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자국 우선주의는 어느 때보다도 강력할 전망이다. 특히 관세를 내세워 자국 내 공급망을 더욱 견고히 다지고, 투자를 유도하려는 정책은 '트럼프 1기' 때보다도 강화됐다.
이 같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보는 한국 전기차·배터리·소재 기업에 당분간 큰 위협이 될 전망이다. 탄핵 정국으로 인해 대미 협상력이 약화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예상보다 큰 관세 부담에 직면할 위험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국내 기업들이 미국 내 투자를 꾸준히 진행해 온 만큼, 타격이 예상보다 적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美 관세정책에 한국 배터리·소재 기업 불확실성 ↑
17일 배터리·소재 업계에선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180도 뒤엎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보에 사업 불확실성이 한층 커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 인수위원회가 배터리와 관련 소재 산업에 대한 특정 권고안을 내놓으면서 업계에 불확실성이 커진 게 사실”이라며 “현재로서는 권고 수준에 불과하지만 실제 정책으로 실현될 경우 배터리 소재뿐만 아니라 배터리와 전기차 가격까지 연쇄적으로 인상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실제로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들의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배터리 소재에 대해서도 관세를 물리면 소재 수급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양극재, 음극재, 분리막, 전해질 등 여러 소재를 이용해 만드는데, 미국에 공장을 둔 국내 배터리 제조사는 상당수 소재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에코프로비엠, 포스코퓨처엠, 엘앤에프 등이 배터리 제조사에 소재를 공급하고 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 인수팀은 배터리 소재에 관세를 부과하되, 향후 동맹국들과는 개별 협상을 진행해 관세를 면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관세를 중국산 소재 수입을 막는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동맹국과의 협상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활용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대미 투자 강화 하지만...탄핵정국에 협상력 결여
이에 배터리 소재 업계에선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원하는 대로 대미 투자에 속도를 내는 방식으로 사업 불확실성을 최소화할 방침이다. 이미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를 예상한 기업들은 선제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포스코퓨처엠은 GM과 협력해 캐나다 퀘벡주 베캉쿠아에 배터리 양극재 합작 공장 건설을 진행 중이다. 완공되면 연 3만t 규모의 양극재를 북미에서 생산할 수 있을 전망이다. 포스코퓨처엠은 올해 4월 혼다와 캐나다에 양극재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하는 등 북미 시장을 겨냥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LG화학은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북미 최대 규모 양극재 공장을 짓고 있다. 2026년 완공 예정인 클락스빌 공장이 완공되면 LG화학은 북미에서 연 6만t의 양극재를 생산할 수 있을 전망이다. 에코프로비엠도 캐나다 퀘벡주에 연 4만5000t 규모 양극재 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정부는 탄핵 정국으로 인해 트럼프 2기 행정부와 배터리 관세 협상을 할 주체가 불명확하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윤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고 본격적인 탄핵 정국에 돌입했다. 국정이 정상화되려면 최소 수개월 이상이 걸릴 전망이다. 그전까지는 기업이 트럼프 2기 행정부와 개별적으로 접촉해야 하지만, 현재로서는 협상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직접 진행한 재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 한국 정부와 한국 기업의 자리는 없었다. 미국에 1000억 달러(약 143.6조원) 투자를 약속한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트럼프 당선자와 함께 무대에 올라 미국 내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다. 결국 국내 배터리·소재 업체에도 같은 형태의 청구서를 내밀 가능성이 커졌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예측이다.
◆전기차 보조금 축소로 미국 시장 입지 '안갯속'
자동차 업계의 우려도 만만치 않다. IRA 폐지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축소다.
현대자동차는 IRA 보조금을 받기 위해 약 10조원을 투입해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공장인 메타플랜트를 설립, 내년부터 본격 양산을 시작한다. 메타플랜트에서는 현대차, 기아, 제네시스의 전기차 모델을 연간 약 30만대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IRA 세액공제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현대차는 생산라인을 변경하는 상황이다. 전기차 생산을 위해 만든 메타플랜트에 추가 비용을 들여 최근 하이브리드 생산장비를 추가했다. 전기차 시장 공략에 불확실성이 생긴 만큼, 장기적인 북미 사업계획을 다시 짜야 하는 상황이다.
또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도 우려하는 부분이다. 현재 한국의 자동차, 자동차부품은 대부분 0%의 관세율이지만 미국 상무부가 해당 조항을 통해 모든 국가에 최대 25%의 과세를 부과하면 한국 자동차는 사실상 가격경쟁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세액공제 등 개별 정책을 떠나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기조가 강화되면 기업들의 현지 생산이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의 추가적인 수출 감소는 불가피하다"면서 "다만 미국은 연간 자동차 소비량의 4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의 관세가 급격하게 올라가는 걸 트럼프가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