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왕휘 아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2일 57개국에 대해 상호관세를 부과하였다. 8월 말까지 협상을 완료한 국가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EU는 최종안을 완성하였으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일본, 파키스탄, 필리핀, 영국, 베트남은 관세율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후 실무 협상을 통해 세부 사항을 조율하고 있다. 미국의 3대 교역국인 중국, 멕시코는 물론 인도태평양전략의 핵심인 인도와는 협상이 진행 중이다.
EU, 일본, 우리나라가 미국과 합의한 내용의 공통점은 ‘시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자본을 투자하라' 는 시장환자본으로 요약될 수 있다. 관세율을 15%로 인하하는 대가로 미국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라는 것이다. 막대한 내수시장을 협상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시장 줄 테니 기술 달라'라는 중국의 시장환기술(市場換技術)과 일맥상통한다.
세 국가는 트럼프의 시장환자본 전략을 거부하기 매우 어렵다. 첫째, 대미 무역흑자이다. 2024년 기준 EU, 일본, 한국의 흑자 규모는 각각 2,360억, 630억, 556억 달러였다. 대미 수출이 줄어들면 무역수지가 악화될 것이다. 둘째, 주력 산업인 자동차의 대미 수출이다. 작년 EU, 일본, 한국은 각각 757,654대(455억 달러), 1.37백만 대(492억 달러), 1.54백만 대(347억 달러)를 각각 미국으로 수출했다. 자동차 품목 관세가 25%로 인상된 후부터 미국 내 판매량이 전년 대비 10% 이상 감소하였다. 셋째, 미국의 안보 공약이다. 세 나라 모두 군사 동맹국인 미국에 군사 안보를 크게 의존하고 있다. 어느 국가도 주둔 미군의 지원 없이 중국과 러시아의 위협을 차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국, EU, 일본 모두 상호관세를 15%로 내렸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시장환자본 전략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었다. 먼저 EU는 항공기, 화학제품, 특정 복제약, 반도체, 농산물, 핵심 원자재 등 전략 품목에 상호 무관세를 적용하도록 미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EU가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보복능력이다. 관세 협상의 실패에 대비해 EU는 950억 유로 규모의 보복관세 목록과 함께 특정 제품의 수출 제한 등을 준비해 놓았었다.
EU는 미국에 트럼프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8년까지 6,000억 달러의 투자와 함께 7,500억 달러 이상의 미국 에너지자원과 무기 수입을 약속하였다. EU 기업의 대미 FDI가 연평균 1,800억 달러라서 3년 내 6,000억 달러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백악관의 설명대로 기존에 약속한 FDI가 이번 합의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EU가 이 목표를 완수하는 것은 쉽지 않다. EU의 투자금은 직접적인 현금 지원이나 정부 예산 배정이 아니라 기업의 프로젝트에 기반을 둔다. 즉 EU가 아니라 유럽 기업이 책임을 부담하는 것이다. 유럽 기업의 투자가 부진하면, 트럼프는 관세율을 35%까지 올리겠다고 위협하였다.
일본의 대미협상 결과도 EU와 유사하다. 일본은 관세를 15%로 인하하는 대신 미국의 에너지 인프라, 반도체, 핵심 광물, 의약품, 조선 산업에 5,5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합의하였다. 일본 역시 투자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민간기관이다.
관세율의 계산 방식에 대해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미국은 일본산 자동차에 대해 기존 2.5%에 15%를 더한 17.5%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일본은 기존 관세와 관계없이 모든 제품에 15% 관세가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미국은 기존 관세에 15% 관세율을 추가하는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일본은 EU처럼 15%를 적용해 달라고 미국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또한 투자 수익의 배분에 대해서도 양국 사이의 견해차가 크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일본에 수익의 90%를 가져가겠다고 통보하였으나,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담당상은 이에 대한 언급을 거부하였다.
한국도 EU와 일본과 비슷한 조건으로 미국과 타협하였다. 한미 FTA 체결 이후 실효 관세율이 1% 미만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5% 관세율은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다. 그러나 주요 경쟁자인 EU와 일본과 미국 시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나쁘지만은 않다.
한국의 대미 투자 규모는 3,500억 달러이다. 한국의 투자 방식은 대출, 보증, 직접투자 등 혼합되며, 정부가 아닌 기업이 주도한다. 러트닉 장관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미 투자의 수익의 90%를 미국이 차지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투자 펀드는 반도체, 원자력, 조선, 배터리, 의약품, AI, 퀀텀 컴퓨팅 등 전략 산업의 육성에 사용된다. EU와 일본과 가장 다른 점은 전체 투자금 중 1,500억 달러가 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 MASGA) 전략을 위한 '한미 조선 협력 펀드'에 할당되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시장환자본 전략에 대한 세 국가의 대응을 획일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투자 내용, 투자 방식, 투자 수익 배분 비율 등이 국가별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투자 규모는 EU와 일본에 비해 크다. 대규모 대미 투자가 제조업 공동화와 양질의 일자리 유출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대미 투자를 한미 제조업 르네상스 파트너십으로 승화시킨다면, 우리 기업이 미국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난달 25일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에서 양국 기업은 조선, 원자력, 항공, LNG, 핵심광물 등 5개 분야에서 11개 계약과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중 가장 주목은 받은 산업은 조선이다. 1,500억 달러 규모의 MASGA 전략은 우리나라의 조선·방위 산업이 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또한 원자력 협력은 우리 기업의 해외 공사 수주는 물론 한미 원자력협정의 개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한미 제조업 르네상스 파트너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실무 협상을 잘 마무리해야 한다. 협상 결과를 정리한 공식 문서가 없어 양국 사이의 합의가 번복되거나 변경될 수도 있다. 한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미국 상무부 산업보안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부여한 검증된 최종 사용자(VEU) 지위를 철회하였다. 이러한 문제의 재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정상회담의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돌발 상황에 더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이왕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외교학과 ▷런던정경대(LSE) 박사 ▷아주통일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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