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논설고문]](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5/02/13/20250213113057569156.png)
[이재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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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선거 때마다 늘 그렇기는 해도 이번엔 조금 다르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국민의 염증과 우려가 한계에 달한 느낌 때문이다. 결함투성이인 현행 대통령제(87년체제)를 이젠 접고 우리도 우리 몸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성인’이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임을 자랑하지만 옷은 여전히 중학생에게나 맞는 옷을 입고 있다. 그런 옷을 입고 최소한의 균형도, 배려도, 관용도 없는 증오와 분열의 진영(陣營) 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젠 바꿀 때도 됐다.
지난 6일 국회 의원회관에선 성일종 국방위원장(국민의 힘) 주관으로 ‘국가 대개조를 위한 개헌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의 문제의식 또한 같았다. 성 의원은 개회사에서 “1987년 출범한 현행 제6공화국 헌정체제는 제헌 이래 최장수이나, 그동안 GDP가 10배 상승하고, 3400달러였던 1인당 소득이 3만6000달러를 넘는 등의 비약적인 발전상황을 담아내지 못한 채 여전히 38년 전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군(軍) 통수권과 사면권, 4대 권력기관장 인사권 등 행정부의 모든 권한을 대통령이 독점하는 체제에선 어떤 대통령도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개헌의 첫발을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우리 사회와 학계에서 이른바 ‘개헌론자’로 불릴 만한 인사들이 다수 참석했다. 개헌의 필요와 당위성에 대한 지지 의사로 읽혀져 고무적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헌은 유혈투쟁 없이 합법적으로 정치와 정치체제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수단이다. 국민이 제 손으로 지도자를 뽑는다는 것은 사실 경이로운 일이다. 대한민국처럼 직접선거에 목을 맨 나라도 드물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때까지도 우리는 ‘체육관 선거’라는 간접민주주의에 만족해야 했다. 치열한 투쟁 끝에 제 나라 대통령을 제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됐고, 이로 인해 우리를 보는 세상의 눈도 정치도 달라졌다.
이날 개헌토론회에도 이재명 대표는 물론 민주당 인사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성 의원은 하루 전인 5일 페이스북을 통해 이 대표의 참여를 요청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 “지금이 개헌논의의 최적기”라며 “다수당의 이 대표가 핵심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동참해 달라”고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 대표는 “지금은 개헌보다 내란 극복이 우선”이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이날 토론회의 좌장은 대표적 개헌론자인 이재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맡았다. 그는 평소 ‘87년 체제’의 한계를 지적하고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그 내용을 몇 가지 보면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뽑고 △임기 4년에 1차에 한하여 중임토록 하며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선출함으로써 대통령과 총리가 역할분담을 통해 협치의 권력구조를 유지하도록 했다. 이 경우 △대통령은 외교, 국방, 통일문제를 담당하고, 내치(內治)는 국무총리가 맡는다. 독일식 이원집정제와 유사하다. 또한 △국회 해산권을 신설하고 △국회의석 수에 따라 연립정부를 구성토록 명문화하며 △ 배심원 제도에 대한 근거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민참여 재판제도를 전면 확대하고 △이에 대한 위헌시비를 해소하기 위해 배심원 근거규정 및 자격 근거를 신설토록 했다.
이 개헌안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논의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었다. 2012년 제19대 국회 초, 권력구조 개편에 찬성하는 의원들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개헌추진 국회의원모임’을 결성했고, 이 모임이 개헌 작업을 주도했다. 참여 의원들은 한때 155명에 달했다. 당시 새누리당에선 이재오 정갑윤 의원이, 민주당에선 우윤근, 이낙연, 유인태 의원이 주축이 됐다. 이들은 시민사회단체 등과 ‘개헌추진국민연대’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이들 중 이재오, 우윤근 의원이 남다른 유대 아래 모임을 주도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이 의원(서울 은평)과 야당이었던 우 의원(전남 광양)이 신뢰를 기반으로 산고(産苦)를 거듭한 끝에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 의원의 고향은 경북 영양, 우 의원은 전남 광양이어서,‘영호남 타협안’으로 인식됐다.
