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혜의 C] 주입된 모성·원주민 정체성… 구멍 속 '나'를 끄집어 낸다

  • 아라리오갤러리 이은실 개인전 '파고' VS 국제갤러리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Wake)'

  • 이은실 개인전 '파고' 첫 아이 출산때 겪은 환각을 龍으로 용암·소용돌이 등 자연풍 광에 빗대

  • 다니엘 보이드 '피네간의 경야' 가해자 관점의 호주 원주민 역사만화 신화가 형성되는 과정에 던지는 질문




이은실 개인전 파고 전시 전경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이은실 개인전 '파고' 전시 전경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이 시련을 혼자 겪으면서 그녀는 자기 혼자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섯째 아이, 민음사, 61쪽)
 
TV 광고나 드라마는 막 출산한 여성이 세상으로 나온 신생아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담곤 한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는 이러한 모성이 사회가 주입한 신화일 수 있다고 말한다. 출산의 폭풍이 남긴 상흔이 가시지 않은 주인공이 몸을 겨우 일으키고 본 아이의 첫인상은 외계인에 가깝다. 젖을 물릴 때는 감동보다는 육체적 고통이 앞선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악마의 씨>도 임신한 주인공을 통해 사회가 신성화하는 모성을 공포 소재로 바꾼다. <다섯째 아이>와 <악마의 씨> 속 주변 인물들은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여주인공을 예민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출산을 겪은 여성이라면 알 수 있다. 악마의 씨든 사람의 씨든,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애써도 뱃속에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을 때 느꼈던 좌절감이란. 
국제갤러리 K3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설치전경 사진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K3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설치전경 [사진=국제갤러리]

사회에 뿌리내린 신화와는 결이 다른 개인 혹은 집단의 경험을 불러내는 두 개의 전시가 눈길을 끈다. 하나는 아라리오갤러리가 선보인 이은실 개인전 '파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제갤러리가 선보이는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Wake)'다. 이은실은 출산을 둘러싼 사회적 규범에, 다니엘 보이드는 호주 원주민을 향한 단일화된 서사에 구멍을 내고 '나'를 끄집어낸다. 말하지 못했던 경험과 감정, 혹은 기록되지 못했던 것을 펼친다.
 
이은실은 지난 16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출산'을 주제로 전시를 열게 된 배경으로 우리 삶에 굉장히 가까이 있지만, 다루지 않는 이야기를 말하는 태도를 꼽았다. 
 
"출산은 보통 삶의 한 부분이죠. 아이를 낳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좋은 일이기에 굉장히 축하하죠. 그런데 그 속엔 다층적인 이야기들이 있잖아요. 제가 경험하고 본 것을 기반으로 얘기를 풀었어요. 우리 머릿속의 획일화된 이미지와 개념으로만 있는 것들을 실제 겪은 사람들과 얘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되돌아보다
이은실의 작품들을 보면, 출산이 스테이지 클리어형 게임처럼 느껴진다. 신화 속 용과 거대한 자연 앞에 혈혈단신으로 선 인간, 고군분투 끝에 가까스로 다음 스테이지에 진입했지만, 앞으로 깨야 할 단계는 산더미. 더구나 전투에서 치명적인 상처까지 입었다. 다음 스테이지로 나갈 마음은 굴뚝 같은데 몸이 영 따라가지 못하는 안쓰러운 용사를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면서 동시에 ‘나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하고 위로를 얻는다.
이은실 LEE Eunsil 에피듀럴 모먼트 Epidural Moment 2025 Ink and color on paper 244 x 720 cm 244 x 180 cm x 4 ea
이은실 LEE Eunsil, 에피듀럴 모먼트 Epidural Moment, 2025, Ink and color on paper, 244 x 720 cm (244 x 180 cm x 4 ea.)

이은실은 첫 아이 출산 시 무통 주사를 맞았을 때 겪은 환각을 용이 골반을 뚫고 지나가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에피듀럴 모먼트’는 언뜻 보면 용이 구름을 뚫고 하늘로 승천하는 태몽을 표현한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골반 등 곳곳에 해체된 뼈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진통제가 주입되면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환상 속에 있게 되죠. ‘소중한 존재가 태어났으니, 축하해’와 같은 사회적 주입도 마취제와 같은 작용을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여성이 임신·출산으로 생사의 기로를 왔다갔다하는 위험한 상황에 놓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죠. 평소엔 조금만 피가 나도 놀라면서, 엄청난 피를 쏟아내는 출산은 일상처럼 지나가는 일이 많더군요.”
이은실 개인전 파고 전시 전경 사진아라리오갤러리
이은실 개인전 '파고' 전시 전경 [사진=아라리오갤러리]

그는 출산 후 출혈을 용암으로(멈추지 않는 협곡), 진진통이 오기 전의 상태를 수면 위 커다란 소용돌이로(전운) 표현하는 등 출산 과정을 자연 풍경에 빗댔다. 또한 실핏줄이 터진 눈(고군분투), 복부 절개 부위의 수술 자국(절개)과 튼살(흔적), 산후 유선염(넘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태도) 등 출산의 흔적과 모성애를 따라가지 못하는 신체의 한계도 짚었다.
 
이은실은 첫 출산을 겪은 후 한참 뒤에나 이를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유하고 찾아보고 난 뒤에야 바라볼 수 있었죠. 출산 바로 직후엔 감당이 안 됐어요."
관점을 열다
호주 케언즈 원주민 혈통인 다니엘 보이드는 자신이 속한 뿌리에 대한 서구의 단일서사에 구멍을 낸다. 하나로만 이어진 줄기 혹은 꽉 막힌 공간에 구멍을 숭숭 뚫어 산소를 주입하고, 여러 줄기의 서사가 뻗어나가도록 한다.
국제갤러리 K3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설치전경 사진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K3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설치전경 [사진=국제갤러리]

특히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설치작 ‘Untitled(PCSAIMTRA)’는 관객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여, 우리가 살아온 역사 혹은 신화를 다각화된 관점으로 바라볼 기회를 준다. 관객들은 거울과 거울 표면의 점, 그리고 자신의 몸이 살포시 겹치면서 나타나는 일렁임을 통해 선택된 이야기와 감춰진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다. 또한 관객 각각이 보는 거울 속 모습이 제각각이듯, 호주 원주민의 역사 역시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다니엘 보이드는 “작품을 보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거울 앞에 서서 작품을 보면 자기 자신과 작품 사이에 어떤 교환이 일어나죠. 관객이 작품을 봄으로써 표면이 활성화하고, 각각이 개인적인 경험을 갖게 돼요. 관객들이 작품 앞에서 추는 춤 혹은 동작은 표면과 우리 몸이 맺는 관계와도 비슷해요. 이 경험의 주인이 누구냐고 질문을 던지는 거죠.”
 
그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 다수는 1958년 호주 정부가 제작한 아동용 학습 만화 ‘The Inland Sea’를 기반으로 한다. 이 만화는 호주에 정착한 식민주의자들이 호주 대륙 내에 바다가 존재한다는 신화를 믿고 내해(inland sea)를 찾아다니는 내용이 골자다.
국제갤러리 K3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설치전경 사진국제갤러리
국제갤러리 K3 다니엘 보이드 개인전 '피네간의 경야' 설치전경 [사진=국제갤러리]

다니엘 보이드는 이를 통해 역사가 교육되는 방식과 신화가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교육 목적으로 만들어진 만화 속 이미지들이 암시하는 바를 확장하고자 해요. 이 이미지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고, 과거에 만들어진 것들을 지금의 시점에서 어떻게 하면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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