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기획/3무 디지털 성범죄] ③어려서, 반성해서, 인간관계가 좋아서…"가해자만 걱정하는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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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류선우 기자
입력 2019-12-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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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원 "피해자가 두려움에 떨고는 있지만"…각종 이유들어 집행유예

  • 불법촬영 판결, 실형은 5%대…사건 판단에서 '가해자 중심주의' 만연

 

 

 



"한 케이팝 스타의 죽음은 한국 사법체계가 여성들을 얼마나 좌절시키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다 (A K-pop star’s death is the latest reminder of how Korea’s justice system fails women)"

지난달 미국 주요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에 실린 기고문 제목이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강혜련씨는 글에서 가수 구하라씨의 사례는 한국 여성들이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한 각종 성범죄를 당할 경우 겪게 되는 불합리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을 비롯 미국의 CNN 등 외신은 이미 수년전부터 'molka(몰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면서 '전염병'처럼 만연한 한국 디지털 성범죄 실태에 대해 여러 차례 보도해왔다. 그러다 최근 아동음란물 유포 혐의를 받은 '다크웹' 운영자에 대한 솜방이처벌이 문제되면서, 한국 사법부의 성인지 감수성 부족 문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최근 몇년간 디지털 성범죄가 급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이 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꾸준히 이어져왔다.

2016년 열린 '온라인 성폭력 실태 및 피해자 지원을 위한 심포지엄'에서 토론자로 나섰던 피해자 국선변호사인 이수연 변호사는 "피해자가 느끼는 피해감정과 피해의 정도는 매우 심각함에 비해 국가기관에서 느끼는 범죄의 불법성은 낮아 그 온도차가 매우 크다"면서 "(디지털 성범죄는) 다른 범죄에 비하어 2차 피해의 심각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여죄에 대한 적극적인 수사와 엄중한 처벌을 바라는데 반하여 각 기관의 체감도는 편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범죄이니 만큼, 이 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적적한 처벌, 범죄예장 등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점을 더이상 늦춰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10월 '아동성착취 사이트 다크웹 문제와 대안 마련을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박찬미 한국사이버성폭력센터 피해지원국 활동가는 "정준영 단톡방 사건 이후 남성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강간놀이와 '인생은 정준영·승리처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며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유희로 소비되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예방과 처벌로써 가해자들에게 '당신들이 중대한 범법 행위, 한 인격을 몰살시키는 행위를 하고 있으며 그 문화에 동조하지 말라'고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주경제는 법원 판결문 인터넷 열람 시스템을 통해, 지난달 전국 각 지방법원에서 내려진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카메라등이용촬영죄)과 관련한 가장 최근의 판결문 8건을 분석했다.

디지털성범죄가 주요 이슈로 떠오른 현 시점에서 법원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의 고통보다는 가해자의 특수한 '사정'에 관대한 사법기관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강간해도, 협박해도, 유포하려 했어도···반성하면 집행유예

대부분의 판결문에서 가해자의 반성은 양형을 줄여주는 가장 큰 근거가 됐다.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피해자의 외침도 반성한다는 가해자의 목소리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지난달 15일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한지연 판사는 2회에 걸쳐 여자친구 A(25)씨와의 성관계 장면을 몰래 동영상으로 촬영한 피고인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은 지난해 9월 자신의 주거지에서 나체 상태인 피해자와 성관계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A씨에게 정신적 고통을 야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이 연인관계에 있던 피해자 몰래 성관계 동영상을 촬영한 것으로 그 죄질이 불량한 점과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점을 불리한 정상으로 참작하면서도,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점과 피고인에게 동종 전과 또는 벌금형을 초과하는 전과가 없는 점 등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전철역에서 26회에 걸쳐 여성들의 다리 부위와 치마 속을 몰래 촬영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받지 못한 피고인도 반성한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다.

지난달 20일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김동욱 판사는 카메라 등 이용촬영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은 올해 6월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지하철역에서 휴대전화를 이용해 26회에 걸쳐 범행을 저질렀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수회에 걸쳐 반복적이고 계획적인 범행을 한 데다 피해자와의 합의도 없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이 진지한 반성의 태도를 보이는 점과 초범인 점, 촬영물을 다른 곳에 저장하거나 유포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살 피해자의 고통은 외면···동갑인 가해자의 '개선 가능성'에 주목

가해자의 연령이 낮다는 것도 가벼운 처벌을 내리는 근거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됐다. 지난달 14일 서울서부지방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이내주)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카메라등이용촬영)과 협박,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통신매체음란)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는 점과 초범인 점 ▲당심에서 피해자에게 합의금을 지급하고 합의한 점 ▲피고인의 가족과 지인이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탄원하는 등 피고인의 사회적 유대관계가 견고한 것으로 보이는 점 ▲피고인이 1995년생으로 청소년기에 별다른 일탈을 하지 아니한 채 성실하게 생활하여 온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이유로 원심이 선고한 형(징역 1년)은 너무 무거워서 부당하다고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피해자의 나이가 가해자와 같은 19살이며, 지속적인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어린 나이'에 더 주목한 재판부도 있었다.

