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 찻잔 그림자에서 시작된 예술, 빈센트 발의 '쉐도우 올로지'

빈센트 발은 우리가 지나쳐온 그림자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 찻잔의 그림자가 코끼리가 되고, 감자칼이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며, 일상의 사소한 물체들이 잠시 생명을 얻는 순간. 빈센트 발은 그 찰나를 붙잡아 ‘쉐도우올로지(Shadowology)’라는 이름을 붙였다.
2016년 5월, 시나리오 작업 도중 우연히 마주한 찻잔의 그림자에서 시작된 이 작업은 애초에 거창한 계획이 아니었다. 재미 삼아 올린 한 장의 이미지, 친구들의 웃음, 그리고 ‘하루에 하나씩, 100개만 해보자’는 가벼운 목표. 그러나 그 가벼움은 멈추지 않았고,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손과 시선은 여전히 그림자를 더듬고 있다.
쉐도우올로지는 회화도, 사진도, 조각도 아니다. 동시에 그 모두이기도 하다. 약간의 그림, 약간의 사진, 약간의 엉뚱함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이 작업은 ‘잘하는 것 하나’보다 ‘조금씩 할 수 있는 것들의 결합’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준다. 그는 결과보다 물체에 집중하고, 의미를 강요하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우연을 받아들인다.
이 인터뷰는 한 예술가의 작업 과정을 넘어, 상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기록이다. 영감은 어디서 오는지, 왜 긴장이 풀린 순간에 더 잘 떠오르는지, 그리고 왜 작은 낙서와 장난 같은 시도가 결국 가장 멀리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쉐도우올로지스트, 영화감독, 교사,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빈센트 발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세상을 얼마나 열어두고 바라보고 있는가.
그는 말한다. 세상은 여전히 볼 것이 많다고, 경이로움은 거창한 곳이 아니라 바로 발밑에 드리운 어둠 속에 숨어 있다고. 그리고 삶은 순수한 비극이 아니라, 웃음을 품은 비극적 코미디일지도 모른다고.

 
쉐도우 올로지스트 빈센트 발 사진 김호이 기자
쉐도우 올로지스트 빈센트 발 [사진= 김호이 기자]

‘쉐도우 올로지스트’가 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2016년 5월에 쉐도우 올로지스트를 시작됐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중 종이 위에 비친 찻잔 그림자가 코끼리처럼 보였다. 펜으로 눈과 다리를 그려 넣고 사진을 찍었다. 그 이미지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더니 친구들이 재미있어했다. 그래서 매일 하나씩 ‘그림자 생명체’를 찾아보기로 했다. 목표는 100개였다. 하지만 거의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고 있다(하하).
 
찻잔 그림자를 코끼리로 본 순간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감각은 어디서 깨어난 것이라 생각하나
- 나는 늘 구름이나 벽의 얼룩, 그림자 속에서 얼굴이나 형상이 보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거다. 게다가 나는 항상 낙서를 한다. 회의가 끝나면 종이에 작은 그림들이 가득하다. 손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을 때 집중이 더 잘 된다. 시나리오 작업은 매우 힘들어서 자꾸 도피하고 싶어지고, 설거지나 책장 정리가 매력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작은 코끼리가 탄생한 것 같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처음 작업을 올렸을 때의 반응에 놀랐다고 했다. ‘이게 나의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겠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
- 첫 해는 구름 위에 있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창작 출구를 찾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쉐도우올로지는 내가 조금씩 할 수 있는 것들을 결합한다. 그림도 조금, 사진도 조금, 엉뚱한 캐릭터도 조금 만든다. 각각은 뛰어나지 않지만, 합쳐지면 부분의 합보다 더 큰 결과가 나온다.
 
물체를 돌려보며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 ‘구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영감이 오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 작곡가 프랭크 자파가 한 말이 있다. 마음은 낙하산과 같아서 열려 있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다. 쉐도우 올로지도 마찬가지다. 그림자가 아파트처럼 큰 것이 될 수도 있고, 개미처럼 작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긴장이 풀린 상태여야 한다. 마음은 백지 같아야 한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억지로 의미를 만들려 하면 결과는 좋지 않다.
 
영감은 무의식에서 나온다고 믿는다고 했다. 무의식을 깨우는 환경이나 리듬은 무엇인가
- 편안해야 한다. 나는 익숙한 음악을 틀어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작업을 비판하는 뇌의 한 부분을 음악으로 속이는 느낌이다. ‘이건 별로야’라고 말하는 부분이 바빠지면, 창의적인 부분이 편안하게 작동한다.
이상적인 상태는 막 잠에서 깬 몽환적인 순간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연결이 쉽게 생긴다.
 

새로운 물체를 발견할 때 ‘이건 될 것 같다’는 감이 오나, 아니면 우연과 실험인가
- 알 수 없다. 그림자의 매력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빛에 따라 물체와 전혀 다른 형태가 나온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안 보이고, 일주일 뒤에 다시 보면 갑자기 보이기도 한다.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과학적 과정이 아니라 약간의 마법이다.
‘감자칼 피아노 협주곡’은 처음엔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됐다. ‘뜨거운 것이 좋아’ 마지막 대사처럼, 작가들은 대수롭지 않게 넣었지만 명대사가 되기도 한다. 결국 알 수 없다.
 
