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시리즈 4] 호암 100년과 삼성의 새로운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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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2-1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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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각기 주어진 길이 있다.

누구도 대신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만이 걸을 수 있는 그리고 두 번 다시 걸을 수 없는 길. 때론 올라서기도 하지만 한없이 내려가기도 하는 좁고도 넓은 변화무쌍(變化無雙)의 길.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순환하는 파노라마의 길. 왜 걸어야 하는 지, 어디까지 가야하는 지, 잘 알지도 못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길. 여기에다 옆 사람의 길을 의식하거나 뜻을 세우고 큰 길을 걸으려고 하면 길가의 봄 바람은 금세 사라지고 찬 바람이 그 길을 가로막아 서기도 한다.

희로애락의 대표적인 인생 길은 매 순간 흥망(興亡)을 번민하는 큰 상인들의 길 일 것이다. 기업보국(企業報國)의 큰 뜻을 품고 60년 넘게 숨 가쁘게 달려온 한국 기업가들의 삶은 인생 파노라마 그 자체다. 본디 기업가란 고독한 존재다. 역경에 부딪혀 자칫 마음을 접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숱하게 벼랑 끝의 상황과 마주쳐 쉴 새 없이 사색하고 번민하게 마련이다. ‘경영의 신(神)’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마쓰시다 고노스케(松下幸之助 · 1894~1989, 마쓰시다그룹 창업자)는 일본 교세라 그룹 이나모리 가즈오(稲盛 和夫 · 78, 교세라 명예회장)의 초년시절에 ‘경영은 사고(思考)’라고 조언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사라져가는 기업가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한국을 대표하는 큰 기업가들의 영혼과 사상을 반추해 보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 창업주,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 창업주, 연암(蓮庵) 구인회 LG 창업주, 최종현 SK 전 회장… .  자원과 자본, 인재가 빈약한 한국에서 기업가의 길을 걸어온 이들의 고뇌와 사색의 깊이는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사색은 오늘의 후배 기업가들은 물론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좌표가 될 것이다.

때 마침 2010년은 삼성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한민족에게 치욕을 안겨준 한일합병 100주년이기도 하다. 자산 300조원에 매출액 200조원 규모로 커진 글로벌 한국기업 ‘삼성그룹’. 1938년 삼성상회(삼성물산의 모체)를 창업한 기업가 호암이 걸어온 길은 과연 어떠한 길일까. 한마디로 고도의 압축성장을 구가해온 한국경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1위기업 자리를 놓고 현대, 대우와 엎치락 뒤치락 했던 변화무쌍의 길이기도 했고, 일제강점과 6·25전쟁으로 피폐된 조국이 G-20 국가로 올라서는 데 크게 일조한 불가사의의 길이기도 하다. 1948년 삼성물산 공사를 시작으로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연이어 창업하면서 호암은 거부(巨富)의 반열에 들어섰다. 1969년 삼성전자를 필두로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 삼성반도체를 설립하면서 그는 글로벌 삼성의 초석을 다졌다. 50년 기업가 인생을 마감한 1987년까지도 호암은 마지막 남은 청춘의 정열을 불태웠다. 삼성항공과 삼성종합기술원, 삼성경제연구소 설립이 그러했다.

1986년 6월 27일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 호암이 밝힌 과학보국(科學報國)의 변(辯)은 종교적 신념에 가까웠다.

“과학 기술은 지식과 힘의 결합이며, 미지의 경지, 그리고 더 높은 정상으로 인간을 이끌어 주는 무한탐구의 세계다. 영원한 기술혁신과 첨단기술 개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야 말로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이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의 융성을 약속해 준다.”

호암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세기를 앞서가는 도전에 마지막 불꽃을 살랐다. 호암의 과학보국은 이건희 회장의 창조경영과 위기경영, 글로벌경영으로 이어지면서 화사하게 만개(滿開)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세계일류기업 ‘삼성’으로 승화한 것이다.

호암의 사색과 번민 속에서 탄생한 경영철학은 ‘논어(論語)경영’과 ‘일류(一流)경영’ 으로 압축된다. 그는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났다. 호암은 다섯 살 무렵부터 형을 따라 학문의 길에 나섰다. 아침마다 뒷산 오솔길을 걸어 한학(漢學) 서당 ‘문산정’으로 향했다. 호암이 훗날 인생에서 가장 감명받은 책을 공자(孔子)의 논어로 꼽았던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 듯 하다. 호암은 동양의 전통사상과 인재경영에 서양의 합리사상과 과학기술을 접목시켜 글로벌 삼성의 도약을 예비했다.

호암의 논어경영은 일본재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 1840~1931)의 경영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논어사상을 기초로 500여개의 기업을 세운 일본 자본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시부자와는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도덕과 경제가 하나’라는 그의 주장은 자칫 모순돼 보이지만, 그는 “올바르게 번 돈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 진정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길”이라고 주창한 일본의 경제 사상가다.

호암이 일류경영에 눈을 뜬 것은 1960년. 이병철 회장은 59년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폭설로 서울행 비행기를 갈아타지 못해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새 해를 맞이했다. 당시 일본의 TV방송들은 세계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를 전망하는 신년 좌담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는 여기서 구상중인 비료공장의 기술이나 차관도입 방법까지도 알게 됐다. 이후 호암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87년 정초까지도 해마다 어김없이 ‘도쿄 구상’을 하게 된다.

이른바 ‘도쿄’라는 글로벌 창(窓)을 통해 세계 일류기업의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이후 호암은 일본의 경제 친구들과 ’경청’, ‘소통’의 우정을 쌓아나가면서 일본기업 따라잡기에 나섰다. 도고 도시오(土光敏夫 · 1896~1988 · 전 도시바 회장, 게이단렌회장),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 1904~1987 · 전 신일본제철 회장, 게이단렌 회장),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 1911~2007 · 전 이토추상사 회장)는 대표적인 사색(思索) 동지이자 글로벌 파트너였다. 이들과의 교유(交遊)로 사업보국과 일류경영이라는 호암 특유의 경영철학을 완성해 나갔던 것이다.

탄생 100주기를 맞은 호암의 경영철학은 21세기 한국경제에 새로운 길을 열라고 재촉하는 듯 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업가 정신의 열정과 영혼을 회복하는 것이다. 나아가 보다 창조적인 경제로 완벽하게 탈바꿈하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삼성의 완벽주의가 세계 최고기업은 만들었지만 창조 발명기업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조적이면서도 인간 그대로의 재미가 있는 세계 최초 최고의 발명품은 인간의 실수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온유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100주년 기념 사업을 위해 새 단장이 한창인 정곡면 중교리의 ‘호암길’을 걸으면서 문득 노자의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떠올렸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쉴 새 없이 발전한다. 만물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생성하고 발전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생각은 기업에는 끊임없는 이노베이션이 필요하다는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한국경제와 삼성은 이 시점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반사적 성과에 머물지 않고 21세기 예측불허의 과학과 문화의 ‘창조바다’로 겸손하고도 단호하게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과제는 호암을 비롯한 이 나라 ‘경영의 신’들의 정신을 한국 경제의 창조정신으로 승화시켜 명실상부한 세계의 경제 리더국가가 되는 것이다. 인도의 시성(詩聖)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이러한 날들이 올 것을 믿고 한국을 ‘동방(東方)의 등불’이라 일컬었으리라.

인문자(人文自) h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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