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12) 베트남은 중국을 어떻게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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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서강대 교수
입력 2020-09-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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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홍강 강변에서 이한우 교수]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12) 
베트남은 중국을 어떻게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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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는 베트남 개혁·개방을 연구하는 최고 전문가인 서강대 이한우 교수의 칼럼을 연재한다.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는 베트남의 개혁 과정을 톺아보고 분석하며 날로 확대되고 있는 한·베트남 관계에 대한 현황을 살피고 전망을 내놓을 것이다. 이한우 교수는 서강대에서 베트남 개혁정책을 주제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로 있다. 베트남 국민경제대학 객원연구원으로도 있었다. 그는 베트남 정치경제 개혁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으며 개혁으로 인한 사회문화 변화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베트남 경제개혁의 정치경제>, <한국-베트남 관계 20년> 등의 책과 베트남 개혁에 관한 연구 논문을 여러 편 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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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인식의 현재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ISEAS)는 2020년 1월 동남아 각국 전문가들의 인식조사 결과를 펴냈다. 여기에서 동남아에 가장 큰 경제적 영향을 주는 국가가 중국이라고 답한 비율은 79.2%였다. 2019년 73.3%에서 증가한 것이다. 정치 및 전략상으로 동남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국가가 중국이라는 응답은 2019년 45.2%에서 2020년 52.2%로 증가했다. 베트남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동남아에 경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국가가 중국이라고 한 베트남인 비율은 2019년 68%에서 2020년 76.3%로 급증했다. 정치 및 전략상 동남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국가가 중국이라고 답한 비율은 2019년 52.1%에서 2020년 56.6%로 증가했다.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증대가 자국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한다는 답은 동남아 전체로 72%였는데, 베트남인들은 80%가 그렇다고 했다. 중국의 안보 및 전략상 영향력 증대에 대해 우려하는 응답자는 동남아 전체 85.4%보다 베트남인이 95.3%로 훨씬 많았다. 동남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증대에 가장 높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이들은 바로 베트남인이다.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경계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양국 관계의 근원

1993년 내가 처음 베트남에 갔을 때 놀랐던 것은 용이 왕조시대 건물이나 난간 등 곳곳에 설치돼 있는 것이었다. 용은 중국 황제의 동물인데, 왕조시대 조공관계를 맺고 있던 베트남이 어떻게 용을 이리 많이 두었을까 의문이었다. 우리도 곤룡포니 용상이니 하는 말을 썼지만 베트남처럼 건물에 용을 많이 설치하지는 않았다. 그 후 베트남에 대해 공부하면서 깨친 것은 역사적으로 베트남이 중국에 대등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스스로 북국 중국에 대등한 남국이라고 생각했다. 1802년 들어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 왕조는 1804년 중국의 책봉을 받으며 국가명을 ‘비엣남’(Viet Nam, 越南)으로 하기로 타협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머지않아 ‘다이비엣’(Dai Viet, 大越), ‘다이남’(Dai Nam, 大南)으로 바꿔 불렀다.

베트남에 용이 많았던 것은 다른 한편 동남아에도 용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던 원인도 있었다. 베트남의 시조도 용의 후예였다. 시조 ‘낀즈엉브엉’(Kinh Duong Vuong, 涇陽王)은 용왕 동정군(洞庭君)의 딸에게 장가들어 숭람(崇纜)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락롱꿘’(Lac Long Quan, 貉龍君)이다. ‘락롱꿘’은 ‘어우꺼’(Au Co, 嫗姬)와 혼인했는데, ‘어우꺼’는 1년 만에 삼(태아의 막과 태반)을 하나 낳았고, 7일이 지나자 그 삼에서 백개의 알이 나와 알마다 사내아이가 하나씩 태어났다. ‘락롱꿘’과 ‘어우꺼’는 아이들을 절반씩 데리고 물과 산으로 떠났고, ‘어우꺼’와 함께 산으로 간 아이들 중 한명이 ‘훙브엉’(Hung Vuong, 雄王)이 됐다. ‘훙브엉’은 기원전 7세기쯤 ‘반랑’(Van Lang)국을 세웠다. 이후 ‘어우락’이 ‘반랑’을 복속시키고, ‘남월’이 ‘어우락’을 복속시킨다. ‘남월’(南越, Nam Viet)은 현재의 중국 광둥성, 광시성에 걸쳐 있었는데, 현재 베트남 북부에 있던 ‘어우락’을 복속시킨 이후 기원전 111년 한나라에 복속됐다. 이로써 베트남은 938년까지 천년간이나 중국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된다. 중국은 939년 베트남이 독립 국가가 된 이후에도 일곱 번이나 베트남을 침공했고, 15세기 초에는 20년간이나 지배하기도 했다.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경계의 근원을 중국의 침략과 지배의 역사에서 찾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현대 양국 관계의 이중주