‘결과보다 물체에 집중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물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 결과에 집착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과정을 믿고 만드는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상상력은 무한하고 완벽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보이는 그림자 주위에 몇 줄만 그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최종 작품은 얼마나 본인의 창작인가
- 어려운 질문이다. 결국 상상으로 그림자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므로 100% 창작이라 생각한다. 스튜디오에서는 조명도 배치하고 사진도 직접 찍는다. 셰도우올로지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변형의 예술이다.
뒤샹이 소변기를 뒤집어 ‘샘’이라 부른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를 그와 같은 예술가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예술가의 가장 큰 도구는 뇌라고 생각한다.
 
그림자 작업 이후 세상을 보는 시각은 어떻게 달라졌나
-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유머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위로가 됐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브라질이든 인도든 웃음의 지점은 비슷하다.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원래 공상가이자 낙서꾼이었고, 셰도우 올로지는 그런 습관을 정당화해줬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왜 ‘쉐도우올로지스트’라는 이름을 선택했나. 그 단어가 담은 세계는 무엇인가
- 처음부터 이름을 만들고 싶었다. ‘쉐도우그래픽’을 생각했지만 프린스의 ‘뮤직올로지’를 듣고 ‘쉐도우올로지’가 떠올랐다. 진짜 학문처럼 들리지만 매우 놀이적이다. 발음하기 어려운 줄은 몰랐다.
이 단어에는 19세기적 호기심과 낙관이 담겨 있다. 그림자의 세계를 탐험한다는 감각이다. 모든 과학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여러 역할 중 ‘쉐도우올로지스트’는 정체성에서 어느 위치인가
- 아주 높다. 교사와 영화감독, 작가는 많지만 쉐도올로지스트는 많지 않다. 작은 재능들이 모여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점이 기쁘다.
 
협업 예술인 영화와 혼자 하는 그림자 작업은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나
- 음과 양 같다. 영화는 협업의 즐거움이 있지만 긴 시간과 승인 과정이 필요하다. 그림자 작업은 설명 없이 직관적으로 만들 수 있다. 조명과 종이, 펜만 있으면 된다. 두 시간 후 바로 공개할 수도 있다.
최근 공동 연출한 애니메이션 영화 ‘미스 목시’는 수년이 걸렸지만, 지금은 세 시간 만에 작업을 끝낼 수 있어서 좋다.
 
그림자 작업이 영화적 시선에 영향을 줬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영화는 구조와 논리가 중요하다. 그림자 작업은 훨씬 자유롭다. 시와 소설의 차이 같다.
 
쉐도우올로지스트, 영화감독, 사람으로서의 빈센트 발은 어떻게 다른가
- 약간의 다중성은 좋다. 쉐도우올로지스트로서는 내향적이고 영화감독으로서는 외향적이다. 촬영 현장에서는 늘 흥분 상태다. 그림을 그릴 때는 일정도 없고 음악과 그림자 작업만 한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벨기에 예술 전통 중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감각은 무엇인가
- 벨기에는 작은 나라이고 언어도 널리 쓰이지 않는다. 언더독의 유머가 있다. 슈퍼히어로 대신 땡땡이를 만들었고, 달리의 과장 대신 마그리트의 절제를 가졌다. 유머와 상상이 공존한다.
 
매달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고 했다. 음악의 역할은 무엇인가
- 음악은 나를 편안하게 하면서도 에너지를 준다. 집에 있는 느낌을 줘서 새로운 탐험이 가능해진다. 가끔 막힐 때는 음악이 거슬려 끄기도 한다.
 
햇빛보다 조명을 더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 태양은 움직이지만 조명은 시간을 멈춰준다. 복잡한 작업이 가능하다. 다만 햇빛 그림자의 선명함은 여전히 최고다.
 
사라지는 그림자의 덧없음이 작업을 더 자유롭게 만들었나
- 그림자는 사라지지만 사진과 영상은 순간을 영원히 붙잡는다. 영화 촬영에서 좋은 테이크를 얻었을 때와 같다.
 
전시장에서 관객의 어떤 표정을 가장 유심히 보나
작품을 이해하는 순간의 미소다. 제목을 보고 다시 웃을 때가 특히 좋다. 그 표정들이 큰 보람이다.
 
사진 김호이 기자
[사진= 김호이 기자]


전시, 소셜미디어, 책 중 자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 각각 장점이 있다. 전시는 내 머릿속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소셜미디어는 나쁜 뉴스 사이에 등장할 수 있다. 책은 냄새가 가장 좋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고 했다. 가장 작은 첫걸음은 무엇인가
- 도구를 꺼내는 것이다. 종이든 카메라든 기타든 그냥 시작하라. 영감을 기다리지 말라. 재미로 하는 행위에서 아이디어는 자란다.
 
모방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 영향은 자연스럽다. 배움을 위한 모방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이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과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것을 하라.
 
빈센트 발이 전하는 메시지 사진 김호이 기자
빈센트 발이 전하는 메시지 [사진= 김호이 기자]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감각을 유지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 경이로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 계속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학생들의 에너지는 나를 지치게 하면서도 충전시킨다.
 
그림자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 세상을 즐기고 어디에서나 경이로움을 보라는 것이다. 삶을 순수한 비극이 아니라 비극적 코미디로 보라는 것이다.
 
상상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다른 관점을 연결하는 힘이다. 경계를 허물고 세상을 넓힌다.
 
마지막으로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말씀 해달라
- 침략이나 살인이 아니라면 모두 찬성이다.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아도 작동한다.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삶을 밝힐 수 있다.
빈센트 발 작가와 사진 김호이 기자
빈센트 발 작가와 [사진= 김호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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