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전 국회의원]
AI가 국가 전략의 핵심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이세돌과의 바둑 대결에서 승리한 알파고의 개발자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가 202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고, 챗GPT 등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AI는 일하는 방식, 산업 구조, 경쟁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이제 AI를 어떻게 육성하고 활용할 것인가는 국가 전략의 필수 과제가 되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국민·기업·정부·연기금이 공동 참여하는 100조원 규모의 국가 AI 투자펀드를 조성하겠다고 공약했다. 이는 민간과 공공 자금을 모아 미래 기술에 장기 투자하겠다는 것으로, 국가 역량을 결집하는 장치다. 새 정부는 대통령실에 ‘AI 미래기획 수석비서관’직을 신설하고 민간 전문가를 임명해 그 의지를 제도화하고 있다.
AI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 산업정책의 고정관념부터 벗어나야 한다. 한국은 요소투입(input) 확대와 전략 분야 선정을 통한 집중투자로 산업을 육성해왔다. 개발연대에는 이 방식이 유효했다. 한정된 자원을 선진국의 성공 사례에 맞춰 선택·집중하는 전략은 ‘따라잡기(catch-up)’ 국면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미 선진국 문턱에 올라섰고, 글로벌 경쟁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미래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모두가 가보지 않은 영역에서 경쟁하는 상황에서, 어느 기술이 주도권을 쥘지 정부가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AI도 자연어 처리(NLP), 컴퓨터 비전, 자율주행, 머신러닝, 데이터 처리, GPU 중심 반도체, 강화학습, 퍼지 로직 등 다양한 분야가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이 중 어디서 혁신이 터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GPU가 AI 혁신의 핵심이 되리라 예측한 이는 없었다.
따라서 정부가 특정 분야를 콕 집어 선정해 집중 지원하는 접근은 위험하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도록 토양을 조성하는 일이다. 정부는 특정 기술에 올인하기보다, 혁신이 자생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R&D 프로그램 역시 전략 분야 지정 중심에서 벗어나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개방형 R&D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TSMC는 1980년대 대만 정부가 전략적으로 설립했지만, 정부는 초기 적자에도 경영에 간섭하지 않고 기업의 독립성을 보장했다. 1987년 정부는 모리스 창에게 약 1억 달러를 투자해 TSMC 지분 49%를 확보했지만, 이후 지분을 줄여 현재는 6% 수준에 그치며 이사회에서도 한 석만 유지하고 있다. 초기 자금만 지원하고 경영 판단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것이다. 이는 정부가 성공의 열쇠가 아니라 인큐베이터로 머물렀기에 가능했던 모델이다.
엔비디아도 비슷하다. 지금은 AI 연산의 필수 인프라가 된 GPU는 원래 게임용 그래픽 카드였다. AI 연구에 GPU가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은 우연히 발견되었다. 한 분자 시뮬레이션 연구자가 학교 슈퍼컴퓨터 대신 전자상가에서 산 GPU로 실험해 며칠 걸리던 계산을 몇 시간 만에 끝내며 GPU의 병렬처리 능력이 부각되었고, 엔비디아는 이를 바탕으로 CUDA 등 GPGPU 기술을 개발하며 AI 생태계를 선도하게 됐다. 정부가 할 일은 이런 우연한 발견이 가능한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성공은 예측 불가능하며, 따라서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용인하는 투자 문화가 필요하다.
정부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이런 투자 문화의 토대를 조성하는 것이다. 현재의 정부 R&D 과제나 공공펀드 평가 체계가 단기 성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지 않은지, 실패에 대한 문책이 과도하지 않은지, 정권 교체 시 장기 투자가 번복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는지 점검해야 한다. 스타트업의 약 90%는 결국 실패하며, 열 곳 중 두세 곳 성공하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투자라는 인식이 정착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국 NIH(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모델은 참고할 만하다. NIH는 단순한 기초과학 자금 지원을 넘어, 대학–병원–바이오 스타트업–VC를 잇는 생태계를 구성한다. 논문, 특허, 전임상 데이터가 기술이전 사무소(TTO)를 거쳐 창업이나 기술이전으로 이어지고, 이후 벤처투자로 연결된다. 정부는 바로 이 출발점을 조성해야 한다.
