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X그룹 창립 10주년이었던 지난 2011년 만난 신철식 STX 미래연구원장(전 국무총리 국무조정실 차장)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당시로선 이해가 안 됐던 이 말은 불과 2년도 안된 현재 재계에 그대로 드러맞고 있다.
STX그룹의 사실상 해체를 비롯해 동양그룹의 몰락, 대한전선 오너 3세인 설윤석 사장의 경영권 포기,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 자신의 분신과 같이 아꼈던 동부하이텍, 동부메탈 매각 결정, 구자원 LIG그룹 회장의 LIG손해보험 매각 등. 등으로 일컬어지는 이 현상은, 오너 최고 경영자들의 머리에 ‘버림’이란 한 단어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신 원장은 이미 재계 전반에 불어닥칠 버림의 바람을 예감했던 것은 아닐까?
기업가들은 ‘채움’을 위해 뛰고 있다. 회사를 설립하고 키우고, 또 다른 회사를 설립하고 인수한다. 이렇게 하나하나씩 모이면 하나였던 기업은 그룹이 돼 있고, 설립자인 기업인은 회장 자리에 올라서있다. 적어도 자신의 그룹 내에선 무소불위의 ‘1인자’인 그들은 이를 더 크게 누리고 싶어서 더 회사를 키우고, 만들고, 인수하고 싶어진다. 과거 대기업 회장을 지낸 한 인사는 “손만 대면 뭐든지 성공하는 것 같으니, 이는 마약과도 같다”고 표현했다.
문제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많은 기업들이 이렇듯 ‘채움’만 강행하다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당장 또는 앞으로의 미래에서 커다란 수익을 보장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채움의 과정을 이어가다보니, 부족한 자금은 외부로부터 빌리고, 실적을 높이기 위해 계열사간 내부 거래 비중을 늘리고, 때로는 회계적인 불법도 저지른 결과다.
몰락을 막기 위해 채움 못지않게 경영에 필요한 것이 ‘버림’이다. 오너는 버림이 필요할 때 과감하고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버림을 결정하는 게 쉽지 않다. ‘내가 직접 키운 자식을 누가 버리고 싶겠느냐’는 강한 미련 때문에 시기를 놓치는 우를 범한다. 재계에서는 강덕수 회장과 현재현 회장 등이 미련을 덮고 더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까지 직면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버림’을 적기에 실천한 기업으로는 두산그룹이 꼽힌다. “나에게도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라는 ‘걸레론’을 제시한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1990년대 중반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하고 잘 나가던 소비재 사업을 모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버림 덕분에 두산그룹은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부도 사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김준기 회장도 버림에 있어서는 일가견 있는 기업인으로 꼽힌다. 2009년 위기설이 돌았을 때 알짜였던 동부메탈을 매각했던 그는 최근 또 다시 유동성이 돌자 동부메탈은 물론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동부하이텍과 동부제철 인천공장까지 내놓는 결단을 내렸다.
최근 들어 재계에서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오너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의건, 타의건 경영권 포기와 계열사 매각 등을 통해 버림을 실천하는 오너들은 회사를 살리고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책임경영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시장의 반응도 대체로 긍정적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조용했던 기업 오너들이 갑자기 서로 버리겠다고 나서는 과정을 보면서 한편에서는 “소나기를 피해가려는 꼼수가 아니냐”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당장 눈 앞에 닥친 신변상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물러났다가 언제라도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했던 과거의 사례를 많이 목격해 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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