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만들기 전에 미리 국민에게 알리고 의견을 반영하는 '입법예고제' 도입에 앞장선 '행정법의 대가' 박윤흔(朴鈗炘) 전 환경처 장관이 지난 9월 24일 오전 4시 1분께 향년 90세를 일기로 강남성모병원에서 별세한 것으로 23일 알려졌다. 박 전 장관이 세상을 떠난 사실은 가족과 김용섭 전 한국행정법학회장이 뒤늦게 언론에 전했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공무원 시험을 거쳐 1961년 5월 내각사무처 법제국(현 법제처)에 발령됐다. 회고록 '도약의 시대를 함께 한 행운'(2014)에서 그는 "법학 공부를 계속해 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법제처는 상당수가 학자였고, 업무 성격상 법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서 내겐 행운이었다"고 적었다. 1969년 총무과장, 1970년 법제관을 거쳐 1981∼1988년 법제처 차장을 지냈다.
박 전 장관은 법제처 근무 중 1983년 대통령령('법령안 입법예고에 관한 규정')으로 입법예고제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대다수 공무원이 미리 국민에게 알리면 '정책 수행의 효율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법안을 비밀로 여길 때였다. 그 결과 회고록에 적은 것처럼 "직접적인 이해관계인조차 어떤 입법이 추진되는지 전혀 알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고, 심지어 법령이 공포·시행된 후에도 홍보 미흡으로 내용을 알지 못"했고, "법령안 내용을 알아내서 보도하려는 기자들과 법제처 직원 간에 매일 같이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졌고, (언론에 보도된) 법령안의 내용이 매우 중요할 때는 (법제처가) 정보기관의 보안감사를 받는 일"까지 있었다.
그는 1971년 미국 UC 버클리대 대학원에서 유학하며 '미국 행정절차법상의 입법예고절차'라는 논문을 쓴 걸 토대로 1983년 6월 정식 법률이 아니라 대통령령으로 입법예고제를 도입했다. 법안 전체가 아닌 입법취지와 주요 내용만 예고하게 했고, 입법예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조항을 포괄적으로 설정했다. 이에 대해 회고록에서 "새 제도를 도입할 때 처음부터 완벽한 제도를 채택하려고 하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도입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많다"며 "불완전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제도로 우선 출발하고 나중에 바꾸어 가는 게 현명하다"고 설명했다. 가까스로 시작한 입법예고 건수는 1983년 6개월간 12건에서 1984년 72건, 1990년 269건, 1997년 610건으로 꾸준히 늘었고, 1998년 '행정절차법'으로 정식 시행됐다.
법률상 의무를 어긴 기업에 사업 취소나 사업 정지 명령을 부과하는 대신 각종 과징금을 부과하기 시작한 것도 고인이었다. 1981년 12월31일 '자동차운수사업법'을 개정할 때 처음 채택했다. 또 김영균(1929∼2024) 법제처장과 힘을 합쳐 행정법령에 대한 정부 유권해석권을 법무부에서 찾아왔고, 총무처로부터 소원업무를 넘겨받아 오늘날의 행정심판제도로 발전시켰다.
그는 4공화국(유신헌법)과 5·6공화국 헌법 제정에 실무자로 관여했다. 5공화국 헌법 제정 시 개헌심의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개헌 후 정부가 4공화국이냐 5공화국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을 때 "5공화국으로 봐야 한다"는 개인 의견을 말했다가 언론에 크게 보도됐고, 신군부도 관심을 가져 '5공화국'으로 굳어졌다는 후일담을 남겼다. 현행 6공화국 헌법 제정 시에는 자문위원이었는데 23조에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라는 문구를 넣어 보상법률주의를 명문화했다. 김 전 학회장은 "보상은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만큼 법원 판결이 아니라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유신헌법이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제5공화국 헌법 제정에 직접 참여했기 때문에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닌지 의문이 생겼다"며 "공무원은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라의 발전은 고통 없이 단번에 이뤄질 수 없으며 시련의 과정을 거치며 더 강하게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주어진 업무에 열심히 매달렸다"고 썼다.
사무관 시절에 '입법기술강좌'라는 저서를 출간한 고인은 1985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88년부터 경희대 법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직후인 1991년 11월 한국공법학회 학술대회에서 '금강산·설악산 관광단지 남북한 공동개발을 위한 공법적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 금강산 관광사업의 법적 기초를 제공했다.
1974년에 고인이 처음 펴낸 '최신 행정법강의 상·하권'은 2013년 개정 31판을 간행하며 대표적인 행정법 교과서 중 하나로 여겨졌다. 회고록에서는 "최신 행정법 강의 상·하권을 (저술한 것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법제처 재직 중 환경보전법 등 환경법 분야를 개척했고, 1991년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 1992년 한국환경법학회장을 거쳐 1993∼1994년에는 환경처 장관으로 일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에 이어 장관 취임 직후 낙동강에서 벤젠 등 발암성 물질이 검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새 제도를 여러 건 도입해 '제도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토지보상법연구회를 만들어 2000∼2016년 회장을 지냈다.
불교도이면서도 1996∼2000년 이영식(1894∼1981) 목사가 설립한 대구대 총장으로 있으면서 학내 분규 수습에 힘썼다. 2001∼2004년 남도학숙 원장, 불교계 단체인 한국불교대원회 이사장, 2019∼2021년 학교법인 영광학원(대구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2022년 저서 '법과 나라발전 : 한국헌법약사(헌법이 뒷받침한 중화학공업화)'를 추가했다. 2015년 고인의 업적을 조명한 논문을 쓴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고인은 한국 행정법학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며 "관료와 학자를 병행한 부지런한 분이셨고, 따뜻한 큰 어르신이기도 했다"고 했다.
유족은 1남 3녀(박시은·박용선·박용주·박인양) 등이 있으며, 고인은 분당메모리얼파크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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