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환 칼럼] 분단과 전쟁, 남과 북의 서로 다른 길

고유환 동국대 명예교수 전 통일연구원장
[고유환 동국대 명예교수, 전 통일연구원장]

우리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광복을 맞았지만 단일 생활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곧바로 분단됐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을 맞는 해이자 분단 80년이 되는 해이다. 남과 북이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분단국가를 수립한 이후 곧바로 전쟁을 치르고 지금까지도 정전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남과 북에 대립적인 두 정부가 수립된 이후 통일은 염원할수록 멀어지고 분단체제가 고착화됐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임을 선포했다. 제헌헌법(1948년 7월 17일 제정)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제4조)”고 규정하여 ‘흡수통일’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UN)의 결의에 따라 북한이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에 합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승만은 북한이 이를 수락하지 않는다면 통일을 위해서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화된다고 하면서 ‘북진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제헌국회도 만장일치로 ‘북진통일’을 지지했다.
이승만 정부는 분단정권 수립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얻어내기 위해서 ‘북진통일’을 주장했다가, 북한 남침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합법정부라는 주장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가 우리 영토라는 헌법 조항을 내세울 경우 ‘북진통일’과 ‘흡수통일’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보수 세력은 헌법의 영토 조항을 내세우고 ‘흡수통일’(‘자유의 북진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펴면서, 대한민국 헌법의 영토조항을 문제 삼으며 ‘보수정부나 민주정부 모두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의 통일을 목표로 정권붕괴와 흡수통일을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8월 14일자 김여정 부부장 담화에서는 대한민국이 “각종 침략적성격의 전쟁연습에 빠져있을 뿐만 아니라 잠꼬대 같은 《비핵화》를 염불처럼 외우며 우리 국가(북한)의 헌법을 정면부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 헌법의 3조 영토조항과 4조 평화통일조항 사이의 불합치 문제를 제기하거나, 북한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할 수 없는 조건에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는 데 따른 문제를 제기하며 ‘평화적 두 국가론’을 펴는 쪽도 있다. 우리 헌법의 영토조항은 통일을 대비하고, 탈북민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기에 헌법을 개정할 때 단서조항을 넣는 등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헌법과 현실 사이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온 논리가 남북관계의 이중성과 특수성을 감안하여 상황에 따라 신축적으로 헌법과 법률을 적용하거나, 대통령의 통치행위로 실정법을 초월한 대북·통일정책을 추진하기로 권능을 부여하고 있다.
1948년 9월 9일 38도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이 대한민국이 먼저 분단정권을 먼저 수립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인민정권’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하지만, 사실은 소련군정 시절인 1946년 2월 8일 조선로동당 주도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정권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분단정권 수립을 은밀히 진행해왔다. 정권수립일에 제정한 ‘인민공화국헌법’ 제103조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부(수도)는 서울시다”라고 규정하여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헌법적으로 명문화했다. 1972년 12월 27일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평양이다(제149조)”로 개정했다. 무력통일에 실패하여 서울을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조건에서 서울을 수도로 한다는 헌법조항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 미중 데탕트가 진행하는 가운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통일3원칙으로 합의하는 등 남북화해 분위기도 헌법상 수도를 변경한 배경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정권을 수립한 김일성은 표면적으로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 1950년 6월 25일 ‘민주기지노선에 따라 남조선해방전쟁(6·25전쟁)’을 감행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이 참전하면서 내전으로 시작한 ‘6·25전쟁’이 국제전인 ‘한국전쟁(Korean War)’으로 비화했다.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분단 이후 곧바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한국전쟁을 치름으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갈래의 적대관계가 형성됐다. 남북사이의 불신은 깊어지고 정전협정에 기초한 질서가 ‘정전체제’로 굳어졌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지 못하고 북미 적대관계를 지속함으로써 북한은 핵개발의 동기를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에 찾고자 했다. 한국이 소련(러시아), 중국과 수교한 데 비해, 북한은 미국, 일본과 적대관계를 해소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중이 전략경쟁을 본격화하고 있어 한반도문제는 미중갈등의 하위체제로 편입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분단정권 수립 이후 남과 북은 서로 대조적인 발전전략을 채택했다. 남한은 ‘수출주도형 산업화’ 발전전략을 통해서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반면에 북한은 ‘자력갱생’ 발전전략을 고수함으로써 저개발국에 머물고 있다. 지금의 북한은 대한민국을 배제·무시하고 러시아와 손잡고 ‘실패국가’에서 벗어나려 한다. 북한은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를 도입하기보다는 권위주의 편에 서서 자력갱생으로 생존을 모색하려 한다. 북한이 ‘실패국가’로 남지 않으려면 사상이론적 조정을 통해서 ‘포용국가’로 정책전환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분단국가임에도 대한민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고 한국문화(K-culture)가 세계문화를 선도는 문화강국이 됐다. 이제 대한민국은 스스로 ‘글로벌 선도국가’, ‘글로벌 중추국가’, '글로벌 리더'라고 부르는 시대가 됐다. 남북 사이의 체제경쟁에서 지면 ‘적화통일(공산화통일)’ 당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동력이 됐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미국이 끌고, 북한이 채찍질하여 압축적으로 성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전 통일연구원장 ▷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전 청와대 안보실 정책자문위원장 ▷현 국회 한반도 평화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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