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차 한 잔] 여성에게 남성은 어떤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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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9-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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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니스트(문학박사)

SK경영연구소 1층에 있는 조각상[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잘’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여성들과 이야기할 때는 ‘잘’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아마도 여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나보다. 그 이면에는 그래도 여자들을 ‘잘’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끔 일부 여성들이 ‘당신은 우리 (여자들) 말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을 보면 ‘은근히 그런 말을 듣고 싶다’는 욕구는 거의 확실한 듯하다.

남자들과 함께 온 여성들은 가끔 ‘초대받지 않은 연사’로서 계속 떠드는, 어쩌면 자기 자랑을 지속하는 ‘남성’들에게 무언의 무시무시한 말 한마디를 전하는 듯이 보인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나요? 아니 최소한의 존경이라도 하나요? 남성들은 항상 여자들에게 이거 하라 저거하라 끊임없이 지시하는 것 같다. 그러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호의가 사라지고 자존감을 상실해 가는 듯하다.

남자들은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데, 그런 설교가 끝났을 때 여성들의 태도가 변한 것만이라도 감지하기도 한다. 이정도만 되어도 눈치가 좋은 남자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마트한 남자는 여성의 변화 보다는 변화의 이유를 알고자 한다. 그 이유 안에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존경’을 바라는 ‘자존감’이라는 가장 무의식적이고 강렬한 욕구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왜냐하면 만약 알았다면 계속해서 ‘설교’나 ‘지시’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여성 입장에서는 단지 "싫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발언은 남성들에게는 너무 불분명하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설교를 할 때 난 지금 좌절감을 느껴요. 마음 깊은 곳에서 불쾌함이 치밀어 올라요”라고 말하면 쉬운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걸 이해해야 하는 게 세상의 반인 여성들과 남성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는 데, 그런 교육은 아무도 받지 못한 ‘불의’가 이 세상에 만연하다.

결국 남자들이 여자들을 지배하려 들고 소유하려고 드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만 내일은 달라질 수 있고 또 경우에 따라 전혀 다르기도 하다. 그리고 남성성을 가진 여자도 많으며, 어쩌면 여기서 말하는 남자도 현실에는 실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남자일 수도 있다. 이런 판단은 경향성에 대한 유보적인 판단으로 언제든지 변화 가능하며 지금 현재도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런 흐름 속에 당당히 조고각하하며 서 있는 것을 ‘중도’라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실탄을 모방한 열쇠고리 장신구[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여하튼 남성들에게는 민주적이고 수평적이고 감성적인 기린과 같은 ‘큰귀’라는 수용태도가 필요할 듯 하다. 물론 여기서 기린이란 우리의 왜곡된 이미지 속의 채식동물로서의 다른 동물보다 키가 큰 기린을 예로 든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짜 수컷 기린은 의외로 몸크기에 비해 귀가 많이 작을 수 있다.

여성의 이유 있는 정당한 변화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기 전에는 함부러 화를 내서는 안된다고 저자들은 전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대부분 남성이 한 말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모두 남자가 잘못 말한 탓이기에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남자 탓을 하는 것은 여자 뿐만 아니라 남자이기 때문에도 가능하다. 평소에는 ‘나’와 똑같은 모습에 대해서 ‘남’을 심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될 듯하다. 결국 남인 ‘그’도 ‘나’와 같은 존재이기에 그렇다. ‘남’을 심판할 때, 그와 마찬가지로 나의 자존감도 산산히 깨진다. 그리고 가슴을 찢을 듯한 상처를 안게 된다. 물론 ‘그’만 내가 아니라 ‘그녀’도 나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아니 앞으로도 보낼 수 있는 행복을 자주 망각한다. 그렇게 간절하게 원했던 시간을 친해졌다는 이유로 그 즐거움을 상실하기도 한다. 나아가 상대에게서 그 즐거움을 뺏기도 한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이 바로 남자인 우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아니 이미 난 충분히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이유를 알았으니 내일부터는 아니 지금 바로 여기서 당장 고치면 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말 자체를 본다고 한다. 하지만 인생을 수행의 장으로 생각하는 우리는 말의 암시를 보려고 한다. 그 말의 속뜻을 보고 싶다고 하면 더 맞을 듯싶다. 아니 그 말 속에 담긴 욕구를 본다고 하면 맞을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다행히 ‘말의 의미와 욕구’에 대한 번역기를 갖게 되었다. 갖게 된 이후로는 어쩌다 우연히 나온 어쩌면 작심하고 나온 여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그녀들의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들으며 함께 즐거워지고 싶다. ‘재밌다’ ‘즐겁다’ ‘예쁘다’ ‘귀엽다’ ‘고맙다’ 등의 말을 당신들을 조종하기 위해서 쓰지 않을 것이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고자 “지금 당신이 그 말을 할 때는 정말 귀여웠어, 어쩜 너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으로 말하니?”라는 닭살 돋는 말이라도 진심이라면 당신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겠다.

비록 당신이 내숭을 떨더라도 그걸 이해하겠다. 그리고 더 이상 가르치려 들지도 않을 것이며 줄곧 자랑을 내세우며 허풍을 떨지도 않겠다. 거꾸로 나의 인생의 그림자들을 이야기하며 나의 아픔과 상처를 보이며 기대고자 한다. 그렇게 남자에게 씌어진 굴레를 벗고자 노력하고 싶다. 특히 내가 화났을 때는 물론이고 당신이 화났을 때는 반항을 하지 않고 아니 하려도 하지 않고 먼저 공감을 하고 사과를 하고자 한다. 물론 억지로 그러지도 않겠다. 보다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매우 즐거워하며 노력하겠다. 혹시 제가 모자르더라도 당신은 저를 비웃지 않고 침묵으로 공감해 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도 당신이 그렇게 지금까지 해 왔듯이 저도 이제 당신처럼 그러고 싶다. 아니 그렇게 하겠다. 그런 생각, 마음, 말, 행동 모두 일치시키도록 언제나 즐겁게 노력하겠다. 당신을 위하여, 아니 나를 위하여, 그 모두를 넘어선 우리를 위해서 이기도 하다.

여기에 나(저)대신 당신을, 여성과 남성 대신에 피해자와 가해자, 착취당하는 자와 착취하는 자, 기린과 자칼, 을과 갑 등을 넣으면 다른 많은 현상들도 이해가 될 수 있기도 하다.

※ 이 칼럼은 '그래도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데보라 태넌, 한언)와 '비폭력대화 일상에서 쓰는 평화의 언어 삶의 언어'(마셜 B. 로젠버그, 한국NVC센터)독서모임에 참가하고 느낀 소감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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