최근 2조5000억원 규모로 계획된 국가 AI 컴퓨팅 인프라 사업은 두 차례 유찰되었다. 100개가 넘는 기업이 관심을 보였지만 사업의 수익성 불투명, 정부의 51% 지분 구조 등으로 인해 참여가 저조했다. 이후 민간의결권 확대, 민간 위원장 중심 운영위원회 등의 보완안이 거론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부 주도 모델의 한계를 보여준다. 반면 SK와 AWS가 울산에 추진 중인 AI 데이터센터는 순수 민간 투자로, 2025년 8월 착공을 앞두고 있다. 정부는 주도자가 아니라 리스크 완화자로서, 민간 투자가 효율적으로 이뤄질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오늘날 정부는 더 이상 민간보다 정보 우위에 있지 않다. 과거처럼 정부가 전략 산업을 지정하고 집중 육성하는 방식은 유효하지 않다. 민간은 자기 자본과 생존을 걸고 혁신에 나서는 만큼 동기와 정보 모두에서 우위에 있다. 이런 고정 관념을 버리지 않고서는 AI 육성은 보여주기에 그치고 시장을 놓칠 것이다. 새 정부의 AI 전략은 이 관념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불확실성이 높아 투자 실패를 용인하고 민간의 자율적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투자 문화를 만드는 것과 함께, 정부가 해야 할 두 번째 일은 AI 인프라 확충이다. AI 산업의 기반은 전력·통신 등 대규모 인프라다. 초거대 AI 모델 학습에는 수십~수백 대의 GPU가 24시간 가동되며, 이에 따른 전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23년부터 2030년까지 AI 전력 수요가 연간 최대 50%씩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를 뒷받침할 스마트 전력망, 광대역 통신망 등은 민간이 단독으로 구축하기 어려운 공공재다.
스마트그리드는 IT 기술을 접목한 지능형 전력망으로, 생산–저장–소비를 실시간 제어한다. 한국도 제주에서 실증단지를 운영해왔지만, 전력망 확충과 현대화는 여전히 더디다. 국제에너지경제분석연구소(IEEFA)는 한국 전력망의 현대화 지연이 재생에너지 통합과 AI·반도체 산업 경쟁력에 치명적인 병목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정부는 전력 인프라·데이터센터 부지·위성통신(6G) 등 대규모 기반 투자에 나서야 한다.
AI는 단순히 돈을 쏟아붓는다고 성과가 나는 영역이 아니다. 국부펀드 조성과 R&D 확대는 출발점일 뿐, 그 자금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제도와 문화가 먼저다. 다양한 실패를 감수하고, 특정 기술에 과도하게 올인하지 않으며, 민간의 창의성을 살릴 수 있도록 제도를 유연하게 정비하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밑바탕, 즉 에너지와 통신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병행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정부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AI의 핵심은 데이터다. 그리고 데이터를 다루는 제도를 정비하는 일, 즉 ‘데이터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다.
예컨대 자율주행차의 문제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기존 제도와의 연관성, 그리고 사회적 수용성의 문제다. 자율주행 차량의 사고가 제조물 책임인지, 혹은 운전자의 책임인지 제도가 정착되지 않으면 보험 책임 역시 불분명하다. 이러한 제도적 불확실성은 사회적 수용성을 떨어뜨린다. 데이터 거버넌스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의 활용 가능성보다, 그것을 뒷받침할 제도가 신뢰와 확산의 기반이 된다.
AI 산업의 경쟁력은 인프라와 투자 생태계뿐 아니라 데이터를 신뢰할 수 있게 다루는 체계, 즉 거버넌스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특히 공공데이터 개방 확대, 데이터 주권 확립,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 간 균형은 AI 시대의 핵심 정책 과제다.
첫째, 공공데이터 개방은 단순한 양의 확대를 넘어, 수요자 중심의 고품질 데이터 제공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AI 학습에 실질적으로 활용 가능한 데이터셋을 민간에 개방하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 데이터 주권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다. 국가는 데이터를 안전하게 관리할 책임이 있지만, 민간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환경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 EU의 GDPR은 개인 권리 중심의 모델을, 미국은 민간 주도·자율 중심 모델을 취하고 있다. 한국은 이 사이에서 균형점을 모색해야 한다. 셋째,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활용의 조화다. 2020년 데이터 3법 개정으로 가명정보와 마이데이터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민간의 데이터 접근은 제한적이다. 안전장치를 갖춘 제도 설계로 신뢰를 높이고, 데이터 활용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신뢰 기반의 데이터 공유 시스템, 독립적 감독 기구, 알고리즘의 투명성과 설명 책임 제도 등 종합적인 데이터 거버넌스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와의 지속적 대화를 통해 사회적 합의 기반의 데이터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결국 AI를 키우는 토양은 자금과 인프라만이 아니라, 공개성과 안전성을 모두 갖춘 데이터 생태계다. 이것이 정부가 마주한 마지막이자 가장 복잡한 과제이며, 한국이 데이터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다.
이용우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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