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네 리뷰] 편견을 지우니…'세계의 주인'

"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우리는 종종 타인에게 '그 답게' 행동하길 원한다. 상처 입은 사람은 조용히, 얌전히, 약자로 머물러야 한다는 어떤 시선 속에서 분노하면 과하다고 비난하고, 웃으면 태연하다고 의심한다. 편견의 촘촘한 그물은 타인을 규정하려는 우리의 욕망에 더 가깝다.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은 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이 얼마나 쉽게 폭력이 되는지 "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치열한 분투가 필요한지를.

열여덟 소녀 '이주인'(서수빈 분)은  반장이자 모범생, 친구들 사이에서는 분위기 메이커다. 연애 이야기로 설레고 친구들과 쇼츠를 찍으며 깔깔거리는 평범한 10대 소녀다. 

어느날 '주인'은 전교생이 참여하는 한 서명운동 앞에 홀로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낸다. 서명운동의 중심 축인 '수호'(김정식 분)는 '주인'을 설득하려하지만 결국 실랑이가 말싸움으로 번지고 만다. 순식간에 반 아이들의 눈총을 받게 된 주인. 그날부터 그 앞에 배달되는 익명의 쪽지는 단단해 보이던 '주인'의 세계를 흔든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사진=㈜바른손이앤에이]

6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온 윤가은 감독은 여전히 섬세한 연출력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이야기를 정밀하게 설계하고, 인물들의 시선과 내면을 내밀하게 매만진다. 전작 '우리들', '우리집'이 1인칭에 가까운 시선으로 인물의 감정선을 밀착해 따라갔다면, '세계의 주인'은 한걸음 물러서 객관적으로 인물의 얼굴을 바라본다. 인물의 흔들림을 포착하되 선악을 규정하거나 몰아붙이지 않는 태도 또한 인상 깊다. 윤 감독은 '주인'을 둘러싼 인물들의 시선과 공간을 세밀하게 겹쳐놓으며 관객 역시 섣불리 시선을 '규정'하지 않게끔 이끈다.

시각적 구성 역시 흥미롭다. 휴대폰 화면처럼 수직으로 찍힌 영상, 저해상도의 이미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쪽지 등을 배치하며 낯선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장치들은 인물의 감정과 세계의 균열을 감각적으로 환기하며 현실과 스크린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문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는 쪽을 택하며 과잉된 설명을 지우고 관객 스스로가 감정을 읽어낼 수 있도록 한다. 이 '여백'들은 되려 윤 감독의 문법이 더욱 확장되었다는 인상을 남긴다.

'주인'을 연기한 배우 서수빈은 단연 눈부시다. 평범한 소녀 '주인'으로서 그가 겪는 작은 감정 하나 하나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열여덟 살 소녀가 겪는 작은 단위의 감정들을 솔직하고 가감 없이 표현해냈다. 올해 가장 반가운 발견이다. 주인의 엄마 '태선'을 연기한 장혜진은 윤 감독이 세세하게 일러주지 않는 '공백'들을 베테랑 답게 채워냈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아이들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 관계의 미세한 온도를 정직하게 기록하는 점은 윤가은 감독의 인장과도 같다. '세계의 주인' 역시 '주인'을 비롯해 '수호', '유라'(강채윤 분), '해인'(이재희 분) 등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상처와 회복, 두려움과 용기 같은 감정의 결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속에서 어른보다 더 정직한 감정의 진동을 길어 올린다. 

동시에 작품은 타인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다시 점검하길 요청한다. '이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을 재단하지 말 것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 것. 누군가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누군가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윤가은 감독의 시선은 그 두 축 위에서 단단해진다.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앞서 윤 감독은 시사회 전 취재진에게 "인물 중심과 줄거리에 대한 핵심적 정보 없이 관람할 때 더 큰 영화적 재미를 느끼고 새로운 이해가 가능한 구조로 진행된다"며, 관객들이 '주인'의 세계로 직접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인물의 과거에 대한 언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말처럼 이 영화는 '사건'보다 '감정', '이해'보다 '체험'에 집중한다. 타인을 규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시 해석할 용기를 되찾는 일. 편견의 문장을 조금씩 지우고 자기 문장으로 다시 서는 일. '세계의 주인'은 그 시작을 영화로 보여준다. 그러니 관객들 역시 설명보다 감정으로 해석보다 시선으로 '주인'의 세계를 함께 느껴보길 바란다.

한편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플랫폼'에 공식 초청 되고 제9회 핑야오국제영화제 로베르토 로셀리니상 심사위원상, 관객상을 받은 '세계의 주인'은 오는 22일 극장 개봉한다. 관람 등급은 12세 이상, 러닝타임은 120분이다. 
 
영화 세계의 주인 포스터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영화 '세계의 주인' 포스터 [사진=㈜바른손이앤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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