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찬조금 관행과 기업 운영의 어려움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보통 금식월이 끝난 후 가장 큰 명절이 시작된다. 무슬림 인구가 다수인 인도네시아에서 금식월이 끝난 첫날은 ‘르바란’(Lebaran)이라 불리며, 약 일주일간의 연휴가 이어진다. 많은 사람이 이 기간 동안 고향을 찾기 때문에, 새벽에 출발해 다음날이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언론 보도를 가득 채운다.
르바란 휴일에는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진다. 새 옷을 차려입고 부모님께 명절 인사를 드리며, 선물을 주고받고, 명절 음식을 나누고, 조상의 묘소를 찾거나 관광지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 가운데 특히 농촌 지역에서 자주 행해지는 활동은 이웃과 친지를 방문해 인사를 나누는 일이다.
내가 조사했던 농촌 마을에서 젊은이들은 단체로 이웃집을 방문했다. 하루에도 여러 집을 들르다 보니, 이들과 함께 다니다 보면 열 잔이 넘는 커피나 차를 마셔야 했다. 게다가 대다수 가정에서 비슷한 음식을 대접했기에 늦은 오후가 되면 과자 한 조각조차 부담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쉽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르바란은 풍요와 여유를 누리는 시기라 여겨졌다.
풍성한 명절을 보내기 위해 각 가정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 이를 감당하려면 더 많은 수입이 필요한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착한 전통이 바로 명절 보너스이다. 공식 부문이든 비공식 부문이든, 정규직이든 임시직이든 임금을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르바란 보너스를 기대한다. 따라서 보너스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사업장은 악덕 업체로 낙인 찍혀 이후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명절 보너스는 법적으로도 인정된다. 노동부 규정에 따르면, 고용주는 1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에게 한 달치 기본급에 고정 수당을 더한 금액을 명절 1주일 전까지 지급해야 한다. 근무 기간이 짧거나 고정적이지 않을 때 그에 비례해 그 규모가 결정되지만, 핵심은 고용주가 보너스 지급에 인색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르바란을 앞두고 프라보워 대통령이 직접 나서 승차공유 서비스 종사자를 챙기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이들이 법적으로 노동자는 아니지만, 명절을 함께 누려야 할 대상임을 강조한 프라보워는 플랫폼 기업에 보너스 지급을 요청했다. 곧이어 이를 뒷받침할 훈령이 발표되었고, 여러 기업이 보너스 지급을 확약했다.
찬조금이 보너스와 유사한 논리를 지닌 이유는 명절 기간이나 직후에 많은 집단이 르바란 행사를 개최하기 때문이다. 이를 준비하기 위한 비용을 이들은 찬조금을 통해 충당하려 한다. 찬조금을 요구하는 집단에는 종교, 봉사, 직능, 스포츠, 취미 등 거의 모든 조직이 포함되며, 통·반, 리, 면과 같은 하위 행정기관 역시 이에 해당한다. 찬조금을 요청받는 대상은 전통적으로 지역 유지나 정치 지도자, 단체의 유력 인사였으나, 최근에는 지역 내 사업체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지역에 기반을 둔 사업체라면, 사업주가 보통 지역 유지에 속하기에 찬조금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외부 자본이나 외지인이 운영하는 경우, 찬조금의 규모나 방식을 두고 잡음이 발생하기도 한다. 올해에도 이와 관련된 논란이 일어났다. 강압적인 찬조금 요구에 난색을 표한 사업체의 이야기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확산했고, 곧이어 언론이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명절 찬조금 문제가 공론화되면, 찬조금을 요구한 집단에 비난이 쏟아지고, 정부가 단호한 대응을 약속하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올해에는 이와 다른 모습이 추가되었다. 종교부 차관이 민간의 찬조금 요구를 명절 문화의 일부라 규정하면서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확산하면서 비판 여론이 일자, 종교부 차관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며 진화에 나섰다. 이러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음 제기한 입장은 찬조금에 대한 관습적 시각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집단 명의로 이루어지는 찬조금 요구는 인도네시아에서 낯설지 않은 관행이다. 마을 길 보수, 모스크 시설 개선, 지역 행사 지원, 교육 기관 후원 등 다양한 명목으로 누군가가 집에 찾아와 찬조금을 요청할 수 있다. 그 취지에 공감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다수 현지인은 이러한 요구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를 통해서만 자신이 그 집단의 일원임을 확인받게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거절하면 공동체적 책임을 외면한 사람으로 간주되며, 그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으로 낙인 찍혀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
이처럼 찬조금 관행은 집단이 가진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다른 사회에서도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집단이 요구하는 경우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집단의 힘은 훨씬 강력하게 작동하며, 이를 행사하는 집단 역시 다양하다. 최근에는 이러한 집단을 가리키기 위해 ‘주민 조직’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주민’이라는 용어의 모호함이 지시하듯, 이 범주에는 그 규모나 성격에 상관없이 복수의 개인으로 구성된 집단 모두가 포함될 수 있다.
집단의 힘이 발휘되는 전형적인 상황은 지역 주민이 행하는 집단적 제재이다. 도둑질이나 불륜과 같은 행위가 발각되거나 외부인과의 충돌이나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할 때, 마을 주민들이 범죄자나 외부인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집단행동은 관습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대부분 법적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
집단의 힘은 최근 들어 선거 상황에도 나타났다. 주민 조직의 대표가 특정 후보와 접촉해 찬조금을 요구하는 사례가 일상화된 것이다. 개인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금품 공여는 법적으로 문제시되지만, 집단을 대상으로 금품과 편의를 제공하거나 이를 약속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용인된다.
르바란 찬조금 역시 이러한 집단적 힘에 기반한다. 올해 보도된 사건을 보면, 자카르타 인근 지역의 주민 조직이 지역 내 사업체에 찬조금을 요구했다. 이들은 사업체를 오가는 화물차 통행으로 피해를 보았지만 이를 감수해 왔다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명절 보너스를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사업체가 받아들이지 않은 데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떻든 정부 기관의 약속처럼 보너스를 요구한 주민 조직이 처벌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반면, 이 사업체가 향후 지속적 압박에 시달릴 가능성은 매우 크다. 소음, 먼지, 보행자 위협 등을 둘러싼 민원이 계속 제기될 것이며, 경찰 신고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집단이 가진 힘, 그리고 그 자의적 행사 방식을 고려할 때,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가 절대 쉽지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사업체가 한국 기업이라면, 그 어려움은 배가될 것이다. 그럼에도 주민 조직과의 우호적 관계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사업 운영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장 앞 도로가 개통되었음에도 이를 이용하지 못한 채 먼 길을 우회해야 하는 고초를 우리 기업이 겪은 적이 있었다. 주민 조직이 도로를 막고 통행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기업에서 일해 본 경험이 없는 내가 집단의 힘에 대처할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원론적인 차원에서 강조할 점은 다양한 집단이 찬조금을 요구할 수 있고, 그것이 관습적으로 용인됨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식의 요구가 우리 기업만을 향한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업체가 겪는 일반적인 현실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현지 기업 역시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게 되면, 외국 기업이기에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식의 피해의식을 완화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강조할 점은 집단의 요구 역시 협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 요구를 무조건 거절하거나 수용하기보다는 그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듣고 기업의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이 축적될 때, 장기적으로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균형점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말하기는 쉽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집단의 요구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며, 그 내용 역시 매번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성공적인 현지화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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