베트남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배 하에 있었던 것이 경계의 근원이긴 하나, 현대에는 더 현실적 이해가 있다. 현대에 와서 양국 관계는 협력과 갈등의 이중주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하고 강대국들은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두 지역으로 나눠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게 했다. 북부에는 국민당 중국군이 들어오고 남부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영국은 프랑스에게 곧 지배권을 넘겼다. 북에 들어온 국민당군은 약탈을 일삼았다. 국민당군의 요구에 응하려고 베트남 사람들은 ‘금 모으기 운동’을 벌여야 했다. 1945년 9월 독립국가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선포되자, 프랑스가 식민지배를 복구하려고 획책한다. 베트남은 프랑스를 상대로 1946년 말부터 1954년 5월까지 항불전쟁을 치러야 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중국은 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베트남의 프랑스에 대한 승리에 기여했다. 현대 베트남을 최초로 승인한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0일 건국 후 1950년 1월 18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가장 먼저 합법적 정부로 승인했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1954년 제네바협정으로 분단됐다. 1964년부터 열전으로 확대된 베트남전쟁에서 중국은 소련과 함께 북베트남에 대한 최대 지원국이었다. 중국은 1950년 베트남민주공화국과 수교 후 약 30년간 200억 달러 상당액 이상의 원조와 연인원 2만 명의 고문단 및 30만명의 군인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그러나 베트남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1979년 2월 중국이 침공해 와 전쟁을 치른 후 베트남-중국 관계는 단절됐다. 권위 있는 동남아 연구자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된 공동체>를 내며 민족주의를 새로 정의하게 된 계기도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세 사회주의 국가 간에 전쟁이 왜 일어났을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시기 베트남은 <중국 백서>를 발간해 중국이 1954년 제네바회담에서 분단안을 받아들이도록 종용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피에르 애슬린(Pierre Asselin)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베트남이 분단안을 받아들인 것은 중국과 소련의 압력도 있었지만 베트남이 선택한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전쟁이 계속될 경우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우려한 것은 중국과 소련만이 아니었고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1978년 6월 베트남이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가입하여 소련 및 동유럽과 협력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지원 중단과 미국의 베트남과의 수교 협상 단절에 대한 돌파구였다.

베트남과 중국 간 관계가 왜 베트남전쟁 직후부터 소원해졌을까? 갈등의 소지는 베트남전쟁 중에 이미 배태돼 있었다. 북베트남은 급속한 통일을 추구했지만, 중국은 점진적 통일을 선호했기에, 양국 간 전략상 이견이 있었다. 또한 코살 패스(Kosal Path)에 따르면, 중국은 1970년대 전반 북베트남에 대규모 지원을 약속했지만 실제 지원을 줄였다. 이는 중국이 국내 경제 회복에 더 중요성을 두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1972년 2월 미-중 데탕트 이후 중국의 안보전략상 북베트남의 중요성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1970년대 중반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었다. 이에 베트남은 중국에 대한 의혹을 키우게 됐다. 이후 두 나라는 남중국해에서 1974년과 1988년에 크게 격돌했고, 중국이 파라셀 군도의 서남부를 점령하고 스프래틀리 군도의 섬을 여러 개 점령했다.

베트남과 중국 관계는 1979년 단절된 후 1991년 11월에 가서야 다시 정상화됐다. 양국의 관계정상화 협상과정에서 베트남은 세계적인 사회주의 쇠퇴 시기에 중국이 사회주의권의 종주국 역할을 해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각자도생”해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이념보다는 국가 이익이 우선되기 마련이었다.
 

 



중국이 매력 있는 국가가 되려면

실생활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하나 들어 양국 관계의 방향을 찾아보자. 지금 베트남에서는 전철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처음으로 생기는 전철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어떤 이는 호찌민시와 하노이의 전철 건설현장 사진을 대비해 페이스북에 올렸다. 보니, 일본 회사가 건설하는 호찌민시 전철 철로는 곧게 뻗어 있는데, 중국 회사가 건설하는 하노이 전철 철로는 휘어진 기반 위에 놓여 있다. 하노이 경전철 공사는 중국의 공적개발원조(ODA)로 2011년 착공해 2014년에 완공될 예정이었는데 2017년까지 연기됐다. 하노이 전철은 2019년 4월에야 시운전을 시작했으나 곧 중지됐다가 10월에 재개됐지만, 착공 후 10년이 된 지금도 언제 완료될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이 과정에서 사업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전철은 개통되자마자 적자를 낼 것이라고 예상된다. 어느 베트남 신문은 “깟링-하동 철도: 실패 경험의 박물관”이라고 기사 제목을 달았다. 수도 하노이에 처음으로 건설되는 전철은 베트남 발전의 상징으로서 의미도 크다. 속사정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중국이 국내 고속철을 잘 건설했으면서도 베트남 전철 공사를 이렇게 해서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살 수 있을까?

인터넷에 떠도는 어느 사진은 남녀가 서로 입을 맞추며 상대방의 등에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쪽은 베트남이고 한쪽은 중국이다. 현대 양국 관계를 희화하여 표현했다. 앞으로 서로 총이 아닌 꽃을 들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앞서 언급한 싱가포르 동남아연구소의 인식조사에서, 중국의 ‘일대일로’에 대해 동남아 사람들은 전적으로 신뢰하거나(2.5%) 어느정도 신뢰하기(33.9%)보다 아주 조금 신뢰하거나 (42.1%) 불신(21.5%)했다. 중국이 불균형적 지원을 통해 동남아 국가들을 편 가르려고 하기보다 매력 있는 국가로 보일 방안을 서둘러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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