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이학수 전 부사장(왼쪽)과 김인주 전 사장. 이들은 전략기획실(구 비서실) 해체 직전까지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축인 삼성그룹, 그리고 삼성의 중심축을 꼽는다면 단연 '비서실'(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8년 이미 비서실(당시 전략기획실)은 해체됐다. 하지만 여전히 삼성의 경영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회자되는 것은 이병철 선대 회장을 축으로 하는 오너일가와 비서실이다.
삼성에 비서실이 처음 탄생한 것은 1959년이다. 당시 삼성물산의 한 부문으로 전 직원은 20명에 불과했다. 맡은 업무도 의전 등 일상적인 사무 처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1970년 중반 이병철 선대 회장은 비서실의 역할과 규모를 크게 강화했다. 미쓰비시·미쓰이 등 일본의 대기업들의 비서실을 벤치마킹한 것.
비서실 초창기 삼성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은 무역업을 강화했다. 때문에 비서실의 주요 업무는 전세계 경제 정보 수집 및 분석이었다. 이를 통해 제조계열사들은 세계 경제 시황에 맞는 재품을 개발하고 생산량을 결정할 수 있었다. 각 국가와 경쟁사, 고객사들에 대한 빠르고 정확한 정보분석 역시 삼성의 선전에 날개를 달았다.
비서실장은 계열사 사장 이상의 힘을 가졌다. 주요 계열사 설립 및 인수합병도 비서실의 판단에 의거해 회장의 결제를 받았다. 한때 일각에서 "삼성 계열사 사장의 임기도 비서실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 돌 정도로 비서실의 힘은 막강했다.
실제로 비서실에는 삼성의 주요 인재들이 모였다. 삼성전자 대표이사인 최지성 사장은 1993년 비서실 전략1팀장을 역임했다. 일각에서 전략기획실이 부활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삼성전자 신사업추진단을 이끌고 있는 김순택 부회장은 18년 동안 비서실에 근무했다. 2008년 해체 직전까지 전략기획실의 수장과 2인자 역할을 맡은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경련 상임 부회장과 상공회의소 부회장을 맡은 현명관 삼성물산 고문은 비서실장직을 역임했다.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현 차병원 그룹 부회장)도 삼성 비서실 출신이다. 현직 삼성 CEO 가운데 30% 이상이 비서실 혹은 비서실 후신 출신일 정도다.
이러한 비서실도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이 취임 이후 자율경영에 방점을 두면서 그 역할이 다소 축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비서실은 15개 팀, 250명의 임직원으로 구성된 거대조직이었지만 1998년 구조조정본부(구조본)로 명칭을 바꾸고 7개 팀으로 개편됐다. 인원도 100명 안팍으로 줄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구조본의 역할은 오히려 강화됐다. IMF 당시 65개 계열사를 45개로 축소한 것은 구조본의 작품이다. 이 과정에서 17만명에 달했던 삼성 임직원은 11만명으로 크게 줄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구조본은 IMF 위기 속에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추진,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본부장을 맡았던 이학수 전 부회장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진 것은 당연지사. 이후 이학수 체제의 구조본은 2006년 전략기획실로 다시 개편됬지만 여전히 삼성의 헤드쿼터 역할을 했다.
50년 가까이 삼성의 콘트롤타워 역할을 해온 비서실과 그의 후신들은 불법 정치자금 문제에 휘말리기도 했다. 때로는 과도한 실력행사로 그룹 내 조직원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비자금 파문으로 결국 해체된 것도 전략기획실의 업무에서 비롯됐다.
이같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비서실은 삼성과 한국경제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은 삼성 비서실을 모델로 삼아 그룹의 사업을 기획·추진하는 그룹차원의 별도 사업부를 꾸렸다. 그리고 이는 당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한국경제 신화의 원동력이 됐다.
삼성 내부에서도 비서실의 역할은 기존에 알려진 것 이상이다. "삼성 비서실은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정보력을 넘어선다"는 세간의 풍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삼성은 김일성의 사망과 걸프전 등을 비롯해 주요 국가의 개각, 정책 변화 등을 국가 정보기관보다 먼저 수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정보는 단순히 모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원본 데이터를 사업에 접목할 수 있도록 분석하는 것도 비서실의 역할이었다.
구조본 출신의 한 삼성 간부는 "삼성과 전혀 관련이 없어보이는 정보도 비서실의 손을 거치면 사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주요 정보로 변했다"며 "이는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에 비견될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해체 2년도 채 안돼 다시 비서실의 부활의 당위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세계 경제의 지각변동이 시작되면서 삼성을 비롯한 국내 기업들은 글로벌 경제의 중심을 도약하느냐, 아니면 변방으로 밀리느냐의 기로에 서있다. 그 어느때 보다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계열사 간 중복 사업 조정, 미래산업 발굴 및 육성 등 그룹 차원의 콘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아주경제= 이하늘 기자 ehn@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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