지난달 14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형사부(재판장 김상일)는 강간과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카메라등이용촬영), 강요, 협박 등 4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은 올해 6월 어플리케이션에서 알게 된 피해자 B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위행위를 하면서 신음소리를 내라고 요구했고, 이틀 뒤인 27일 녹음파일이 없음에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 피해자 지인에게 이를 유출할 것처럼 피해자를 협박했다.

피고인은 B씨에게 성관계를 하면 녹음파일을 지워주겠다고 협박한 뒤 상주시에 위치한 모텔에 데려가 B씨에 의사에 반하여 강간했다. 동시에 피해자가 나체로 성관계하는 모습과 구강성교하는 모습을 촬영해, 이후에도 이를 피해자의 지인 또는 외부 업체에 유출할 것처럼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협박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19세에 불과한 어린 나이로 큰 정신적 고통과 성적 수치심, 인격적인 굴욕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며 "피해자가 범행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피고인이 사건 범행을 모두 인정하면서 반성하고 있는 점 ▲이 사건 이전에 아무런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소년으로서 향후 적절한 교화를 통해 자신의 성행을 개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는 점 ▲피고인이 촬영한 영상물 등이 유포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고 피해자와 합의한 점 등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카메라 등 이용촬영죄 양형 살펴보니…벌금형 가장 많고 실형 5%대

지난 6월 대법원 양형위원회 양형연구회 3차 심포지엄에서 백광균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판사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카메라 등 이용촬영죄(전국 법원에서 선고된 단일 유죄판결 5699건 기준)에 대한 양형은 벌금이 60.8%로 가장 많고,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28.6%, 선고유예가 5.4%, 실형은 5.2%로 집계됐다.

과거 시점으로 가면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양형은 더 낮아진다. 백 판사가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종전 1심 판결을 분석(카메라 등 이용촬영죄 1540건, 통신매체이용음란죄 278건 분석)한 결과를 보면 벌금 71.97%, 집행유예 14.67%, 선고유예 7.46%, 징역 5.32% 순서로 나타났다.

더구나 해당 판결의 감경요소를 분석한 결과 미기재가 42.85%에 달했다. 다음으로 '초범 등'이 19.99%, '반성, 사회적유대관계 등'이 19.01%, '초범'이 8.95% 순으로 나타났다. 감경요소 중 '합의'는 다 합쳐도 8.86%에 불과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심지어 피해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야기하는 유포 범죄의 경우에도 양형은 집행유예 32.81%, 벌금 31.25%, 징역 26.56%, 선고유예 9.38%에 그쳤다.

이에 전문가들은 여전히 법정이 가해자 중심주의적 사고에 머물러있다고 비판한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사법연수원 32기)는 "대개 강간이나 추행보다 불법촬영이 경미한 범죄라는 인식이 있지만 오프라인 성범죄보다 지속성 등에서 심각한 측면이 있다"며 "재판부가 아직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피고인이 이런 행위를 했지만 반성하고 있고 '뭘 잘 몰라서' 혹은 우발적으로 한 일이니 봐주자는 식의 가해자중심주의가 드러나는 것"이라며 "이러다보니 '몰카'를 찍어도 운이 나빠야 걸리고 걸려봐야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는 인식이 퍼져 범죄 형벌로서의 억지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어 "단기로라도 실형 선고가 내려지고 그런 사례들이 쌓여야지만 범죄의 경각심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사법연수원 40기) 또한 "모든 사람에게 실형을 선고할 수는 없지만 피해자랑 합의하지도 않았는데 막연히 집행유예를 내리는 등의 일이 반복된다면 '그런 일을 저질러도 감방갈일은 없겠네'라는 인식이 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더 심각한 건 법원이 단순 촬영에 그친 범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라며 "유포에 대한 양형이 세게 나오는 건 유포를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건데 단순 촬영 범죄는 쌓여서 유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은 어쩌다가 한 번 했다가 걸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보통 가해자들 핸드폰을 보면 수백개 영상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피해자가 특정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감형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성희롱(성적 괴롭힘) 개념을 처음 정립한 것으로 알려진 페미니즘 석학 캐서린 매키넌 미국 미시간대 종신 교수 또한 지난 6일 한국에서 열린 '젠더폭력방지를 위한 대화'에 참여해 "타인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소비하는 불법촬영 유포와 포르노그라피는 불평등한 성별 관계를 반영하고, 계속해 확산 강화한다는 점에서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며 그 심각성을 강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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