이 의원은 민주화운동으로 독재정권 하에서 5차례나 수형생활을 했고, 사법고시 출신으로 국회 법사위원장을 지낸 우 의원은 독일헌법에 특히 밝았다. 두 사람의 개헌 노력에는 그들의 삶의 궤적이 오롯이 녹아있다. 양당 관계자들은 지금도 당시의 타협 노력과 합의안 도출에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다. 이에 비춰보면 작금의 우리 정치는 얼마나 퇴보했는지, 참담하다. 대화와 타협은 찾아보기 어렵고 서로 밤낮으로 적의(敵意)의 칼만 갈아대고 있다.
토론회에는 김종인 전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참석했다. 그가 내건 제목은 ‘다음 대선후보의 별의 순간 개헌‘. 개헌을 적극 이슈화하고, 더 많은 국민으로부터 호응 받는 개헌안을 내놓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거였다. 그는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 중심제가 탄생한 것은 “1987년 헌법 성안 당시 모두가 대통령의 임기에만 관심을 갖고 대통령제의 폐해 등에 대해선 충분히 예상하고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럼에도 87년 체제가 꽤 오랜 기간 제도적 민주화의 토대였던 것은 지도자의 리더십이 괜찮았기 때문이라며 김대중(DJ)의 예를 들었다. “DJ는 DJP 연합 파탄 후 소수여당이 됐지만 야당과 협치해 5년 임기를 마치고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는 것. 이 대목에서 그는 윤석열 정권에 대한 뼈아픈 지적을 빼놓지 않았다. “이처럼 대통령 권한을 토대로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게 정치력인데, 윤 대통령처럼 ‘여소야대라 아무것도 못해 최후의 수단으로 계엄을 선포했다’고 하는 것은 정치력 부족을 인정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할 게 아니라 ‘이런 권력구조로는 국가발전에 한계가 있다며 ’개헌‘을 들고 나왔어야” 했다는 것.
그는 “곧 대선이 있을 것으로 본다”면서 “22대 국회 임기가 3년쯤 남는데 2028년 총선 전까지 개현 관련 논의를 치열하게 마친 뒤 총선과 함께 개헌을 마무리해 제 7공화국을 탄생시켜야 하며, 이런 타임라인을 약속하고 지키려는 사람이 가장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당장은 개헌이 국민의 귀에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선거가 시작되면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한국 정치의 기본 틀을 바꾸려는 사람이 유리할 것으로 본다”는 것.
김진표 전 국회의장도 가세했다. “지난 20년간 역대 모든 국회의장들이 정당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며 “이번 계엄 사태로 거듭 드러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어느 때보다도 확산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최소 개헌’을 주장했다. 이것저것 다 담다 보면 될 것도 안 될 터이니 국민이 OK할 수 있는 것만 담자는 것. 그는 지난 4월 총선에서 여야가 모두 1호 공약으로 내건 저출생 대책을 헌법에 명문화하는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개헌열차를 출발시키자고 했다,
김 전 의장은 선거법과 정당법 개정을 통한 한국 정치의 정상화를 강조했다. 대표적인 게 중대선구제의 도입. 지난 22대 총선에서 국민의 힘과 민주당은 지역구 득표율에서 5.4%p차이였지만 지역구 의석수 차이는 71석, 지역구 사표율은 41.52%p에 달했다는 것. 만약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선거를 치렀다고 가정한다면 서울의 경우(총 48석) 제1당이 30석 이상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제2당도 20석 이하로 떨어지기가 어려워 자연스럽게 협치가 가능한 의석구도가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4년 중임제 도입이 대선 전에 합의될 경우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다음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지도록 조율함으로써 정치의 책임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12일 개헌논의에 뛰어들었다. 주제는 지방분권. 국민의힘 의원 48명을 비롯해 5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오 시장은 “87년체제를 극복하는 핵심은 지방분권”이라며 중앙정부의 3대 핵심권한으로 꼽히는 예산-인력-규제 관련 권한을 대거 지방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자는 제안에 반대하지 않는다”면서 “이번 기회에 대통령 임기 조정, 정‧부통령제, 책임총리제, 선거구제 재편까지 모든 논의가 함께 이뤄져야한다”고 했다.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줄일 수 있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의 계엄사태가 정치개혁의 골든타임을 불러온 것일까. 그건 망외의 소득일까, 아닐까. 이재명 대표는 “지금은 개헌을 논할 때가 아니다”고 했지만 개헌논쟁은 이미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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