊기는 등 대중교통 수단이 좋지 않아 술 마시는 게 편치 않다.
물론 대리운전이나 택시도 있지만 넉넉치 못한 형편에 그런 것들은 사치다. 보통 집으로 가족들을 초대해서 친목시간을 갖지만 한국과 같은 ‘맛’이 나질 않는다.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 나름대로의 스트레스 해소법과 여유의 시간을 찾아야 하겠지만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많은 이민자들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억 만리 먼 곳으로 올 때 많은 것을 포기하고 왔겠지만 문뜩 문뜩 생각나는 고향의 그 ‘맛’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미국의 경제 상황과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겪어야 하는 이민자만의 어려움. 이를 알 턱이 없는 한국의 친구들이 미국으로 이민오고 싶다는 말을 할 때마다 김 씨는 ‘오지 말라’고 말한다.
막연하게 미국을 동경하는 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 주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다. 그래서 이민자 부모들은 더 힘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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